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1
'나'라는 인간은 객관화가 잘 된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수없이 연속된 현실의 고통 속에서 번민하며 연민하다가 끝내 발가벗겨진 채로 누더기가 된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은은하게 몸을 감쌌다. 하나 이 또한 모순적인 모습이라니, 걱정스럽다.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아 그렇구나. 내 모습, 이미 내 존재와 현재의 성격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못 된 심보가 자리하는 그 모순! 여전히 유연하지 못하고 유연하길 바라며, 욕심부리지 않길 바라지만 욕심부리고 있으며, 삶을 연민하지 않지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모순! 격정의 시간 속에서 나는 여전히 부대끼고 있음을 도스토옙스키, 아니 지하 인간이 일깨워준 듯하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탈출구로 신앙을 제안하지만, 안타깝게도 종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 현재 기댈 수 있는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또한 아직은 결론짓지 못하고 여전히 신앙을 갈구하는 마음이 한편에 남은 것 또한 모순적리라.
도스토옙스키의『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모순덩어리인 한 인간의 일기 그 자체나 다름없다. 관청에서 일하던 그는 우연히 먼 친척이 남겨둔 큰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그때부터 지하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한다. 책은 총 두 개의 챕터로 나뉜다. 전반부는 자신의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은 이 전반부 독백에 주목하며 글을 쓰고자 한다.
욕망은 삶 전체, 즉 이성과 온갖 긁적임을 포함하는,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속 미천한 한 인간, 반주인공적 주인공, 지하 인간을 통해 욕망을 거부하고 이성적 판단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기대는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 이성적 판단이라 일컬어지는 정량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사고조차도 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위의 문장, 이 세상 온갖 고상한 형언을 가져다 붙여도 위의 한 문장만큼 그의 마음을 강렬하게 대변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인간 삶 전체의 발현, 그것이 욕망이라니,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 자식을 둔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들으면 놀랠만한 그런 한 줄. 욕망으로 삶을 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충동적인지 혀를 끌끌 차며, 자식들의 사랑을 명문 대학 그리고 고액 연봉이 보장되는 직업에 기대는 그들에게는 경악을 일으킬만한 한 줄일지도 모른다. 하나 우리는, 비록 도스토옙스키만큼 비루하고 척박하며 야속하기까지 한 삶을 살아보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그가 지하 인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은 경박하고 볼썽사나운 존재여서 , 체스 기사처럼 목적 자체가 아니라 오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 하나만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가 알겠느냐만 는(장담할 순 없으니까.) 인류가 지향하는 지상의 모든 목적은 오직 목적 달성을 위한 이 끊임없는 과정에, 달리 말해 삶 자체에 있는 것이지, 어차피 2x2=4가 될 수밖에 없는 목적 자체에, 즉 공식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2x2=4는 이미 삶이 아니라, 여러분, 죽음의 시작이 아닌가. 적어도 인간은 늘 어쩐지 이 2x2=4를 두려워해 왔지만, 나는 지금도 두렵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오직 이 2x2=4를 찾아 대양을 향해하는 것뿐이지만, 또 이 탐색의 과정에서 삶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걸 찾는 것, 발견하는 것은 맹세코 어쩐지 두려워한다. 실상 그걸 발견하고 나면 그땐 더 이상 찾아 헤맬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를 만큼 오묘하고 문학적인 그의 문체. 그 안에 깃든 것은 결코 몽환적이지만은 않다. 말 그대로, 우리의 몸에 응당 뿌리로 자리한 욕구를 억제하고 오로지 이성적 사고만을 추구하는 미련함. 우리는, 인간은, 답을 찾고자 하는 존재다. 그리고 보통 답이 정해진 것들은 수식으로 정리된다. 2x2=4, 얼마나 명쾌한 수식인가. 다만,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으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다 못해 인간의 본질 그 자체를 하나의 수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지하 인간은 극도로 환멸 한다.
인간의 삶은 끝없는 불확실성과 도전 그리고 탐구의 연속이다. 결국 우리는 삶의 답을 찾고자 목매지만 사실상 그 답을 알고 수식으로 표현한 인간은 현생에 없다고 봐야 한다. 죽음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에만 겨우 삶이란 무엇인가를 조심스레 깨닫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삶은 의미 있다. 답은 갈구하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하다가 삶의 마침표에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 자유를 얻기 위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지하 인간은 만일 우리의 삶이 하나의 수식으로 말끔히 정리될 수 있다면 그것 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순간이 없을 것이라 호소한다.
