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재개봉 영화 「늑대와 춤을」 관람기 -
엄청난 숫자의 버펄로 무리였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보이는 평원가득 버펄로들이 풀을 뜯고 있다. 파란 하늘아래 지평선까지 아메리카의 드넓은 대지위로 커다란 버펄로들은 수많은 점처럼 보였다. 어미 소와 함께 있는 작은 소들도 보였다. 수우족(*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중 하나)들과 존 덴버(늑대와 춤을)는 그 장면을 경외감과 기쁨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아메리카원주민(*전에는 인디언이라 불림)들은 그들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메리카에서 살아왔지만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함께 지내왔다. 그들은 버펄로를 형제라 불렀고 만년동안 공존하며 살아왔다.
이런 사상은 그들이 지은 이름에도 녹아있다. 지혜가 많았던 아저씨의 이름은 「열마리곰」이었고, 추장은 「발로 차는 새」, 움직임이 빨랐던 청년의 이름은 「머리에 이는 바람」, 항상 웃고 다니던 한 소녀는 「언제나 웃음」이었다. 한 사람, 한사람을 관찰하고 내면적인 특성까지도 적절하게 포착해냈다.
수우족 마을 근처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존 덴버에게 늑대 한마리가 찾아온다. 덴버는 고기 한 점을 던져주며 늑대에게 말을 건다. 늑대는 매일아침마다 나타난다. 덴버는 하얀 양말이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친구가 없던 존 덴버에게 하얀 양말은 친구가 되어준다. 들판에서 늑대와 장난치는 모습을 본 수우족 사람들은 덴버에게 「늑대와 춤을」 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30년 전, 대학동기인 선희와 민석도 영화를 보고 왔다. 서로 대화 끝에 자기들 마음대로 우리들의 별명을 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머리가 좀 컸던 형민선배는 「머리에 붙은 몸통」, 똑똑했지만 왠지 잘난척하는 것 같았던 석준에게는 「너 혼자만 잘났니?」, 항상 일찍 나와서 학생회 실을 청소했던 은준 선배는 「아침마다 청소」, 언제나 웃고 다녔던 영애에겐 「항상 웃고다녀」 별로 말이 없었던 나는 「혼자만 새침 떠니?」였다. 각자의 특성을 포착해내기는 했지만 외형적인 특성뿐이었다. 장난으로 지은 것이었지만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재밌어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별명으로 불렀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불릴까? 아마 수우족이라면 「고양이와 춤을」 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선희와 민석이라면 「고양이만 챙겨」 라고 했을 것이다.
드넓은 평원위에는 붉은색의 사체들이 나뒹굴고 있다. 가죽만 벗겨진 채 그대로 살을 드러낸 거대한 소들의 사체였다. 백인들은 돈 되는 털가죽을 벗겨가고 돈이 되지 않는 나머지부분은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존 덴버와 수우족들은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한 짓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숫자도 많았다. 그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곧 자신의 영토에도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버펄로의 전면적인 학살 전이었던 그때로부터 겨우 100여년이 지났다. 버펄로는 한때 23마리만이 남겨진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보호정책으로 인해 멸종되지는 않았다. 1800년 당시 북미대륙에 버펄로는 5,000만 마리 이상이었다. 현재는 50만마리가 있다고 알려져있지만 대부분의 버펄로는 가축화된 것이고 들소와의 교잡종이다.
야생성이 남아있는 이동하는 버펄로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만 4,500마리정도가 보호되어 살고 있다. 그나마 이동하는 면적도 그들의 조상이 하던 것의 1%정도이다.
그러나 옐로스톤에 살고 있는 버펄로는 옐로스톤에서만 보호받을 수 있다. 공원을 나가는 즉시 사살할 수 있도록 허가되어있다. 이제 사살한 버펄로는 더 이상 들판에 방치되지 않는다. 1800년대와는 다르게 이제는 고기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사체는 육우공장으로 옮겨진다.
동물보호의 문제와 인도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버펄로의 생명이었던 야생성을 빼앗는 일이기도 하다. 몇 만 년 동안이나 북미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살았던 버펄로의 유전자에는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유전자가 있다. 결국 이동하는 버펄로를 죽이는 것은 그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죽이고 이동하지 않는 개체만을 보존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야생성을 가진 진정한 버펄로를 멸종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메리카원주민들도 그들의 땅을 빼앗기고 지금은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곳은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이 삼분의 일이 될 만큼 열악한 환경인 것으로 알려진다. 한때 보호구역내의 자살률이 이슈가 된 적도 있다. 지금은 카지노를 유치해서 경제를 살려보려하고 있지만 결국 자연과 공존하며 공감했던 자유로운 영혼인 아메리카 원주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백인들의 엄청난 학살로 원주민과 버펄로가 거의 멸종되어가던 때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그들의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한 용맹한 추장은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당신들(당시 백인들)은 다른 종류다.”
물론 그때 돈(황금, 토지) 때문에 원주민을 처참하게 죽인 백인들은 나의 조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 눈뜨면 부동산뉴스와 코스닥지수를 살펴보며 콘크리트숲속에 사는 우리들은 자연과 교감하던 그들과는 다른 종류일까?
남편은 30년 전에 보았다는 것만 기억날 뿐 누구와 보았는지 어떤 영화였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슬이는 거의 잔 것 같았다. 별이는 재밌긴 했지만 너무 지루하다고 어떻게 세 시간짜리 영화가 있냐고 불평했다.
나는 학교 동기 강민과 보았다. 강민이 세 시간이라 좁은 영화관에서 몸을 꼬았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를 본 후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었던 기억도.
25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회에서 강민에게 「늑대와 춤을」 영화를 누구랑 보았는지 기억나느냐고 물었더니 강민은 그 영화를 보았는지 조차도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마 술과 담배를 많이 마시고 피워서 잊었을거야'
나는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자연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아직 몰랐다. 이제 알고 있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파괴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자유롭게 이동하는 야생성을 가진 버펄로는 이제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나마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중앙데일리 [비주얼경제사] 버펄로의 비극적 최후는 세계화가 낳은 과오의 역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