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군인이 군대를 통제하는 건 맞을까?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대한 합법적 관리자, 군대.
군대란 과연 무엇인가? 국가로부터 물리적인 폭력을 합법적으로 부여받아 평상시 그것을 관리, 통제하며 유사시엔 그 물리적 폭력을 수단으로 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다. 또한 이러한 물리적인 폭력은 점차 시대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군(軍)이 수행하는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 규모의 증대로 인하여 특유의 전문성을 띠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군의 전문성과 특수성은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군대, 그리고 그 군대의 상위조직인 장교단의 임무는 매우 막중하다고 볼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은 이러한 합법적 무력수단인 "군사력"을 평시에 잘 관리하여 유사시 전승을 보장하는 임무를 가진, 그야말로 '관리의 스페셜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교단은 군사적인 전문지식을 함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인문학적인 소양등을 키우면서 단순한 "지식을 보유"했다는 차원을 넘어 다각적 사고를 통해 이러한 무력수단의 효율성 관리와 사용에 대한 고민과 발전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약간의 고민이 시작된다. 이러한 군의 특수성과 전문성이 중요한 것도 알겠고, 이러한 전문성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군은 누구의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 아닌가? 혹여나 군대를 잘 알지도 못하는 민간인이나 공무원들이 이러한 군의 "전문성"을 침해하거나 훼손하게 된다면 군의 무력관리는 엉망이 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안보현실에 맞물려, 더욱 군에 대한 민간의 통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의외로 금방 현실의 거대한 벽에 부딪히게 되는데, 만약 저러한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에서의 군부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상태로 국가의 전쟁 지도는 물론이거니와 심하면 국가의 시책에까지 자신들의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이익집단으로 될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아까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군이 단순한 조직이 아닌,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부여받은 폭력적 수단을 실존적 힘으로 가지고 있는 무력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은 항상 국가(정확히는 국민)에 의해 감시, 통제되어야 하며 이는 그들이 보유한 무력수단이 국가와 국익을 위해 정당하게 쓰여야 한다는 논리로 뒷받침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에 의한, 군에 대한 통제를 소위 "문민통제(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라고 일컫는다.
복잡 다난한 민군관계, 군(軍)과 민(民)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러한 문민통제에서, 군(軍)과 민(民)중에서 과연 어떠한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까? 이러한 논의들이 으레 그렇듯이, 칼로 무를 자르듯 "이것이 정답"이라고 하나만의 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 국방/군사 사안마다, 그리고 각국의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군의 위상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판단해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S. 헌팅턴에 따르면, "문민통제를 해야 하긴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 문민통제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객관적 문민통제란, 쉽게 말해 군의 고유영역과 그 자율성을 인정받는 민군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군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문민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군의 자율성은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율성을 존중받은 군은 문민리더십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며, 이 복종을 통해서 군의 정치적 중립성은 확보된다는 논리이다. 이는 군의 자율성이 훼손되고 고유의 영역이 침해되어 군의 효율성이 저해된다는 "주관적 문민통제"와 비교된다.
그러나 이러한 헌팅턴식의 객관적 문민통제가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바로 군의 무력에 대한 권한을 군에 지나치게 집중시킴으로써, 문민 리더십에 대한 군의 복종을 "자율성"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군의 독자적 영역"에 대해 사뭇 "성역化"되어 민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즉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으로서 국가의 군대가 아닌, 군부가 특별한 위상을 지니게 되어버린다는 非 민주적인 의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애초에, 민군이 상호 간의 영역독자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영역"이라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한데, 고도로 발전하는 현대사회의 각종 어젠다 중 민군 간의 영역을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에 대해 엘리엇 코언(Eliot Cohen)은 대안으로 "불평등한 대화" 개념을 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민과 군의 대화는 불평들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방법론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문민 리더십(대통령이나 총리 등)은 군의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제복 입은 스페셜리스트"로 군사문제에 있어 그들의 고견을 최대한 경청하고 고민하며 군사문제에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한다. 군은 이러한 문민 리더십을 전문적인 식견으로 최대한 보좌하며,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건의, 설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민 리더십과 군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될 때, 종국적인 의사결정은 결국 문민에 있음을 양측이 모두 인정하고, 문민 리더십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단순하게 "문민 리더십이 결정했으니 따라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를 위해 정치 / 외교 / 경제 / 군사 문제를 총괄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한 결과에 따라, "군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국가전략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결정이 옳다"는 것을 문민 리더십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일련의 합의과정 모델로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