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개발의 배경은 무엇일까?
202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지속적인 중장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안보위협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모험적 행보에 한 • 미 양국은 한미연합훈련의 정상시행이나 기타 분야에서의 협력을 확인하면서 점차 강대강의 대결국면으로의 발전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렇듯 북한정권은 스스로의 강경책들이 주는 정치적, 외교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도발이나 핵무기 고도화를 통해 자신들의 핵무기를 더욱 고도화할것이며, 특히 소형화 / 경량화를 달성한 핵무기와 더불어서 ICBM등 투발수단의 실질적 타격능력을 갖추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실질적인 타격능력의 보유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정치적/외교적 협상카드로서 매우 효과적인 방책이 될 것이다.
북한은 이미 "실질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혹은 거의 보유한것과 마찬가지의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핵무기를 고도화하는 것에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6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감행하는 동안 <위협 - 협상 - 결렬>의 단계가 반복되었고, 대부분의 협상이 원론적인 일반론 부분에서는 합의를 이뤄낸적도 있었으나, 결국 최종단계의 각론 부분에서는 양측의 의견충돌로 항상 결렬되는 단계를 밟아왔다.
그러나 북한이 처음 핵개발을 마음먹은 것은, 그리고 실질적으로 각종 시설과 설비들을 들여오고, 국제사회의 많은 우려와 제재를 받은 것은 이미 한참전의 일이다. 그 기간동안 정말 많은 회담들이 있었고, 또 그만큼 정말 많은 군사적 대치상황과 일촉즉발의 각종 도발들도 있어왔다. 그렇다면 그 긴 기간동안의 협상도, 군사적 억지도 아무런 효용을 거두지 못한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압도적인 군사전략과 외교적 위신을 가진 한미양국은, 전 세계에서 고립된 불량국가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는가?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북한체제의 특수성, 나아가 그 특수서잉 가져오는 북한의 협상전략을 이해하고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이러한 북한과의 협상전, 그리고 협상전략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알아보도록 하고, 본 글에서는 먼저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북한의 실질적인 핵무기 개발은 김정일 정권부터지만,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의지를 천명하고 추진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 초기의 눈부신 성공을 뒤로하고, 전세가 역전되어 압록강 인근으로 쫓겨가던 와중의 김일성은 그 유명한 '별오리 작전회의'에서 '핵무기 방어부서'의 설치와 더불어서 갱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맥아더 장군의 주장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대한 공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북한의 핵개발의 태동은 김일성 체제에서부터, 그것도 굉장히 정권 초기의 공포심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북한은 핵개발을 위해 공산주의권의 대표국가인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알려져있다. 1960년대 소련으로부터 소형 원자로를 제공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북한은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여 핵개발에 대한 의지를 지속해갔다. 그 와중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진행경과를 관찰한 북한은, 유사시 소련의 핵우산 제공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1964년과 1974년에는 중국에 핵무기 개발에 대한 기술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함으로써 핵무기 개발이라는 그 속내를 드러냈다.
이 두 번의 요청은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모두 거절당하였으며, 결국 북한은 우방이라고 믿고있던 소련과 중국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신뢰를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1970년대 들어 대한민국에게 경제력을 추월당했다는 위기의식까지 겹쳐, 북한은 결국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1980년대에 들어서 소련의 체르넨코 서기장으로부터 50MW급의 흑연 감소 원자로를 제공받았으며,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 프로그램을 담당,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은 북한에 대한 원자력 지원조약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에게 NPT가입을 제의했으며 북한은 이를 수용함으로써 북한의 NPT가입이 이뤄지게 되었다.
즉, 소련은 북한에게 핵 기술과 인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산권의 맹주로서 북한의 독자적인 핵무장을 막는 일종의 "안전핀"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여진다. 당시 미국의 CIA에서 조차 북한의 핵시설의 용도에 대한 판단을 미루는 대신, 그 우려의 초점을 "북한이 왜 NPT에 가입하였으면서도, 안전조치협정의 체결을 미루는가"에 맞추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탈냉전기에 들어서면서 사태는 그야말로 급변한다. 공산권의 붕괴는 북한이 안정적으로 제공받은 국제적 / 이념적 안전판의 부재상태를 뜻했고, 이는 북한정권으로 하여금 커다른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소련은 붕괴하였고, 중국은 시장개방을 서두르며 실질적인 자본주의로의 경제전환을 준비하였다.
소련 붕괴 1년 전, 소련과 대한민국의 수교가 목전에 이르자, 북한은 이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북한은 소련이 북한을 배신할 경우, 1) 대량파괴위력을 지닌 무기를 개발할 것이며, 2) 일본과의 쿠릴 열도 국경분쟁에서 일본의 편을 들 것이고, 3) 미국과의 수교를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임을 소련측에게 전달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북한은 정권안정과 체제유지를 위해 절대적인 파괴력을 지닌 '모종의 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북한의 핵개발 과정과 그 배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한국전쟁 시기에서부터 핵무기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냉전시기 소련과 중국에 지속적인 핵 기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지속적으로 거절당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탈냉전시기 정권차원에서의 위기의식과 피포위 의식이 더해지면서 북한의 독자전인 핵개발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