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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북한의 핵위기, 그리고 협상일지

핵무기를 둘러싼 치열한 협상전쟁

by 김휘찬

들어가면서...

북한의 핵개발은 그 기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북한의 여러 가지 동인이 적층 되어 발생된 복합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진행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한/미 양국 또한 1차 북핵위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북한과의 지속적인 협상과 대결국면을 순환하고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이를 억지하고 비대칭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과 우리의 핵협상 과정은 어떠했는가?


북한과의 핵협상 과정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는 북한이 자신만의 다양한 협상전략과 전술, 그리고 일관된 국가전략적 목표를 바탕으로 지속해 온 것이 가장 큰 데, 이러한 핵협상의 과정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다. 북한과의 핵협상과 그 실패의 개괄적인 순서는 다음 그림과 같다. (서울경제신문 기사에서 발췌)

image01.png 박우인ㆍ김정욱, (2020년 7월 30일), “핵 포기 않는 北... 유일한 길은 경제제재” 서울경제신문

1. 북미 간 최초 대화의 시작

탈냉전의 기운이 무르익던 1989년, 서방세계의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핵시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규모 원자로 시설들과, 북한의 지하에 매장된 천연 우라늄의 존재는 당시 국제사회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한의 여러 원자로 시설들이 전력을 생산/공급하는 송전망과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징조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미 간의 대화가 촉발되며, 핵무기 개발과 핵위기를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북미 간 최초의 직접적인 대화는 1992년으로, 한국정부는 1976년 이래로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한다는 것을 발표하였고, 이는 (아버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즉, 북한이 협정에 조인한다면, 한미양국은 그 당해연도의 팀 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할 것이라는 협상카드를 활용함으로써, 북한이 원하는 안전보장의 기초적이고 명시적인 천 단추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행조건의 물밑협상 아래, 북한은 그렇게나 고대하던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첫 번째의 협상으로 인해, 북한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거두었다. 첫째로 그동안 그렇게도 수없이 주장해 오던 미국의 한반도 배치 전술핵을 철수시켰다. 둘째, 북침을 위한 핵공격 전쟁연습이라고 스스로가 수없이 비방해 오던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 셋째,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에 대한 한미 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억지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한미양국의 행동과 전략을 강제하는 이중성과를, '핵무기 개발'이라는 카드 단 하나로 달성한 것이다.


2. 제1차 북핵 위기

제1차 북핵위기는 1993년 북한이 NPT 탈퇴 설명을 발표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에 IAEA를 통해 북한의 핵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엔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국제사회는 북한의 협정준수와 그 이행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이듬해 IAEA를 실질적으로 탈퇴함으로써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를 선제적으로 타격한 이스라엘 공군의 작전에서 이름을 따온 이른바 '오시라크 옵션'이 미국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국의 지미 카터 前 대통령이 김일성을 방문하여 만나 협상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게 되었고, 1994년 김일성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북한내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던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으로 하여금 '체제 내부의 안정'을 1순위로 원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제네바 합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 제네바 합의로 인하여 북한은 핵시설 동결에 대한 대가로 1) 경수로 건설에 대한 각종 지원과 더불어 2) 대체 에너지로서 매년 50만 톤의 중유를 제공받는 것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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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차 북핵위기

이러한 노력들에게 불구하고, 2002년에 제2차 북핵 위기가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발단은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켈리가 북한에 방문한 사건이었는데, 이때 귀국한 켈리 특사로부터 나온 발언으로부터 촉발되었다. 그 발언의 주요 내용은 바로 '북한이 다시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했다'라는 것이었고, 이를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 발표함으로써 국면은 다시 경색되었던 것이다. 북한 제1부 부장인 강석주의 발언이 문제였는데, 북한은 켈리 특사가 강석주의 말을 오해했다고 주장하면서 핵무기 개발 사실을 적극 부인하였다.


켈리 특사와 강석주 부부장의 대화의 녹취록은 현재 존재하는 바가 없으며, 관련 문헌 마다도 약간씩 내용의 차이가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통역의 과정에서 강석주가 ".. 보유할 자격이 있다"라고 가정적 상황에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발언을, "보유했다"라고 확정적 단어로 통역하였기에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즉, 강석주의 발언은 북한이 주권국가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핵무기와 그 이상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결국 이렇게 제2차 북핵위기는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 공화당 정부, 그리고 당시 미국 대통령인 '아들 부시' 대통령은, 전임자인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에서 맺은 제네바 합의 그 자체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들이 맞물리며 미국은 다시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나섬과 동시에, 네 제 바 합의의 내용조차 양측 모두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제2차 북핵위기가 촉발되고 말았다. 미국은 미국은 북미수교 및 경수로 공사, 중유지원 문제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핵 위기가 붉어지자 지지부진하던 중유공급마저도 전면 중단하였다. 이에 북한도 강대강으로 맞대응하며 각종 핵 시설의 봉인지를 제거하고 2003년엔 NPT탈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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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은 9.11 테러의 반작용으로 인하여 강경파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국내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다가, 북한의 입장에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의 위력을 실감하자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회담장에 등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북한이 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할 때에는 자신들이 불리할 때뿐이라는 결론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회담장에서도 강경한 핵위협 발언을 쏟아내며 국면을 경색시켰는데, 이는 향후 회담에서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시도로 보였으며, 이는 6자 회담에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3차까지 이어지는 6자 회담의 진행과정 속에서, 일반론적인 원칙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듯하였으나, 2004년 재선에 성공한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지속하였고, 결국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선언 및 6자 회담의 무기한 중단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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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9월, 4차 6자 회담이 진행되었고 9. 19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으나, 북한은 바로 그다음 날인 9월 20일, 먼저 경수로 건설이 제공되어야지만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합의내용을 번복하는 선언을 해버리고, 미국이 동결한 BDA(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 자산의 제재를 해제하면 6자 회담에 복귀한다는 전제조건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2006년 10월 9일,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상황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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