고등학교 내내 수진은 운동장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탱자나무 아래 벤치에 자주 앉아 있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벤치에 앉아 엠피쓰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른 곡 정도 넣으면 용량이 차는 엠피쓰리에 저장된 가수는 한 명이었다. 윤종신. 그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그날>이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윤종신의 노래를 굳이 찾아서까지 듣게 된 건 가사 때문이었다. 그의 가사는 쓸쓸했고, 유치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그 담백한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학교에는 그 옛날 우리의 모습이 있지
뭔가 분주하게 약속이 많은 스무 살의 설레임
너의 학교 그 앞을 난 가끔 거닐지 일상에 찌들어 갈 때면
우리 슬픈 계산이 없었던 시절 만날 수 있을 텐데
분명 슬픈 가사인데 수진은 어째서인지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아직 오지 않은 스무 살,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나날을 기대하곤 했다. 부서져내릴 것 같은 이별의 아픔도, 분주한 캠퍼스의 풍광도, 막연하지만 푸른 빛을 띠는 스무 살의 기대가 지루한 고3을 견뎌내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슬픔을 엿보며 미래를 도모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게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감정이란 것까진 아직 알지 못하는 나이였다.
“쟤야 쟤, 내가 말했던 아이돌 연습생.”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지수가 식판을 든 채 수진에게 말했다. 지수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남학생 무리가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는 급식실의 풍경이었지만, 지수가 말한 이가 누군지는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당시 태형은 대형기획사에 소속되어 가수 데뷔를 앞두고 있었다. 고등학생 내내 태형은 어딜 가든 시선을 끄는 존재였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연예인이란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거리에서 캐스팅될 만큼 수려한 외모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태형과 제대로 말을 섞어본 건 고3때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였다. 데뷔가 임박해짐에 따라 태형의 결석일수는 늘어갔다. 수행평가나 중간고사의 시험범위를 알려주는 건 반장인 수진의 몫이었다. 가끔 학교에 나오는 날에 태형은 필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수진의 교과서를 빌려갔다. 태형이 자신의 교과서를 빌려가 공부를 하는 것인지 수진으로써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을 펼쳐본 건 확실했다. 노트를 돌려 받으면 그 사이에 붙여진 포스트잇 때문이었다. 포스트잇에는 그림이 그려 있었다. 짱구 웃는 그림, 고양이 그림, 4컷 만화 같은. 수진은 당혹스러웠다.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던 수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치형 교문에 기대 있던 태형이 수진에게로 다가갔다. 타이를 매지 않은 와이셔츠 차림의 태형에게서 설핏 담배냄새가 풍겼다.
“나?”
“응, 반장 너.”
“내가 왜?”
수진의 물음에 태형이 픽 웃었다.
“되게 경계한다, 너. 친구끼리 떡볶이 좀 먹으러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망설이는 수진에게 태형은 덧붙였다.
“뭐 좀 물어볼 것도 있구. 같이 가자. 응?”
그렇게 말하곤 태형은 길게 빠져나온 수진의 가방 스트랩 끈을 잡고 앞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