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지퍼를 내린다. 갈라진 칸막이 사이로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오늘 저와 함께할 소중한 것을 꺼낸다.
"절 잡으세요."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다. 자루망 가득 쌓인 0.7mm 스피드 볼펜들. 마치 어부가 망을 던져 최고의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 저는 그중 단 한 자루를 신중하게 뽑아 든다.
커피를 주문하고 받은 영수증을 펼친 다음 방금 고른 펜으로 길게 한 줄을 그어본다. 차가워진 심장이 제 손끝에서 다시금 온기를 찾아 뛰는 기분이다. 날이 추워 한참을 쥐고 있어야 비로소 잉크가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져 나간다. 만약 이렇게 펜을 꾹 누르지 않으면, 제대로 써지지도 않고 마치 피를 토하듯 끊기곤 한다.
검은색 동아 스피드 0.7mm 볼펜. 이 펜 한 자루를 쥐는 순간, 저는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짜릿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펜 한 자루만 있으면 마치 마법사가 된 것처럼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그 상상의 맛은 생각보다 훨씬 더 황홀한다.
오늘의 시작을 알리는 펜의 펄감이 좋으면, 저는 날아갈 듯 신이 난다. 마치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처럼 미친 듯이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펜이 시원하게 잘 써져야 비로소 제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을 알기에, 이것은 저에게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15년 전부터 메모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제 삶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제가 늘 즐겁게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하루 종일 웃고 다니지만 그 웃음의 근원에는 메모와 정리가 있다. 화려한 형광펜으로 글에 색을 더한다. 흑백 사진에 컬러를 입히는 것처럼, 제 하루에 생생함을 불어넣는 시간이다. 블루, 오렌지, 연두색 형광펜을 가지런히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블루는 저의 온전한 시간.
핑크는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연두는 가정에서 보내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를 세 가지 중요한 것으로 분류한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하루를 조금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나아가 온전히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제 하루를 끌고 갔는지조차 모른 채 또다시 시간에 끌려간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끌려가고 싶지 않다.
과거의 저는 식당에서 주문조차 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고,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던 쓸모없는 존재였다.
지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차단한다. 책상에 앉아서 일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정리'다. 그 자리에 앉아 '지금 이것만은 해야 할 것'을 정리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차단한다. 35년 동안, 정리가 이렇게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살았다.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 주변의 모든 것이 저에게 득이 되는 줄 알고 그저 쓸어 담기만 했다. 재능도 욕심도 많았던 저는, 지금에서야 제가 왜 그렇게 잘 풀리지 않았는지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저는 정말 딴사람이 되어간다. 메모와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제 인생, 의식, 그리고 생각이 180도 바뀌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저를 보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볼 정도다. 이 모든 변화는 바로 '정리'에 대한 깨달음 덕분이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매일 글을 쓰면서 제 삶을 되새기고, 정리하고, 비워나간다. 하루의 메모장에는 '오늘 하루 정리한 것이 무엇인지'를 적고, 꾸준히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 버릴 것 하나만 적기 : 물건이든, 습관이든, 관계든 무엇이든 하나를 선택한다.
적고 나서 1분 안에 행동하기: 적기만 하고 미루면 정리는 절대 진행되지 않는다.
정리는 '비우는 능력'이 아니라 '결정하는 힘': 무엇을 남길지 고르는 것이 핵심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