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이 한 가지를 물어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 따라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길에 기쁨과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다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한 한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중에서 -
진심이 담긴 길을 길들이고 싶은 바람은, 도무지 두려움에서 헤어 나올 줄 몰라 결국엔 또다시 무기력에 압도당했다. 그냥 안 갈래. 이렇게 두려울 일이면 내가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왜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 거야. 난 지금 돈도 없는데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너무도 사치스러운 거야. 내가 지금 해야 할 건 돈을 여행에 허투루 쓰는 게 아니라, 남은 돈을 어떻게 절약해 가면서 쓸지를 고민하는 거야. 여행 포기하자.
두려움을 피해 숨어 다녔던 나는 차마 형에게 내가 여행을 취소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을 쓰는 일이라는 소름 돋는 명언에도 나의 나약함은 두려움 앞에 애처로운 존재였다. 형에게는 에둘러 어머니와 함께 몇 달 후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두려움에 짓눌린 전형적인 루저의 모습이랄까.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원래 해왔던 것들을 하나둘씩 다시 만졌다. 서서히 일상에 농후해지기 시작하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설렘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신호였다. 차츰차츰 내 선택에 그럴싸한 명분을 붙였다. 그래 지금 나는 여행이 아니라 글쓰기, 유튜브에 전념해야 할 때야. 환불하길 잘했어, 엄청 후회했을 거야. 삿포로 추워서 가기도 싫은데 그걸 왜 결제까지 했는지 몰라. 내가 되뇌는 모든 말들이 내 길을 길들일 기회를 놓쳐버린 자의 합리화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친구가 급 미국 여행을 제안했다. 미국에 출장 일정이 있는데 그전에 2주 정도 미국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미 친구 한 명은 섭외했고 나머지 한 두 명을 섭외 중이라고 했다. 단칼에 거절하기 뭐해서 언제 출발할 생각인지 물어봤다. 세상에나 1월 25일 이란다.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 적어도 한 두 달 전에는 미리 예매를 해두는 편인데, 1월 25일이라면 3주가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쳐도 대단히 미쳤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감춘 채 매너 있는 거절의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잠깐,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자... 미국? 미국이라... 두렵다. 미국을 여행 갈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온다. '혼자서'는 가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곳이다. 그런 곳을 친구들은 파티원을 구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렌터카를 타고 가는 여행. 체력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그전에,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내가 가본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막연하다. 감이 안 오는데,,, 그런데 왠지 가고 싶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선다. 왜일까. 미국은 내가 후보로 둔 그 어떤 나라들보다도 훨씬 비싼 곳인데, 근데 왜 가고 싶지?
마음이 시키고 있다.
아무리 이유를 찾아도 도통 그럴싸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는 내 표정과는 다르게 심장은 꿀떡꿀떡 요동치고 있었다. 살다 보면 가끔은, 아니 꽤 여러 번, 이유를 굳이 찾을 수 없지만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툭 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다. 나에겐 이 미국 여행이 그러하다. 친구가 제안한 다음 날 곧바로 미국 여행의 파티원으로 동참하겠노라 선언했다. 나름 고심을 하다가 비행 편을 골랐다. 이젠 낙장불입. 이제 3주가 채 남지 않은 비행 편을, 그것도 일시불이 아니라 6개월 할부로!!! 거의 200만 원에 가까운 티켓을!!! 내가 결제했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무모한 결정을 내 선택으로, 내 자의로 하다니!! 35년 인생 중 가장 큰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이런 기분일까? 마음이 시키는 일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길들여오면서 나름 두근거리는 일들 위주로 위주로 삶을 배치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의외성'은 없었다. 얼추 예상 가능한 미래를 머릿속에 짐작하고 그 안에서 보이는 기분 좋은 것들을 특히 더 부각하다 보면 알아서 가슴 설레었고, 어느 순간 난 이미 그 선택지를 선택한 이후였다.
하나 이번 선택만큼은 나에겐 꽤나 '의외성'이 강했다. 평소의 나라면 두렵고 생경해서 선택지로는 두지도 않았을 일. 두려움이 항상 압도하던 설렘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흥미진진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 이 의외성 짙은 선택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도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순간.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는 불안과 설렘이 거듭 다툼을 반복하며 자꾸만 나를 뒤흔들지만, 매 전투의 승자는 설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