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고 별로 써본 적도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진성 흙수저다.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 흙수저로는 나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국제회의통역사, 영어 아나운서, 기업 대표.
흙수저와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이다.
내 영어 아나운싱, 통역 퍼포먼스를 본 고객사는 해외 체류 경험이 당연한 듯 늘 묻는다.
"어디서 살다 오셨어요?"
외국인 버전으로는 "Where did you learn English?"가 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I taught myself."
해외 체류 경험은 고사하고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사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 학원, 인강이 무엇인가. 학교에서 교과서 대신 사용하던 문제집 살 돈도 없어 부모님께 사정사정해서 받아야 했다. 과외는 수능 끝나고 처음 '해 봤다(가르쳐봤다)'.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터득했다.
문제집 살 돈이 없다 보니 문제집을 한 번 사면 세 번씩 풀었다.
노트에 옮겨 풀고, 두 번째로 풀 때는 그나마 노트에 푼 걸 답만 문제집에 살살 샤프로 작성하고, 지우개로 박박 지운다음에 마지막으로 문제집에 대고 직접 풀었다.
이런 스토리는 끝도 없이 많다.
그런 내가 지금 원하던 직업을 가지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 일단 '하고 보는' 데 있다.
제목에서 밝혔듯 나는 전형적인 대문자 INTJ다. 완벽주의자 성향도 강하다. 아마 N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무슨 일을 하나 하는데도 어찌나 별 생각이 많이 드는지. 하지만 다행히 나는 고민하느라 시도조차 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없는 살림에 하고 싶은 건 많고, 잃을 게 없어(?) 주저하지 않는 버릇이 자연스레 든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하고 본다. 어차피 안 하면 내 손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으니까. 상황도 달라지지 않으니까. 해서 안 되더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안 되는 것보다는 낫다 싶다.
사실 못 하는 이유를 대려면 누구나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각종 이유를 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안전지대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되려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외부 환경'이 되어버린다. 패턴은 반복된다. 무력감은 또 다른 무력감을 낳는다. 반복된 무력감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처음 통번역대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환학생 한 번 가본 적 없는 내가 10년 이상의 해외 경험을 가진 사람이 수두룩 빽빽한 이 업계에 발을 들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외대 시절 이미 충분히 깨달아 알고 있었다. 불가능. 아마 교수님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찌어찌 통번역 대학원에 들어가더라도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러 그저 그런 졸업생이 될 거라고.
하지만 나는 이 직업이 가지고 싶었다.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했다. 학원을 수강할 돈은커녕 기본적인 생활비도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야 했지만 과외,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교수님들께 청강을 부탁드렸다. 무료로 할 수 있는 교내 공부 스터디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그냥 해'의 초반은 처참하다. 정말 맨땅에 헤딩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설프고 미숙하고 서투르다.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 하지만 괜찮다. 눈앞의 실패가 내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INTJ로서 나는 눈앞의 결과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개선할 방법을 찾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또 그에 대한 결괏값을 분석한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해 봤는데도 계속 처참할 때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이 방법은 안 통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미련 없이 방향을 틀면 그만이다.
이 같은 행동 양식이 반복되면 어느새 나는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상상도 못 한 지점에 서 있곤 한다. 일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린다.
주변에 진로, 학업, 연애까지 고민을 안고 사는 지인들에게 나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일단 뭐든지 해보라고. 안타깝게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그 용기, 별 것 없다. 잠시 생각의 버튼을 멈추고 그냥 하면 된다. 똑같이 살면서 다른 결과를 기다리는 건 정신 나간 짓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때로는 그냥 한 번 해보시길.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Albert Einstein
김세연 한영 MC·아나운서
국제회의 통역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용과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한영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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