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성 너머의 글쓰기
2025년 창비 9월호
2025년 창비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심사평의 일부이다. 아마도 올해 투고 된 소설 중 에세이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는 아마도 내 소설도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올해 내가 쓴 소설의 절반은 불구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글이었다. 동인 웹진에 올린 “토르소 수기”도 그렇게 쓰였다. 이 글들을 거칠게 나누자면 당사자의 발화로 쓰인 글로 분류될 것이다. 아직 주류 사회에 가시화 되지 않은 소수자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누군가는 그 필요성을 감지하고 읽는다. 적어도 내게는 불구의 당사자성을 가진 것이 글을 쓰는 데 요긴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를 언제나 말문이 막히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왜 소설을 써?”
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나의 소설은 무엇일까? 불구의 개인적 경험을 적은 것이기도 하고, 에세이로 보일 만큼 서사가 없기도 하고… 내 소설을 설명할 언어 또한 많을 것이다. 내가 나의 소설을 설명한다면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던 장애 여성의 경험을 언어로 붙드는 소설” 이라고 할 것이다.
너무 공허한 설명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내 소설이 아직 주류 문학에 등장하지 않은 장애 여성 당사자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읽혀야 한다는 논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니까. 논리의 근거조차 될 수 없는 이유는 얄팍할 만큼 위태롭다. 만약 다른 장애 당사자가 소설을 쓰고 그의 글이 가시화 된다면 - 내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어진다. 가시화만이 목표라면 말이다.
가시화는 단순히 장애 당사자의 발화나 노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당사자라는 단어는 발화하는 인물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당사자니까, 나의 경험이고 내가 겪은 고통이니까 - 타자가 쉽게 개입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을 당사자라는 단어가 보장한다.
당사자는 개인이지만 발화하는 고통에는 집단적 경험이 포함된다. 내가 장애에 대해 말할 때 다른 불구의 경험까지 독자는 상상한다. 내가 “불구” 당사자이므로 나의 경험이 장애 집단의 경험으로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구라는 단어조차 모든 장애를 대변하지 않는다. 불구는 사전적 의미로 몸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불구는 발달장애와 정신장애를 배제하는 단어인 것이다. (* 내가 불구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 단어에 씌인 오명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경험이 장애인들이 겪는 경험의 보편에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공감할 수도 있다. 어쨌든 불구의 몸은 고립되고 외로우니까 다른 불구의 몸을 읽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반가운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르다. 아무도 모르는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테지만, 그와 깊은 관계를 맺거나 유희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히 연결되진 않는다.
문학은 유희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의 위기에 대해 설파하는 이들에게 깊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은 독서가 내게 주는 즐거움이 문학을 위협하는 매체에 비해 현저히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소설은 즐거움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내 소설은 나라는 당사자가 타자에게 내 경험을 읽으라는 이유에서 쓰였다.
나는 당사자 문학이라는 말을 믿었다. 이 문학은 오로지 두 개의 분류만 따른다. 당사자인 나와 당사자가 아닌 타자. 당사자인 작가는 나 이외엔 존재해서는 안 되고, 내가 먼저 선취한 다음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나에게 당사자는 나뿐이고 나의 상처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비장애인인 사람들이었다. 다른 당사자들을 모르니까 가능한 발상이었다.
내 소설과 에세이는 나에 대한 글이고 나의 경험을 주로 다룬다. 에세이를 일곱 편 정도 쓰고 소설 원고도 여섯 편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에세이와 소설의 차이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나의 독자는 장애에 대해 모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써왔다. 내 상처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고 그만큼 나를 상처준 세상이 미웠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것. 나만 아는 것. 나의 고유하고 거대하고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장애와 질병.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희귀난치병일 뿐이지 전세계적으로는 같은 질병을 앓는 환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도 당사자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글을 쓰고 가시화 된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가 줄어든다. 문제는 여기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쓸 글이 소설이길 바란다. 에세이여도 좋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쓰고 싶다.
에세이와 소설은 분명히 다르다. 내가 느끼는 두 장르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발화자의 삶을 발화자가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글을 전개하는 것이 에세이, 상상으로 그려진 허구에서 드러난 낯선 것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소설이다. 이는 내가 당사자라는 단어에 기댄다면, ”나“의 발화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연장이다.
소설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히 어떤 부분은 나에게서 시작되었어도, 인물이 만들어지고 나아가는 동안 그것은 모르는 것이 된다. 그것이 소설 쓰기의 묘미라고들 한다. 나도 그 맛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시 내가 쓴 글을 읽을 때 나는 나를 만난다. 내가 글 속에 있고 아직도 나는 나를 벗아나지 못했다.
당사자 문학은 당사자와 타자가 나누는 문학이 아니다. 조금 더 위험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건 없다고 느낀다. 누구나 내가 될 수 있고 나도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몸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고 글을 통해서 잠시 건너가고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에세이, 시, 평론 무엇을 통하든 가능하다. 나는 나에게 갇히고 싶지 않다. 내 고통이 중요하다고 중얼거리는 것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얼리고 굳힌 얼은 같은 고통은 그 너머가 투명하게 보인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에 냉동 되어 있더라도 움직여야 한다. 자신의 몸에서 내뿜는 사소한 온기가 차츰 얼음을 녹일 수 있도록. 우리를 얼린 고통을 녹여 바다가 되어 우리가 그 위에서 유영할 수 있도록.
나의 존재가 보여지지 않더라도 나는 그런 기쁨을 주는 소설을 쓰고 싶다. 에세이를 통해 나의 고통과 경험을 기록할 수 있다면, 소설은 그 너머의 모르는 것을 경유해 타인에게 넘어가는 글이다. 내가 모르는 존재, 미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존재를 쓰거나 읽우며 알게 된다. 그 과정이 내게 준 기쁨은 삶의 고통을 잊게 만들고 날카로운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언젠가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 기쁨을 느낀다면 더욱 좋겠지. 그러나 적어도 지금 내게 충만한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이나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부수고 활자로 이어 타자가 아닌 당신에게 건네고 나누고 싶다. 그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