실제로 사람은 어느 하나의 목표에 다다랐을 때 쾌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우울에 빠지기도 하다가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룬 목표보다 좀 더 상향 조정 된 목표를 세우고 또다시 직진한다. 왜 우리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려 하지 못할까? 그 문제는 바로 우리의 욕구를 억제하는 데 있다고 지하 인간은 역설한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누구든 간에 절대 이성과 이익의 명령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길 좋아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할 수 있고 이따금씩은 꼭 그래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의지적이고 자유로운 욕망, 아무리 거친 것일지라도 여하튼 자기 자신의 변덕, 이따금씩 미쳐버릴 만큼 짜증스러운 것일지라도 여하튼 자기 자신의 환상, 이 모든 것이 바로 저 누락된 이익, 즉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체계와 이론을 끊임없이 산산조각 내 버리는 가장 유리한 이익인 것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 모든 현자들은 인간에겐 뭔가 정상적인 욕망이, 뭔가 선량한 욕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일까? 무슨 근거로 인간에겐 반드시 합리적으로 따져 유리한 욕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상상했던 것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립적인 욕망 하나뿐이다.
지하 인간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그 어떤 이익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욕망이라고 부르짖는다. 합리성, 이해적 사고를 벗어던지고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독립적 욕망. 욕망을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자기 객관화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자기 객관화 또한 결국엔 이성적 사고에 비롯된 인간의 분석적 행동일 뿐이지 그가 추구하려는 쾌감의 정수는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바라보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자신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겹겹이 쌓인 지난날을 한 겹 한 겹 면밀히 들춰보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찾아가는 행동, 그것이 바로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이제 자신의 모습을 들춰봤다면 인정할 차례다. 객관화는 자신을 비판하는 단계인 동시에 칭찬하는 단계다. 자신을 비판만 하게 되면 크나 큰 우울감에 빠져 사고가 가로막힐 것이다. 맹목적 칭찬은 자기 주관파일뿐이며 결국 또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수용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단계여야 한다.
안타깝게도 말만 쉽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란 머리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 우리가 소위 메타 인지라 일컬어지는 행위는 대부분 머리로만 이뤄진다. 그래서, 어쩌면 자기 객관화는 쓸모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이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다.'라는 시그널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지하 인간에 따르면 '고통'이다. 고통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객관화는 단순히 빈깡통에 불과하다. 결국엔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알을 깨어 나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자신을 인정하려 할 때, 수치스러움이 차올라야 하고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자신의 비열함에 분노를 내질러보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이다.
이 싸늘하고 역겨운 반 절망과 반 믿음 속에, 너무 괴로웠던 나머지 자신을 사십 년간 의식적으로 지하에 생매장한 것에, 이렇게 강렬하게 창도 되었고 어쨌거나 약간은 의심스럽지만 달리 출구도 없는 자신의 상황에, 내부로 들어와 버린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이 모든 독기 속에, 계속 망설이고 그러다 어떤 영원불변의 결단을 내리고 그러나 일 분 뒤면 회환에 사로잡히곤 하는 이 모든 열병 속에 - 내가 앞서 말한 이상야릇한 쾌감의 정수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쾌감은 너무나 섬세하고 때론 의식으로부터 너무나 자유롭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꽉 막힌 인간들, 혹은 마냥 튼튼한 신경을 가진 인간들조차도 그것에 관한 한 단 하나의 특성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한 단계의 고통의 정점에 다다랗을 때, 비로소 그 고통은 쾌감이 된다. 모든 격정적인 감정이 내면을 비집고 유린하다 보면, 인간은 비로소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정을 하게 된다. 그 인정의 순간,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쾌감의 정수를 우리는 마땅히 겪어볼 필요가 있다. 등에 식은땀이 내려 안다가 결말에 다가설 때 희미한 미소 한 줌이 입술에 보여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비로소 내재된 욕구를 받아들이고 터트릴 때만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 과연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내 삶에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말 대로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적당히 삶에 좀 더 나를 스며들게 한 이후 이 책을 다시 접한다 할지라도 과연 내가 그때 되어서도 그것을 알는지도 상당히 냉소적이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만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리라는 법도 없으며, 무의식적 욕구만이 모순된 인간을 구제하리라는 것도 나에게는 난센스 하다. 결국 지하 인간도 자신의 영리함을 그리고 괴팍함을 인지하고 인정하면서도 결국엔 지하에 홀로 갇혀 괴로워하며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 중간 어디쯤에, 그 어디쯤에서 나는 답을 찾아 헤맬 듯한데, 여전히 나는 아직도 마음이든 머리로든 받아들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작가가 말하는 대로의 삶을 이번 생에서는 영원히 살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객관화 또한 의식적인 사고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이거늘 과연 내가 나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볼 수 있을까? 객관화가 되었다는 것은 의식하고 인정하는 것까지 라면, 우리 인간은 끝없이 인정한 그 무언가를 탐구하고 괴로워하며 사유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고립된 지하 속에서 갇혀버린 채 자신을 구걸하다가도 오만에 빠지는 한낯 지하인간 같은 모순적 인간의 극치는 되지 않아야만 하지 않겠나! 쾌감의 정수를 찾아내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아마도 자기 객관화의 함정에 빠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과오를 알아냈고 이해했다며 기뻐하는 행위 자체가 의식적인 단계에서만 행해진다면 우리는 결코 달라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의식, 그 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독립적 욕구를 탐구해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