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조_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한강 산책로를 좋아한다. 집에서 약 백 여 걸음만 가면 여의도 샛강 산책로가 나온다. 여의도라는 타원형 섬의 밑줄을 쭉 따라서 난, 고요하고 청량한 길. 밤이 어둑어둑해도 길게 이어진 누런 가로등이 서늘한 아스팔트 노면을 따스히 비추어 그리 쓸쓸하지 않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 한동안 타지 않아서 타이어는 바람이 빠져 축 처져있고, 안장에는 희뿌연 먼지가 잔잔하게 깔렸다. 대충 운동복을 입고 집 밖을 나와 샛강길에 다다라서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딱, 반포대교 한강공원까지만 찍고 오자.
'헉헉'
10킬로가 안 되는 샛강 산책로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벗어나는 일이 이리도 숨차는 일일줄이야. 아니다. 힘든 건 따로 있었다. 허벅지. 정면으로 보이는 산책로만을 올곧게 바라보며 속력을 내다보니 허벅지가 불타오르고 땅땅거린다. 고개는 무거워져 어느새 검은 아스팔트 노면만을 바라본다. 여의도에서 반포대교로 가는 한강의 남쪽 산책로는 오르막길을 여러 번 거쳐야 했다. 내리막길에서의 시원함을 만끽하다 보면 금세 오르막이 가로막아 허벅지의 근육을 연소시킨다. 지금 놓인 내리막길이 분명 돌아오는 길에서 나를 배신하고 오르막길이 되어 있을 생각을 하니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반포대교에 다다를 때까지 허벅지를 달랠 길은 없었고, 온몸의 무게를 버티는 두 팔은 저릿해져 왔다. 고개는 자꾸만 무거워져 어두운 노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수이자, 작가인 요조의 산문집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는 요조가 살면서 흔히 겪고 느낀 것들을 꼬박꼬박 메모해 둔 후 일기 형식으로 담담하게 적은 일상이 적혀있다. (가수라서 그런지 활자에서 운율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책의 중간쯤 다다르면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라는 장에서 요조가 남자친구와 성산일출봉에 올라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는 각자 필름 카메라를 하나씩 챙겨 들고 오후 늦게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천천히 완만한 들판을 걸어 올랐다. 이윽고 계단이 등장했고, 이종수는 또 한 번 허벅지 이야기를 했다. 터지지 않게 조심해!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둘 다 허벅지가 터지지 않았다. 이종수는 놀라운 듯 말했다.
"진짜 이상하다. 혼자 올라왔을 때는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왜 오늘은 하나도 안 힘든 거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중간중간 엄청 쉬었잖아."
우리는 오르는 중간 충분히 쉬었다. 일출봉 초입에 있는 유일한 휴게소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도 보고, 조금 오르다가 바다도 보고, 또 조금 오르다가 탁 트인 성산 일대에서 우리 집도 찾아보고 책방도 찾아보았다.
(...)
나는 그 틈에 서서히 여기까지 올라온 태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모든 걸 이렇게 하자. 책방도 음악도 글도, 내 나머지 인생 속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 이렇게 하자.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눈을 오랫동안 꾹 감았다.
그녀는 아마도 삶을 그녀답게 사는 법을 일상에서 틈틈이 알아가고 있는 듯하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자신들의 걸음과 숨소리를 온전히 느끼고, 주변 풍경을 충분히 오감에 담아 가다 보면 어느샌가 정상에 다다른다. 그렇게 일상과 앞에 놓인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결코 허벅지는 터지지 않은 채로 마음 편히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반포대교 잔디밭에 뻗어 숨을 거칠게 고르는 순간, 이 둘의 성산일출봉 정복기가 생각이 났다. 나의 허벅지는 반환점에 다다라서 열기를 내뿜으며 땅땅해져 있다가, 이내 사시나무 떨림이 멈추지 않고 비실비실해졌다. 두 손으로 적당히 주물럭거려 주며 토닥여주고 나니, 그제야 내가 누운 잔디밭의 푹신함과 세빛둥둥섬의 반짝임, 주변을 둘러싼 한강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재잘거림이 온전히 느껴졌다.
다시 자전거의 손잡이를 고쳐 잡는다. 최대한 손잡이를 부드럽게 잡는다. 내 상반신의 적당한 균형감을 잃지 않을 정도의 무게만 팔에 고스란히 맡긴다. 고개는 정면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한강의 무수히 많은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뒷 목에 적당한 버팀 힘을 준다. 페달을 밟는다는 느낌보다는 페달이 체인의 궤도에 맞춰서 돌아가는 원심력에 살포시 기대어 으쌰으쌰 거릴 정도로만 힘주어 달린다. 땀이 맺힐 즈음에 앞에서 불어오는 한강 바람을 듬뿍 적시며 땀을 식힌다. 갈 때는 그리도 열을 내던 허벅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 한 번도 성을 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꽤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곤혹스러웠던 하루였다. 실패를 두려워했던 나머지 심적인 압박감이 만연했다. 아마도 요조가 그렇게 허벅지 터지지 않게 부드럽게 인생을 살아가는 다짐을 덤덤히 결심하고 이행할 수 있는 데에는, 그녀가 그녀의 직업과 일상에서 마주하는 실패마저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말처럼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 남은 생을 살아간다는 다짐이, 매일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이 도심 속 나에게서도 쉬이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하루를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