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게 있어서 그래요
최근 한 달, 나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만든 웹진의 부흥, 개인 브랜딩 성공으로 글쓰기 지속성 확보 등등. 아무튼 유명해진다면 앞으로 여러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죄다 실패했고 지금 나는 조금도 유명하지 않다.
유명세를 노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면서,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것 중 한 가지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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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가 같은 감정을 같은 강도로 느끼거나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기쁨보다는 슬픔과 불안을 강하게 느낀다. 반대로 우울함 보다는 즐거움을 더욱 오래 기억한다. 그중 내가 가장 오랫동안 깊게 안고 있는 감정은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소설로 쓰지도 못할 만큼 이 감정들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처음 수치심과 죄책감을 강하게 느꼈던 때를 기억한다. 희귀난치병이 발병하고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입원과 통원치료에 집중하다가 심한 우울증에 걸린 탓이었다. 어떤 치료를 해도 나아지진 않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 기형적으로 변한 몸을 빤히 보는 행인들, 예전에는 건강했는데 라고 말하는 동급생 들. 처음으로 내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감각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칼날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이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준 상처가 하나둘 떠올랐다. 마음에 안 든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포장해 던진 폭언, 날서고 거센 말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더 어린 나, 누군가를 업신여기면 내가 더 나은 위치를 선점한 것이라고 믿었던 날이 차례로 떠올랐다. 십대 후반의 나는 매일 내가 했던 말을 곱씹고 토했다. 그 모든 행동이 자해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 것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스스로를 벌 주면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해가 지속되자 공황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또 내가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현관 밖을 나설 수 없었다. 간신히 만나는 타인들에게는 텅 비어 있더라도 좋은 말만 하고 좋은 인상만 주고 싶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다시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그런 날이몀 잠들지 못하고 환청을 들었다. 그땐 친구가 나를 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집에서도 늘 좋은 말만 했다. 핸드폰 해킹을 염려하여 바르고 좋은 말들만 메모장에 적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졌지만 수치심은 떨어지지 않았다. 몸에 들러붙은 타인의 시선 위에 이미 틀린 인간이라는 나의 인식까지 겹쳐졌다. 그것은 정신과에 말할 수 없었다. 이미 틀린 인간이라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내가 상처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어도 끝내 하지 않았다. 내 몸을 보여주는 것도 그때의 내가 한 말을 다시 직면하는 것도 두려웠다. 틀린 인간이 잘못된 선택만 계속했다.
직면할 수 없다면 잊자. 다행히 그 뒤로는 인간관계가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나를 드러내도 거절 당하지 않았다. 재밌는 순간과 일화가 쌓였다. 사람들을 만나는 건 좋은 일이구나! 그런 생각도 하게 됐다. 인터넷이든 오프라인이든 나름 순탄하게 흘러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친한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들을 통해 나는 장애를 대하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어떤 몸짓이 우리를 연결 시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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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는 친했던 친구에게 작정하고 상처를 줬다. 그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말다툼이 계속되고, 내가 모욕 당했다고 느껴지자 되갚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죄책감과 수치심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연락해서 사과했지만 답장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억 속 인물들이 유명해진 나를 공론화할 것 같았다. 처음엔 걱정과 불안이 앞섰지만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사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공론화를 통한 재회를 기다렸고, 그것을 위한 유명세를 노렸지만, 지금은 그저 이런 에세이를 쓰고 있다. 고백도 뭣도 아닌 글을 그저 쓰면서 여전히 죄책감, 수치심에 붙들려 있다.
이 정도로 읽었으면 누군가는 “그냥 네가 편해지고 싶은 거 아니야?” 라고 할 수도 있다. 맞다. 아닐 리 없다. 편안하게 미래를 기다리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것을 기록한 메모장을 이젠 지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최근 친구에게 상처를 준 이후로 나는 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조금씩 포기하고 있다. 그때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은, 친구의 가치관을 폄하하고, 친구의 안 좋은 기억을 되살리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했으니까 불편하게 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나는 그런 말을 하고 마음 편히 살긴 어려운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다.
내가 그때 상처 준 애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이유는 나나 그들이 편안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사과로 누군가의 마음이 다림질을 한 것처럼 반듯해질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함께 재생해 보고 싶다. 우리가 그때 다른 말을 했다면 지금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사이가 회복되지 않더라도, 그 순간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상처에 뿌리를 두고 다른 마음이 자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니까 해 보고 싶다. 다시 한 번만 우리가 서로에게 날선 말을 주고 받은 때로 돌아가서 다른 말을 해 보고 싶다. 고작 그것만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으니까. 상처 받은 순간 위에 그 순간의 말을 수정하는 순간을 겹치는 것, 과거를 다른 장면을 만드는 것은 지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여전히 나는 재회하고 싶다.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비롯된 재생을 믿고 싶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일이고. 재회하기 전까지 나는 혼자일 텐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 중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상처 준 말을 잊지 않고, 그 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는 나일 테지만, 나를 구성하는 문장을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다. 나는 구원을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이 모든 질척한 고통을 가진 괴로운 사람으로서, 더 이상 같은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