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몸으로 자신이 되고 싶어

아픈 몸의 시간

by 냐하

2008년, 최초의 증상이 나타난다. 팔이 올라가지 않아 단체기합을 받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을 오전 수업 내내 눈을 감은 채 무릎 꿇고 손을 들도록 시켰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긴 자나 회초리를 들고 팔과 등을 때렸다. 그런 기합은 1학기와 2학기에 한 번씩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학기 때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팔을 들고 있으면, 비록 시간이 지날수록 땀이 흐르고 떨리긴 했지만, 두 대 이상은 맞지 않았다. 2학기는 달랐다. 팔을 들 수 없었다. 팔을 꼿꼿하게 들고 두 손을 잡으면 각각의 손이 서로를 지탱하여 간신히 들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내가 꾀를 부린다고 여겼고 당시 나는 다섯 대 이상을 맞았다.

2010년, 사나운 동급생이 나를 가리키며 웃는다. 선생님에게 대들고 담배를 피는 아이였다. 체육시간마다 그 애는 친구들과 나를 가리키며 킥킥 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애써 모른 척했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교실로 돌아가는 나를 그 무리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야, 너 왜 그렇게 걸어? 허리를 뒤로 젖히고 흔들면서 이상하게 걷잖아. 이렇게, 이렇게.” 내 걸음을 따라하는 애들에게 나는 대답했다. “나 그렇게 안 걷는데? 너희랑 똑같이 걷는데.” 나를 둘러싼 무리에서 폭소가 터졌다.

2012년, 희귀난치병을 진단 받는다. 그때까지 나의 중학교 생활 내내 따라다니는 질문과 눈초리를 나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교탁에 앉아 말했다. “원래 저렇게 안 걸었어. 똑같이 걸었어.” 지금의 나는 되묻고 싶다. 누구와 똑같이 걸었다는 거야?

2016년, 장애인 등록을 신청한다. 4년 동안 가족과 의사는 장애인 등록을 받도록 권유했고 나는 계속 계속 거절했다. 아니니까. 나는 장애인 같은 게 아니니까. 두려웠다. 친구들끼리 욕할 때 숱하게 나오던 단어들. 걔 진짜 병신 같아, 장애인 아냐? 애자 같은 년. 그 욕설을 내가 뱉고 들었는데, 그게 내가 된다고? 되고 싶겠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을 오랜만에 만났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일 년 정도가 될 무렵이었다. 이 주일에 한 번 정신과를 가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며 산책하던 이웃이 비스듬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안부를 묻지 않고 그녀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눈썹을 찡그리고,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힘들지? 이렇게 되어서 어떡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깨달았다. 장애인이 되는 건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되어 있었으니까.

*

종종 누군가 내게 묻는다. 언제부터 아팠어? 이걸 다르게 말하면 언제부터 그렇게 걸었어? 언제부터 장애인이었어? 언제부터 불구였어? 가 될 것이다. 질문에 대답한다면 위의 시기 중 언제라고 해야 할까? 아직도 모르겠다. 위의 시기로 부족하다면 더 나열할 수 있다.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이 내게 똑바로 걸으라고 했을 때? 아니면 처음으로 이 몸뚱아리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살을 시도할 때? 숱한 시도 끝에 자살하기엔 용기도 체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확한 답은 없을 것이다. 불구의 시간은 연속적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각각의 사건은 무엇도 바꾸지 못했다.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원인이나 목적 없이 발생한 일들이고, 그것은 희귀난치병도 마찬가지다. 질병에 걸린 이는 운이 나쁜 사람이 아니고, 삶은 운의 수치로 결정되는 싸움터가 아니다. 그렇기에 삶과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수식하는 언어는 무한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모순이 삶에서는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계속해서 몸이다. 살아온 모든 시간이 켜켜이 쌓여 주름이 된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체화하여 고개가 움츠려든다. 계속 계속 척추가 비틀리다 보면 언젠가 지문처럼 둥글어질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고, 흉터와 착색으로 얼룩진 몸은 지치지 않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결국 나밖에 될 수 없다고. 나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마치 내가 선택하기 이전부터 네가 장애인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몸은 정해져 있다. 앞으로 긴 시간 동안 내 몸이 변하더라도 건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더 이상해지거나 불편해지겠지. 가능하다면 이 상태라도 계속 유지하고 싶다. 걷는 모습만 보고도 누군가 나를 알아보는 건 여전히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이보다 나빠지고 싶지 않다. 솔직해지자면, 어떤 형태로든 변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내 몸에게 바라는 지금 내 마음은 그렇다. 누구에게라도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전부도 아니다. 종종 통증과 좌절로 자신을 압도 시킬지언정, 몸은 진실의 발화이자 자신의 영원한 일부이다.

*

언제부터 아팠냐는 질문에 가장 근접한 대답이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된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몸이 되리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다만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정상적으로 걸었고, 그들의 걸음과 몸짓을 나도 똑같이 수행 중이라고, 성인이 될 무렵까지 착각했던 것이라고 말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정확하지 않다. 근사치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좀 더 과감해도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아픈 몸은 시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의 변화가 곧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8년, 2010년, 2012년 등 각각의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저 시기의 나는 달라지는 몸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 골방으로 들어갔다. 아파트에 사는 것은 투신자살을 허락하는 듯한 의미 같았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에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 나를 적확한 감각은 매순간 몸을 가리키는 언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픈 몸은 아프도록 정해진 몸이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찰나든 한순간이든 몸은 고통의 장소인 것은 변함없다. 정상이거나 건강하다는 것은 운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픈 몸에게도 건강한 몸이 희망이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몸이다. 아픈 몸이 건강한 몸에게 다른 몸인 것과 같다.

지금까지의 나는 다른 몸을 될 수 없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어야 하는 몸과 닿아야 하는 몸은 다르다. 나에게는 다른 몸이 필요하다. 내 몸의 의미를 만들어 줄 다른 몸. 계단을 오를 수 없는 몸이 아닌 친구의 팔을 잡을 몸이 되도록. 넘어지는 몸이 아닌 갑작스러운 타인의 접촉과 돌봄을 주고받는 몸이 되도록. 내 걸음을 따라하며 왜 그렇게 걷는지 질문 받는 몸으로 끝나지 않도록 함께할 몸이 필요하다. 숱한 기억들은 더 이상 현관문 앞에서 나를 막아서지 않는다. 지금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몸으로 재구성 되었다. 지금의 몸으로 지금의 당신의 몸에 닿고 싶다. 연결된 몸으로 의미를 만들고 싶으니까.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의미가 계속해서 흩어지고 모이며 몸이 의미를 받아들이고 떠나보내기를 반복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 모든 순간에서

나의 몸은 당신을 위해 필요할까?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변하지 않은 몸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연결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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