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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과 천조국 여행을 떠납니다

by Life teller Andy

설렘 VS두려움

여행을 향한 내적 갈등은

두 녀석의 싸움으로 시작한다.



아직 미국에 발을 붙이지도 않았다. 이번 미국 여행은 나에게 꽤 다이내믹한 생동력을 안겨주고 있다. 인생의 방황기를 잠시 만끽하고 오겠노라며 2주간의 미국 여행 결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마다, 그들의 맨 처음 반응은 모두 부러움이었다. 그 부러움을 무색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빚지고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항상 문장의 끄트머리에 둔다. 숨기기는 싫고 그렇다고 앞세워 말하기에는 당당하거나 씩씩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그래 나를 한심하게 보겠지, 설 명절에 집에 내려가지는 못할 망정 흥청망청 돈이나 쓰고, 그것도 빚을 내서 여행을 간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먼!'


대놓고 말은 하지 않더라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분위기가 그리 얘기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정말 부러워요. 빚내서라도 다녀오세요. 저는 이제 그러지도 못해요."

"와 되게 비싼 방황을 하시네요 ㅋㅋㅋ. 너무 부러워요 ㅜㅜ"

"저라도 빚내서 갈 거 같은데요ㅋㅋ. 다녀오면 아마 똥줄 타서 열심히 사실 거예요."


어라?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하나같이 그저 겉으로, 말로만 응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얘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었으며 응원해 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국 여행 결심을 알리는 순간은 필시 그 의도가 분명했는데, 바로 두려움이 설렘을 이기고 있는 형세일 때였다. 누군가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결국엔 두려움이 영영 설렘을 삼킬까 초조해했다. 누군가에게 시원하게 얘기를 한 직후에는 비관적인 예측이 난무하며 두려움이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나의 행동에 진심 어린 용기를 느끼고 대견해해 주는 이들 덕에 결국엔 설렘이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한다. 설렘과 두려움은 마치 바이러스의 항원, 항체처럼 나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흥분 상태로 만들어 주기를 반복했다. 내가 살아갈 새로운 생동력이 나도 모르게 내 몸을 가득 채워가는 순간들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이놈의 천조국 일정



모든 여행은 좋든 싫든 일정 부분 계획을 짜야한다. 비행 편 예매와 숙소 예약부터 어떤 것을 먹을지 등등. 계획을 촘촘히 세울 것이냐, 아니면 러프하게 세워두고 빈 공간은 운명에 맡길 것이냐 하는 것은 여행자의 취사선택이다. 나는 보통 후자에 가까운 성향으로, 후줄근한 계획이 편했다. 또한 일부러 비워 둔 시간에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무언 가를 여행 중에 채워두는 일에 흥미를 느껴왔다. 하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달랐다. 일단 너무도 촉박하게 여행을 결심했다. 그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미국이라는 커다란 땅덩어리를 여행한다는 일은 도무지 막연하게라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미국, 이 천조국으로의 여행은 다체롭고 다양하게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를 들쑤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결정부터 비행기표 예매, 계획 짤 준비하기, 여태까지 내가 해온 일체들을 순수하게 글자로만 바라본다면 여전히 준비할 것들은 산더미고 여행 가서도 닥쳐야 할 것들이 산더미일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만 터져 나온다.



인생 돌발상황은

대부분은 내 탓이 아닐 때가 많다



이번 여행에는 나를 포함해 총 세 명이 가기로 되어 있던 상황. 안타깝게도 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집 안에 일이 생겼다. 여행 출발일까지 남은 시간 2주. 친구가 자신의 사정으로 여행을 함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유난히 이때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 이유는, 바로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구심점은 어디까지나 여행을 동행하지 못하는 A에게 있다. A가 결정했고 멤버들을 모으다 보니 나와 나머지 친구 B는 일면식도 없는 상황. 며칠 전 생성 된 메신저 단체방은 있었으나, 다들 아시다시피 무척 익숙한 어색함이 가득했다. 이 상황은 나뿐만이 아니라 B 또한 인지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미친 듯이 나뒹굴며 웃었다. 다 웃고 나니 그 재서야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아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근데, 정말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며 국면이 다시 뒤집어진다.

나머지 한 친구, 엄밀히 따지면 A의 친구인 B도 집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긴 것. 그래서 두 친구 모두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 아직 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 시간차 공격에 나는 졸지에 여행미아가 될 위기였다.


"이젠 완전 그로기다. 얼른 나도 취소하자. 차라리 잘 됐어. 여행 일정도 감이 안 오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단 둘이? 2주 동안,,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생각한 것보다 돈도 더 많이 나올 거 같고, 이참에 자연스럽게 여행을 취소해서 손실을 최소화하는 게 나을 거 같다. 취소하면 수수료가 얼마나 들지? 음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네. 그래 이제 버튼을 클릭해 볼까."


말로 되뇌는 것과 달리 내 손가락은 결제 취소 버튼으로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와서 여행을 취소한다고 생각하니, 나의 도전을 뜻깊게 바라봐준 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상황이 내 의지가 아니니 상황상 어쩔 수 없지 않냐라며 핑계를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는 내 꼴이 못마땅했다.



그래, 그냥 가보자. 까짓것.


호기로워 보이는 한 문장을 그 어떤 때보다도 침울하게 내뱉어 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라도 내뱉지 않으면 엄두가 나지 않을 듯했다. 남들은 스무 살 초반에 한 번씩들 가보는 배낭여행, 오지 탐험, 유럽 등 장거리 여행을 이제 서른 좀 넘어서 가는 게 무슨 대수일까. 나조차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수없이 되뇌는데, 고작 빚 몇 백 내서 미국 여행, 그것도 렌트를 해서 가는 호화에 가까울 수도 있는 여행을 결심하면서 이리도 지질하게 갈팡질팡 할 일인가. 나도 안다. 그러니 너무 한심하게 여기지만은 않아 주길 바란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서른 중반의 나에겐 도전이고 생경한 경험이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순간순간의 변수들을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기와 좌절, 무기력에 가까워지기보다는, 내 근례의 나태함으로 되돌아가려는 욕구를 얼른 잠재우고 또다시 위협으로부터 가까워지고 있는 이 순간을 잘 견뎌내는 내가 대견스럽기까지도 하다.

그래서 그냥 가보려고 한다. 두 친구 모두 가기 어려울 수 있으니, 혼자서 맘껏 짜봐야지. 분명히 이런 변수가 나를 재밌게 만들어 줄 거야. 만일 B가 갈 수 있게 되어도 뭐, 어색하지 않게 알아가면 되고, 아 맞다! 계획을 어떻게 짜야하지? 여전히 막막한데.. 아냐 어떻게든 되겠지. 해보자. 까짓것. 그래 그냥 가보자.



다행스럽게도 A의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어 가면서 여행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B는 이번 여행을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셋 모두 같이 같으면 좋으련만, 대신 둘이서 나머지 한몫까지 열심히 놀아주기로 했다. 가늠조차 안 되던 여행 계획은 챗gpt와 각종 후기들을 살펴보면서, 여전히 허술하고 만족스럽지 못해 불편하지만 조금씩 영점을 맞춰갔다. 하나 둘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사항들이 나름의 호전을 보이며, 찢겨있던 미국 여행 청사진 조각들을 하나둘씩 이어 붙이다 보니, 이제 여행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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