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 - 지나간 사랑, 남은 마음
– 아유, 너 나랑 얘기하고 있어? 어디 보고 있는 거야? – 서연은 손을 뺨에 올려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며 못마땅하게 눈을 들여다본다.
어디 보고 있냐고? …전 여자친구가 나한테서 도망치듯 뛰어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이상한 스토커라도 되는 것처럼. 도대체 왜? 아까까진 괜찮았잖아? 같이 앉아 차 마시고, 디저트도 먹고, 수다도 떨었는데. 내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왜 그렇게 도망쳤을까? 아까 그 웃음도 다 가식이었나?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싫으면 그냥 안 오면 되잖아. 아무도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닌데. …정말 이해 안 되는 상황이다.
– 도윤?
서연은 나를 늘 도윤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는 이름이 좀 다르다며 여러 번 말했는데, 자기는 다 똑같다고 한다. 내가 장난 삼아 서연 본명을 부르면 기분 나쁘다고 하면서도. 결국 그냥 포기했다.
– 어… 아무것도 아냐. – 나는 손을 내저으며, 굳이 전 여친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말해봤자 기분 상할 게 뻔하다. 사실, 어떤 여자라도 남자가 ‘전 여자친구랑 카페에 앉아 있었다’고 하면 안 좋아한다. 아무리 아무 일도 없었다 해도. 괜히 얘기할 필요 없다. – 안 들어갈래? 카페 안에 하린이 있어.
– 아이, 싫어. 제발 나 좀 살려줘. – 서연은 눈을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둘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 동생 하린은 말이 직설적인데, 서연은 그걸 못 참는다. 그래서 서로 으르렁대기만 한다. 나는 그 중간에서 양쪽 불평을 다 들어주는 벽 같은 존재다. 게다가 하린 남편 민호가 유럽으로 장기 출장을 간 지 벌써 세 달이라, 내가 대신 여기저기 같이 다니고 있다. 병원, 집, 카페, 쇼핑몰, 공원… 어디든 말이다. 서연은 그걸 보고 매번 뭐라고 하지만, 어쩌겠나. 하린은 아직 어리고, 게다가 임신 중이다. 혼자 택시 타고 다니게 할 수 없지. 민호한테도 잘 보살펴 달라고 약속했으니까.
– 나 미용실 예약 있어서 가야 돼.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거야. 오늘 우리 같이 놀까? – 서연이 손톱으로 내 셔츠 가슴팍을 살짝 긁으며 묻는다.
서연이 말하는 ‘놀자’는 보통 레스토랑에서 밥 먹고 집으로 가는 걸 뜻한다. 서연은 걷는 걸 싫어한다, 특히 이런 날씨엔. 집순이 스타일이라 따뜻한 곳, 맛있는 음식, 그리고 관심만 있으면 된다.
– 글쎄, 오늘은 지수 좀 만나야 돼. 이따 전화할게, – 꼭 만나야 한다. 진짜 오랜만이라, 지난번 하린 차 좀 부탁하려고 연락했을 때도 곧 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얘가 벌써 나를 여자들 밑에서만 사는 놈이라고 놀리기 시작했거든. 웃긴 놈.
– 알았어, – 서연은 또 눈을 굴리더니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계속 기다리던 택시로 달려가 버린다.
나는 무심코 예진이 도망치듯 뛰어간 인도를 바라보다가 카페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거의 얘기도 못 나눴다. 사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몇 년이나 못 봤으니까. 그래도 남이 아니잖아, 둘도 없는 가족 같은 사이였는데.
– 벌써 갔어? – 하린이 핫초코를 새로 주문해 홀짝이며 소파에 앉아 나를 본다. 표정은 썩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우리 누나는 대부분 시간 그런 표정이라 이상할 건 없다.
– 네 닭이 겁줬잖아, – 하린이 눈을 굴린다.
