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개전 초기 이래,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국군을 격파하며 남진하였습니다. 빠르게 투입된 미군 "스미스 대대"마저도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에 의해 격퇴되었고, 이제 아군의 목표는 '지연작전'의 성공이 되었습니다.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 미군자산과 부대들이 충북 영동에 새로이 전개하기 위해선, 적어도 대전의 미 24사단이 2일 동안 버텨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한 북한군은 금산과 옥천 방향으로 찌르듯 들어오면서, 서북쪽과 서쪽에서 대전을 공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전 갑천 인근에 방어선을 편 미군은, 최소 20일까지는 북한군을 대전에 묶어두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듯 계속해서 북한군 전차의 시내 진입을 거부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북한군도 시간을 끌면 안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7월 19일 엄청난 공격준비사격을 개시한 뒤 대전으로의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대전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7월 19일 정오가 지나자, 오전 내내 적극적인 정찰활동을 벌이던 인민군이 갑천을 넘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 이어졌고,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 가장 클라이막스였습니다. 북한군 전차는 유성에서 공격을 시작, 월평동을 거쳐 대전의 중심부를 타격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군에게 치명적인 전선붕괴를 낳았습니다.
20일까지 버텨내야만 하는 미군은, 북한군의 공세 첫날부터 힘겨운 싸움을 지속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끝끝내 20일까지 대전에서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대전 전투는 미1기병사단이 충북 영동에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귀중한 방어전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