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의 일상
13평이 될까 말까 한 작은 빌라다. 안방은 작아서 침대로 가득 차있고 옆의 주방에는 우유병과 작은 아기용 식기들이 개수대 안에 쌓여있다. 침대 하나에 두 달 된 슬이와 나, 그리고 다섯 살 별이가 한꺼번에 자고 있다.
슬이가 뒤척였다. 분유를 찾는 신호다. 얼핏 잠들었던 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킨다. 정확히 새벽 4시다. 내 머리맡에는 분유병과 보온병이 함께 놓여있다. 며칠 전에 분유를 조금 늦게 주었을 때 슬이가 엄청나게 울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에 미리 준비해놓았었다. 나는 너무 졸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젖병을 슬이 입에 물렸다. 다행히 슬이는 깨기 전에 젖병을 물었다. 얼마 후 슬이는 충분히 먹었는지 스르르 다시 잠이 들었다. 4시 25분이다. 나도 슬이 옆에서 또다시 잠이 들었다.
“띠리띠리 띠리”
알람 소리다. 여섯 시다. 슬이가 조그마한 혓바닥을 움직여 우유병 빠는 소리를 냈다. 우유를 먹이고 슬이가 잠든 틈을 타서 별이의 옷을 입혔다. 하얀색 바탕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와 핑크색 스타킹과 레이스 치마다. 할머니(시어머니)가 옷 입히기 힘들까봐 나는 새벽에 옷을 입혀놓는다. 그리고 머리도 핑크색 머리핀을 꽂아 두 갈래로 윗부분만 묶었다. 누워있기 때문에 다 묶을 수가 없다. 옷을 입히고 머리를 묶어도 별이는 계속 자고 있다. 7시가 훌쩍 넘었다. 시계 옆의 거울을 보니 나는 머리도 안 빗었다. 손가락으로 빗질해서 머리를 질끈 묶고, 어제 입었던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7시 50분까지는 시댁에 가야 한다. 그래야 사무실에 지각을 안 할 수 있다.
슬이를 업고 출근 가방과 유치원 가방을 메고 망토로 슬이를 덥은 후 별이를 깨운다. 별이는 일어나기가 싫다. 잠이 깨지 않아 몸이 겨울 잠자는 아기 곰처럼 움직임이 늦다. 아직 만 다섯 살이 되려면 6개월이나 남았다.
아침 7시 30분이다. 나는 회사에 늦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안 좋다. 인력풀을 만들어 구조 조정한다고 난리가 났다. 다른 과의 어떤 직원은 지각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인력풀에 들어갔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누구도 특별히 자를만한 이유가 없다 보니 맞벌이라고, 지각한다고, 휴직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구조조정대상에 넣어질 수 있었다.
별이를 겨우 깨워서 집을 나왔다. 나는 별이를 안아주고 싶지만 이미 슬이를 업고 있어서 그럴 수 없다. 유모차에라도 태웠으면 좋겠는데 엘리베이터 조차 없는 4층 빌라여서 어려웠다. 손을 잡고 있지만 졸린 별이는 자꾸만 멈췄다. 나는 달래 가며 별이와 함께 걸었다. 시댁까지는 원래 걸어서 10분이지만 항상 20분이 걸렸다. 아침 바람이 쌀쌀하다.
슬이와 별이를 시댁에 데려다주고 겨우 정시에 출근했다. 버스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지각할 뻔했다. 사무실에 뛰어 들어가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남자 직원이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하다. 뭔가 얘기하고 싶은데 말을 못 하는 눈치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민원복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그 직원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게 됐다. 청바지에 커다란 핏자국이 남아있다. 어제 생리가 샜는데 깜빡하고 다시 입고 온 것이었다.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갔다. 전화를 300통 받은 것 같다. 마치 ARS응답기가 된 것처럼 전화를 받고 다시 전화기를 내려놓을 새가 없었다. 가끔 시계를 보면 시간이 한 시간씩 지나가 있다. 분 침이 사라진 것 같다.
퇴근시간이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슬이가 많이 울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나는 사원복을 입은 채로 퇴근했다. 어머님은 출근해야 돼서 옷을 새로 샀냐며 좋다고 했다. 다행히 슬이는 많이 칭얼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슬이를 볼 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는데 어머님은 계속 업고 있어서 그런지 슬이가 순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아버님도 같이 봐주니까 좀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별이도 유치원에 가있었다.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다시 슬이를 업고 별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
“엄마, 내일도 미술학원 가야 대? 엄마랑 집에 있으면 안대?”
별이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별아. 엄마 말 잘 듣기로 약속했지? 엄마 이제 회사 가야 되잖아”
나는 슬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다. 슬이는 분유를 먹다가 울고 있다. 벌써 9시다. 슬이는 이 시간이 되면 큰소리로 울었다. 아마도 졸리면 그러는 것 같았다. 빌라는 4층짜리 두 개동이었는데 한번 울면 빌라 전체가 울리는 듯했다. 전에 슬이가 너무 울어서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엄마는 괜찮다고, 100일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원래 그런 애들이 더 순한 애라고 했다. 이제 두 달이니까 한 달만 기다리면 된다. 너무 시끄러워서 이웃들이 항의할까 봐 나는 슬이를 안고 별이를 데리고 옥상으로 갔다. 그래도 여기는 좀 시원하다. 방 안에서 보다는 답답하지 않다.
나는 달래고 달랜다. 6시에 정시 퇴근해서 집에 온 지 세 시간 째지만 단 30초도 의자에라도 앉아보지 못했다. 오늘은 남편이 집에 올 것이다. 남편은 경찰 시험에 합격하고 출근한 지 이제 11개월째였다. 경찰은 24시간 근무 24시간 휴무 – 2교대다. 어제 밤샘근무를 했으니까 오늘은 오는 날이다. 별이랑도 놀아주어야 하는데. 별이는 한 번에 열 권씩 책을 읽어달라고 가지고 오곤 했다.
10시가 넘어 퇴근한 남편이 집에 왔다. 남편이 슬이를 받아 안았다. 남편이 아기를 재우는 동안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젖병을 삶았다. 아기가 다행히 많이 울지 않고 천사처럼 잠들었다.
“오늘은 많이 안 울었네. 우리 아가”
남편과 나는 겨우 한숨 돌리며 웃는다. 별이는 침대 한구석에 이불도 덮지 않고 잠들어있다. 별이의 손에 “엄마 안녕”이라는 책 하나가 놓여있다.
“별이 이 책 정말 좋아해. 벌써 해진 것 좀 봐”
“바다표범 사진 책?”
“이 책 근데 너무 슬픈데”
책 표지에는 엄마 하프물범이 얼음판 위에서 아기를 낳고 기른 후 단지 2주 만에 새끼를 남겨놓고 떠나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있다. 물범 엄마들의 무리들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차가운 북극해에서 얼굴만을 내밀고 있다. 북극의 차가운 얼음판 위에 작은 하프물범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누워있다. 서로의 순하디 순한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젖어있다. 책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그리고 별이의 머리에 베개를 베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