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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스토리 Mar 07. 2023

의미없던 날들도, 나에겐 다 준비였음을(1)

무너지고 실패했던 일들도  나에겐 다 경험이었음을.

  <더 파이팅> 이라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있다. 주변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왕따를 당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복싱을 접하게되었는데, 본인도 모르던 재능을 발견하여 점차 복싱선수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다룬 만화다. 여느 성장만화가 다 그렇듯이, 주인공은 여러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리면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면서 그 과정을 토대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어려움들은 본래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일수도 있었고, 혹은 새로이 생기는 어려움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주인공은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도 그러한 어려움들이 없진 않았을 것이고, 그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분명 우리 모두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텐데, 과연 그것으로부터 내가 어떠한 성장을 하는지, 아니 성장이란것을 하기는 하는지 궁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도 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내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 오늘은 조금 푸념처럼 늘어놓는 방식으로나마 나의 어려움, 그리고 성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난번에 말했던것처럼, 나는 2014년에 육군 기갑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내가 배치된 부대는 사고로 유명한 OO사단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인것은 같이 배치받은 장교 동기생이 3명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나의 군생활을 소대장으로 시작한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장점은 그나마 발표와 말솜씨가 있다는 점이어서, 사단 경연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눈치가 없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는 단점도 있었다.) 초등학생때부터 <기갑장교>라는 직업군인의 꿈을 가진 나로서는, 이러한 경연대회에서의 우승과도 같은 일들을 나의 군생활에 대한 동기로 삼을 수 있었다. 


  육군 3사관학교 출신인 나는 6년의 의무복무기간이 있었는데, 평생 직업군인의 길을 가는 "장기복무"에 선발되기 전 "복무연장"을 신청할 수 있었다. 이 복무연장은 나의 의무복무 기간을 6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것으로, 쉽게 말해 계약직 기간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결정이었다. 어차피 평생 직업군인의 꿈을 꿔왔고, 야전에서의 적응도 잘 해나가던 나로서는 아무런 고민없이 복무연장을 신청했고, 예상대로 복무연장에 선발되었다. 이와 동시에 다른 동기들을 제치고 소대장에서 대대의 작전장교로 영전(?)을 하게 되었고 나의 군생활도 탄탄대로로 나가던 것 같았다. 바로 그 때로 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 나는 이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2015년, 장기복무 선발에 선발되지 못한 나는, 침울한 상태에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건 바로 내 "2015년 체력검정" 결과가 내 인사기록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잘못에 대한 모든 1차적 책임은 개인의 인사기록 관리를 못한 나에게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결국 나의 체력검정 기록은 "미실시"처리였었고, 물론 체력검정 기록이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장기선발이 되었을지는 모를일지만, 어찌되었던 내가 장기복무에 선발되지 못한 것은 이 이유가 분명했다. 


  뭔가 착오가 있다고 판단한 나는 주변의 조언대로 사단 인사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력검정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유지, 반영하는 주무부서인 인사처에는 내가 제출한 체력검정지가 있을 것이라는 아주 엷은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사단 인사처의 모 소령은 자신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시선은 자신의 모니터에 고정한채, 나를 쳐다도 보지 않으면서 차갑게 "너 구제안되니까 집에나 가." 라는 말로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대변했다. 후에 알고보니, 인사계통에서의 사고를 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질책을 받는것이 본인으로서는 두려웠던 것일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주변 동료들과 전우들, 선후배들과 지휘관의 도움이 있었고, 나아가 나와 같이 체력검정을 본 것을 증명해주겠다는 간부들의 서명운동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력검정은 결국 반영되지 못하였고, 나는 그렇게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넣어봤자 선발되지 못하는 장기복무, 그렇다고 빨리 전역하기엔 이미 복무연장을 넣어버려 약 10년의 군생활을 강제로 하게 되어버린 상황으로 순식간에 급변하게 되고 만것이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아무렇지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정말이지 죽고싶다는 마음, 그리고 세상이 끝났다는 생각에 그냥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는 시간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대대 작전장교로 일하던 그 시기는, 매일을 새벽 6시에 출근하여 밤 10시 넘어서 퇴근하는 시기여서 더욱더 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나의 유일한 낙은 퇴근한 뒤 2인 1실로 함께 살던 룸메이트 동기와 술 한잔을 기울이는 것 뿐이었다. 


  이후, 나는 부대에서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쟁사에 집중했다. 내가 원래부터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던 그 분야, 그러나 정작 군대에서는 제대로 활용되거나 통용되고 있지 못한 "전쟁사"에 빠지게되었다. 그것은 나 나름대로의 탈출구 였으며, 이따금씩 술이 취해 죽고싶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상황속에서도 나의 삶을 지탱해주던 버팀목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상은 간단했다. 새벽 6시 출근하여 밤 10시까지 업무를 보고, 퇴근한 뒤에는 동기와 술을 먹었다. 동기가 새벽 1시쯤 자러가면,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인터넷으로 전쟁사를 뒤져보았다.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궁금한대로, 심지어 외국 사이트까지 찾아가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면서 "읽었다". 그건 마치 연구원이나 학자의 연구가 아니라 그냥 무작정 읽는다는 행위에 가까웠음에도,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전쟁사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나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도피의식 덕분인지 나름대로 머릿속에 쏙쏙 잘 들어오는 편이었다. 




그렇게, 그 부대에서의 2년을 그렇게 더 보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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