서연을 닭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 건 벌써 수십 번. 소용없다. 하린은 철벽이고, 굳이 싸우고 싶지도 않다. 서연이 누나한테 뭐라고 할 때는 내가 막고, 뱃속에 애까지 있는 하린은 그냥 다 받아준다. 아니면 아예 못 들은 척한다. 가끔은 내가 나쁜 남자친구 같지만, 그래도 형으로서는 괜찮은 편 아닐까. 에휴.
– 나라도 도망쳤겠다. 상황 완전 불편했잖아. 전 여자친구에, 지금 여자친구까지. 게다가 예진이는 표정까지 안 좋았는데. 제대로 얘기도 못 했네!
– 다섯 년 동안 못 봤을 때도 안 죽었잖아. 지금도 괜찮을 거야, – 나는 피식 웃는다.
우린 카페에 몇 시간이나 더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운영하는 가게마다 따로 만들어둔 사무실에서 일 좀 보고, 하린이는 옆에 있는 편한 소파에서 잠깐 낮잠을 잤다. 우리 집 애는 진짜 잠꾸러기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내 막내 여동생이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다니. 세상에, 얘가 이제 더 이상 여섯 살 꼬맹이가 아니라니!
몇 시간이 지나 하린이가 집에서 과일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나는 차를 몰고 다른 일을 보러 가던 중 전화가 울렸다. 지수였다. 드디어 우리 약속이 생각났나 보다.
– 여보세요, – 나는 스피커폰을 켰다. 서연이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피부 관리샵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친구와 저녁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 일단 말이지, 너 지금 당장 맥주 들고 내 집으로 와라, – 지수가 말을 꺼냈다. – 그리고 둘째, 아침에 네가 부탁한 차 말인데… 그거 네 전 여자친구 차더라.
– 그게 뭐가 문제야?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지수랑 예진이는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부딪힐 일도 없지 않나? 차 주인이 누구인 게 무슨 상관인데.
– 최소한 내가 바보처럼 보이진 않았겠지, – 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 예진이 너네, 역시 날 물어뜯더라.
– 예진이는 내 사람이 아니야, – 나는 이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리고 넌 원래부터 바보처럼 보여.
– 어쨌든 빨리 엉덩이 들고 와라, – 지수가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에 못 만난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받지 않았다. 뭐 어쩌겠나. 택시 타고 잘 가겠지. 내가 새벽까지 지켜줄 순 없으니까.
삼십 분쯤 지나 나는 지수 집 앞에 도착했다. 이 녀석, 사업이 성공하자마자 바로 고급 주택가에 어마어마한 집을 지어버렸다. 머리 좋은 놈이다. 나는 계속 사업 확장에만 집중했더니, 지금 내 집은 아직도 콘크리트 벽만 덩그러니 서 있고, 텅 빈 대지뿐이다. 나도 집이 필요하다. 아파트는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 기지개 켜고, 수영장에 풍덩 들어가고 싶다. 아파트에선 고작 발코니에 서서 도시 전경이나 바라볼 뿐. 지루하다.
사실 나는 집에 대해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예진이와 사귀던 시절, 우리는 큰 창과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넓은 집을 갖겠다고 꿈꾸곤 했다. 시간이 오래 흘러 지금은 나 혼자 그 꿈을 이어가고 있지만, 방향은 여전히 같다.
하지만 서연은 집을 원하지 않는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싫다고 한다. 게다가 잔디 관리, 꽃 심기 같은 건 정원사를 고용하지 않는 이상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서연은 도시 여자다. 고층 아파트와 개인 운전기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사실 그녀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말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다르다. 그래도 아직 함께한 시간이 짧으니, 미래를 단정 지을 때는 아니다. 지금은 서로가 편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후는 지켜보면 알겠지.
나는 지수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는 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지수의 커다란 알라바이, 미슈카가 바로 나를 알아보고 짖지도 않는다. 진짜 멋진 개다.
– 이게 누구야, – 지수가 포즈를 잡으며 두 팔을 벌리고 나왔다.
