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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과 정치 - 한국의 민군관계는 왜 파탄 났는가?

정치와 군 사이의 특별한 관계의 이유

by 김휘찬

대한민국의 군은 과연 정치적인 조직인가?


요 며칠사이, 사회는 참 시끌벅적했다. 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에 이어 홍범도 사건 흉상 철거 논란까지, 군대와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수많은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되어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였다. 이런 사건에 대해 좌, 우의 이념에 경도된 광신자들은 서로의 정치병의 프레임 속에서 상호비방만을 하기에 바쁜 실정이다. 참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으나, 한 편으로는 이것이 결국 우리 사회의 수준과 성숙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싶은 자괴감마저 들 정도다.


이러한 논란들에게 불구하고, 오늘은 이러한 사안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가 아닌, "군"그 자체의 입장과 그 문제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비단 이번 사건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거쳐왔던 본인의 군생활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나름대로 현재 우리 군의 현 실태에 대해 몇 글자 적어보고자 노력했다.


필자는 현재 이러한 여러 사안에 있어서, 한국군과 정치의 관계 - 민군관계의 근본적 밑바탕에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에 일어났다고 본다. 정치권에서 군의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군은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본래 자신들의 권력이나 표에 직결되는 문제라면 우는 아이 사탕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이 본업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과일장수가 과일을 파는 것처럼, 그것이 바로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군' 스스로가 가지는 태도를 비롯한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쉽게 말해, 최초로 사용되었던 1995년 이후 정권이 바뀌면 그 정권의 이념적 스팩트럼에 맞추어서 국방백서에 '주적(主敵)'개념을 넣었다 뺐다가 하는 촌극을 벌이는가 한편, 정부 주요 인사의 의견에 맞추어 양양 군사공항 활주로를 바꾼다느니, 롯데타워 때문에 활주로를 어떻게 하느니의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그에 맞는 정책들을 먼저 내놓는 충실한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軍이 "제복 입은 전문가"가 되기 요원한 이유


우리 군이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게 된 것들에는 과연 어떤 이유들이 있을까? 필자의 부족한 생각에는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 번째, 문민 리더십의 능력과 지도력의 부재이다. 현재 우리 정치권은 정치현안에 몰두되었고, 이념적 / 정책적으로 대결보다는 패거리 정치, 즉 분열과 야합을 주 무기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국방현안이나 정책, 군사력 건설에 있어서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기는커녕,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논리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형형색색 그 성격을 "알아서 스스로" 잘 바꿔주기에 바쁘다. 이러한 문민 리더십의 부재는 자연스레 군의 비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군사독재 시절의 반발작용으로 인한 군 스스로의 자존감 하락 및 정치에 종속화의 가속이다. 많은 과오를 안고 있던 지난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은 우리의 현대사에 날카로운 흉터를 남겼다. 물론 초고속 경제성장이라는 기적도 낳았던 시대였지만, 군사력이라는 무력이 남긴 거대한 자국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반발작용으로 인해 군은 정치적 쟁점에 대해 스스로 작아질 수밖에 없으며, 정책적 부분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군은 정치적, 정책적 쟁점에서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일본계 미군인 '에릭 신세키(Eric Shinseki)'는 미 육군 참모총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종결 이후 안정화 작전을 위한 병력주둔의 규모를 두고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정책적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현재 이라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치안유지를 위한 주둔군의 규모를 약 60만 명으로 주장했는데,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럼즈펠드의 '15만 명'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이었다. 결국 그는 해임되고 말았으나, 후일 그의 의견이 옳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했다.

maj-gen-eric-k-shinseki-3c3607-1024.jpg 일본계 미국인인 에릭 신세키 참모총장. 문민리더십의 전쟁지도에 '제복입은 전문가'로서 당당히 조언을 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매서웠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은 이제 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은 또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연속'이며, 이로 알 수 있듯이 "고도의 정치"라는 점에서 군은 정치적, 정책적 사안에 대해 군에 미치는 영향, 군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문민정부에게 전문성을 가진 조언을 할 필요가 있다. 때에 따라서는 문민정부의 의도와는 상반되더라도, 변호사가 법률적 조언을 하듯이 소신을 가지고 조언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군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 번째, 군에 대한 국민적 감정의 문제이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다수 남성들은 병역의 의무를 지며, 이로 인해 거의 모두가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물론 병사로 입대한 장정들의 무용담이나 소위 "썰"로 남아서 각종 밈으로 돌아다니는 전설(?)들도 있지만, 대다수 그들이 겪은 군대문화의 특징은 사실일 것이다. 굉장히 폐쇄적이고, 개별 사건과 사안에 지휘관의 의견이 굉장히 많이 작용한다는 것 말이다. 이러한 군대문화를 겪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이러한 개인적 경험들은, 전역 후 사회의 중축을 형성하는 그들의 입장으로 보아 향수 국민감정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군대를 겪어봤기 때문에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군에 대해 불신하거나 의심하는 것이 매우 당연히 여겨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론 : 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이기에, 군 또한 전문성과 소신을 가지고 조언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고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개개인의 결투"가 모여서 이뤄진 것이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과 강력한 갑옷, 도끼를 들고 서로를 살육하는 결투였다. 그러나 지금의 전쟁은 더 이상 그런 것이 아니다. 군인들은 이제 예전의 '전사(Warrior)'로 자신을 규정해서는 안된다.


헌팅턴의 주장처럼, 군인들, 특히 장교단은 '전사'가 아닌, 국가가 합법적으로 승인, 보유한 무력을 관리, 유지, 유사시 사용하는 "폭력의 관리자"이자, 고도의 정치행위인 "전쟁"을 억제하는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국군이 그러한 전문성을 가진 집단으로 하루빨리 거듭나기를, 장교단의 일원이었던 사람으로서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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