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내서라도 가야겠어! 무턱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표를 끊게 한 이 여행의 씨앗은 24년 12월 중순 경 어느 만남을 통해 내 인생에 처음 심어졌다. 한창 무기력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그마저도 포기하고 나태함에 절어 살고 싶었던 나를 그나마 움직이는 것은 독서모임이었다. 날이 너무 추워도 독서모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도 모임이 있었다. 모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최신 근황 얘기를 하면서 너무도 나태하고 무기력해진 나의 시간을 쏟아냈다. 굳이 동정 여론을 만들어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나에 대해 최대한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모임원들에게 최선을 다 하는 나의 모습이라 생각했을 뿐.
모임에는 내가 따르는 형이 한 명 있다. 모임을 주최하고 장소를 제공하는 북카페 사장님으로, 나와는 이제 만 1년을 넘긴, 서울에서는 그래도 꽤 의지하며 서로를 챙기는 관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형은 내가 근황을 얘기할 때부터 걱정스러워했다. , 모임이 끝나고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오른손으로 맥주잔을 입가로 기울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술을 마시러 가자는 얘기다.
오랜만에 먹는 갈매기살. 고기를 달구는 숯불 덕에 평소보다 빨리 취기가 오를 즈음 형이 물었다.
"만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제일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야?"
"가고 싶은 곳이야 많은 거 같아요. 가급적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뭐 스위스나, 파리, 평소엔 가보기 어려운 곳들일 거 같은데요."
"그럼, 지금 돈 생각하지 말고 거길 다녀와."
뜬금없는 여행 제안이었으나 그때의 나에게는 꽤 솔깃한 조언이었다. 내가 여행을 그리고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회색분자 같은 놈인지라 여행을 딱히 인생의 소중한 존재로 인지해본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형은 내가 무기력에서 현명하게 빠져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술 몇 잔과 작은 도전 하나를 건넨 것이었다. 술자리를 파하고 담배 한 모금을 뻐끔거리며 그는 말했다.
"마음을 쓰는 거야,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덥수룩한 수염을 비집고 쏟아져 나온 짧고 굵은 한 마디. 멋들어짐은 전혀 없었지만 나의 신경을 자극하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한 마디. 도전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압도당해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며 결국엔 주저앉고 말았던 무기력한 나를 일으켜 세우는 한 마디였다.
피렌체, 삿포로, 스위스, 파리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적당히 부풀어 오르다 말았던 곳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몰타, 그리스, 로마, 영국, 치앙마이, 여행 갈 생각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조사를 해보고 나니 가보고 싶은 곳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어디를 꼭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그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내 안에 가득했던 무기력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형이 의도한 그대로에 순응한 모습. 그렇다고 그 작은 변화만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적지를 고르고 골라 후보를 삿포로와 피렌체 그리고 치앙마이로 압축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삿포로는 온천과 료칸이 정말 끝내주게 좋을 듯한데, 너무 추울 것 같아. 피렌체는 내가 사랑하는 데미안이 살아 숨 쉰 곳이기도 하고 두오모 성당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데 막상 가려니 먹을 게 걱정도 되네, 치앙마이는 한 달 살기에 너무도 적합한 곳일 듯한데 그렇다고 내가 이번에 안 간다고 영영 못 가볼 곳은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여행을 결심하고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이 이렇게도 고뇌에 차오를 일이었던가. 여태까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갔건만.
아무래도 내 지갑 상황이 녹록지 못해서 오는 주저함이 확실했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돈 걱정은 없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에 기댄 덕분에 여행은 항상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돈이 있을 땐 시간이 속 썩이더니, 이젠 시간이 생기니 돈이 내 속을 후벼 판다. 단순히 돈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여태껏 시간 핑계로 가보지 못했던 먼 곳도 가볼 수 있을 만큼 돈은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나에겐 이제 현생을 살아갈 여윳돈이 사라진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빈털터리 신세가 된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해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는 시간문제였다.
여차저차 행선지를 정하고 결제를 했으나 두려웠다. 이렇게 여행을 가는 게 맞는 것일까? 무턱대고 휑하니 현생을 도피하는 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돌아와서 닥쳐올 텁텁한 내 미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이런 근심 걱정 다 안고 여행을 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이 꽤 먹은 자식이 대책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인지 원...
결국 가슴에 조여 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나는 어렵사리 결정했던 삿포로행 비행기 편을 취소시켰다. 나는 겨울을 싫어하는데 하마터면 가서 걱정할 뻔했네! 구차한 변명,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변명을 허공에 내뱉으며 나를 위안 삼았다. 그렇게 나는 짧지만 잠시나마 몽환에 젖어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결국 나에게 여행이란, 마음을 쓰는 게 아니라 돈을 쓰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임을 굴욕감으로 체감하니 무기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나에게 기어코 여행의 불을 지피며 세상에 뿌려진 씨앗에 싹을 튼 사건은 1월 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