나는 그를 껴안고 등을 몇 번 두드렸다.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다. 이렇게 오래 알고 지낸 건 지수와 내 여동생 하린뿐이다. 다툼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형제 같은 사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수를 나 자신처럼 믿는다.
우리는 지수의 거실에 들어가 예전처럼 맥주와 안주거리를 펼쳐놓고 아무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마치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 듯, 아무 걱정도 없는 시절처럼. 내일 수업 따위는 또 땡땡이치면 그만이던 그때.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진짜 다시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솔직히 언제가 더 나았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처럼 모든 걸 가졌지만 문제와 고민이 산더미처럼 쌓인 지금인지, 아니면 최소한의 돈밖에 없었지만 스스로가 부러울 만큼 한없이 평온하게 살던 그때인지.
– 서연은 어때?
서연은 지수의 사촌 여동생이다. 실제로는 먼 친척이지만, 함께 자라서 거의 친남매처럼 지냈다. 나도 지수 생일날 처음 만나서 어쩌다보니 연애까지 이어졌다.
– 늘 그렇지 뭐. 미용실 가서는 전화도 안 받고.
– 오늘 예진이 봤을 때 말이야, 순간 너랑 내 동생이 헤어진 줄 알았다니까, – 지수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 너 오랜만에 누군가를 구해줬다 싶었는데, 하필 그런 장면이라니!
– 아직도 예진이랑 사이 안 좋아? – 나는 예전 일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면 꼭 신경전을 벌였고, 나는 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지수는 예진을 꼭 건드려서 화나게 만들고, 예진은 제대로 받아치지도 못하고 금방 상처받곤 했다. 원래 순하고 여린 애였다.
– 뭐, 예진이 마음은 모르겠지만… 널 좋아했던 건 확실했지. 근데 사실은 말이야, 나도 항상 예진을 좋아했어, – 지수가 아무렇지 않게, 마치 아침에 뭘 먹었는지 얘기하듯 말했다.
그 순간,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해는 한다. 시간이 오래 지났고, 우리 사이도 끝난 지 오래다. 이제는 각자 삶을 사는 거니까. 그래도! 그 시절 내가 두 해 동안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몰래 좋아했다는 얘기를 지금 이렇게 듣게 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어쩔 수 없이 세 명이 함께 있던 순간들이, 그리고 지수가 내게 “너랑 예진은 안 맞아, 오래 못 간다”라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차라리 그때 알지 못해서 다행이다. 지금은 괜히 싸울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따지고 싶어졌다.
– 예진을 좋아했다고? 네가?
– 왜 놀라? 원래 좋은 애였잖아. 괜히 너랑 2년이나 사귄 게 아니겠지.
– 그런데 왜 항상 예진한테 막 대했어? 그게 무슨 사랑이냐? – 나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조금 났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지만, 우리 사이의 기억은 따뜻하게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말들이 덧칠되니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 멍청하지, – 지수가 비웃듯 말했다. – 질투했던 거야. 그녀가 나한테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아니까. 네게서 빼앗을 수도 없었고, 친구한테 그렇게 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괜히 더 심술 부렸던 거지. 오히려 숨기려고 했던 마음이 더 엉망으로 만든 거야.
– 네가 알아, 이게 얼마나 구린 소리인지?
– 아, 됐어, – 지수가 손을 내저었다. – 이미 오래전 일이잖아. 너희가 헤어진 건 내 탓도 아니고, 내가 일부러 뭐 한 것도 없어. 근데 웃긴 건, 예진은 여전히 날 피해 다녀. 5년이 지났는데도. 커피 마시자고 했더니 거절하더라니까. 가시 돋친 예진… 혹시 너 번호 알아? 오늘 차 빌려줄 때 연락처 교환했을지도 몰라서.
지수는 반쯤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나는… 묘하게 불편했다.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고, 모두 새 삶을 살고 있는데 굳이 과거를 다시 헤집을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 찝찝한 무언가가 남았다.
그리고 이 밤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