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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통제 : '군대'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문민통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

by 김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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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국가(國家)'에서, 과연 '군(軍)'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어떤 존재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가장 가깝고 쉬운 설명은 아무래도 '외부의 위협에 대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폭력적 무력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국체(國體)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통용되는 개념은 바로 국가에 의한 '폭력(暴力, violence)'수단이라는 점이다.


물론 '폭력'이라는 단어는 우리들 일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사건'등에서의 무식한 힘만을 뜻한다기보다는, 국가의 무력수단으로써 강제력을 동원한 '힘'을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의 저자이자 문민통제의 아버지인 정치학자 헌팅턴(S. Huntington)은, 이러한 군의 중추인 장교단의 중요한 역할로 '폭력의 관리(management of violence)'를 제시했는데, 이는 그만큼 군이 가지는 강제적 물리력에 대한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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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민통제는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내내 있어왔던 고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플라톤(Plato)의 『국가(The Republic)』에서 인용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상 많은 부분에서 논의가 되어오던 고대 로마의 시구를 인용하고자 한다.


지키는 자는 누가 지킬 것인가?
Who Guards the Guardians?

바로 저 문장이야말로, 문민통제(文民統制,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문장일 것이다. 결국, 국가를 지키는 자인 '군'은, 누가 지키고 감시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잘 풀어낸 문장이다. 즉, 그 군대에 대한 감시와 통제 문제는 이처럼 인류의 아주 오래된 고민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왜 감시해야 하는가? 군대를 감시한답시고 잘 모르는 민간인이 국방문제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지나치게 간섭한다면, 결국 강군육성은 물 건너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들도 팽배할 것이다. 필자도 장교 시절 이러한 의견들을 많이 청취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우리 군, 특히 간부들의 문민통제 의식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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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군대'가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역사 속 강대국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강력한 군대'의 보유 여부였다. 이 강력한 군대는 국가의 안위는 물론이고, 나아가 타국에 대한 정벌과 대외팽창을 가능케 하는 국가의 무력수단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이러한 강력한 물리력을 타국이 아닌 다른 방향, 즉 국내로 돌려 발휘하게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쿠데타, 즉 정부에 대한 전복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있어왔던 논의였다.


그러나, 역사 속 국가들의 군대는 지금의 군대와는 그 태생적 성격부터가 상이했다. 쉽게 말해, 당시의 군대는 '왕'의 군대, '귀족세력'의 군대와 같이 당시 집권을 하고 있는 한 이익집단의 무력수단에 불과했다. 즉, 지금처럼 국민의 군대가 아닌, 당시 집권세력의 군대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국민의 민의는 반영되지 못하고, 해당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와 의도에 따라서 군대는 활용되었던 것이다. (차후 다루겠지만, 이것이 바로 헌팅턴이 말한 주관적 문민통제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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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 해당 논의를 이어 붙이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군대가 예전엔 '집권세력'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다면, 지금은 '누구'의 의지를 관철시켜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그 '누구'를 어떻게 규정하고 권한을 줄 것인가? 누구의 결정과 통제를 받아 군사력을 건설하고 활용하며, 향후 국가의 한 부분으로서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렇다. 지금의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주권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부에 의한 군에 대한 통제는 어떻게, 어느 수준에서 이뤄질 것인가 하는 문민통제의 논의들도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민통제에서 가장 어렵고 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통제의 수준과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군에 대한 확실한 통제와 장악을 위해 군사 전문성이 부족한 민간관료가 과도하게 개입하게 된다면, 군은 사기의 의지를 잃을 것이고 결국 강군을 육성하는 것은 요원해질 것이다. 반면 군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보장해 준다면, 군은 아무런 통제 없이 국방정책을 추진하게 될 것이고, 이는 예산문제를 비롯한 다른 국가정책에 있어서 정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결과는 낳게 될 것이다. 에드먼즈게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에 군 내부의 그룹이나 야심가의 등장이라는 변수가 더해진다면, 건강한 민주국가에서의 문민통제는 더더욱 불가능해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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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민통제의 논의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군부통치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결코 적지 않은 메시지를 남겨주기도 한다. 결국 통제받지 않는 군부가 스스로 행동하고 결단할 때, 그 국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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