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중반이 넘어가자, 프랑스군은 베르됭 등지에서의 피해가 누적되면서 점차 약화되어갔습니다. 특히 이전해에 벌어졌던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군을 막아내긴 했지만,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던 프랑스에겐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를 돕기 위해 달려온 영국군은, 프랑스군에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적/실질적 여유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일군의 추가 공세 역량을 소모시켜 전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습니다.
그 지역으로는 벨기에 지역의 파스샹달이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어마어마한 포격의 여파로 진창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고, 이는 영국군에게 큰 방해요소가 될 것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다른 전투들과 마찬가지로, "작전목표"가 바로 상대국의 병력을 소모시킨다는 개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전투입니다.
1917년 7월 31일, 대규모 공격준비사격을 동반한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만만했던 영국군의 바램과는 달리, 약 한달간 진행되었던 이 1차 파스샹달 전투는 영국군에게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힘과 동시에 작전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서 수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으면서 영국군이 얻은 결과는, 독일군 병력을 이곳에 묶어두고 소모시켜, 다른 곳에서 벌어질수도 있었던 프랑스군의 결전을 막아주었다는 것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