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귤과 멜로드라마
세 시간 동안 거리를 걸으며 모든 웅덩이에 일부러 발을 들여놓는다는 발상, 서른 분 전까지만 해도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결국엔 카페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혼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불편하다.
너무! 불편하다.
창문 너머로 도현 옆에 매달려 그의 뺨에 입을 맞추는 여자가 보인다. 그 순간 땅속으로 꺼져 버리고 싶어진다.
질투라기보다는… 우리 사이가 끝난 지는 이미 오래라 그런 권리조차 없다고 스스로 잘 안다. 다만 문제는 지금 그들이 이 안으로 들어온다면 도현이 뭐라고 할까? 날 전 여자친구라고 소개할까? 그럼 그 여자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테고. 아니면 거짓말을 할까? 그럼 이번엔 내가 상처받는다. 어쨌든 웃기고 어색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망치기로 한다. 예슬은 배가 불러서 금방 일어나지도 못할 테고, 붙잡으려 해도 오늘만큼은 절대 설득당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애초에 이 여행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도움 준 건 고맙지만, 이제 그만이다. 혹시 도현이 차 견인이나 처리비를 냈다면 이따가 송금하면 된다. 지금 중요한 건 빨리 여기를 벗어나는 것뿐이다.
가방을 움켜쥐고, 먹다 남긴 치즈케이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슬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차를 마시며 날 흘끗 보았지만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까지 지었다. 왜 이렇게 현명해지고 이해심이 깊어진 거야?
“도망가는 거야?”
“그냥 집에 가야 해. 고양이가 혼자라서 내가 빨리 들어오겠다고 했거든.” –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여기서 집까지는 꽤 멀다. 게다가 곧 다시 차를 가지러 나와야 하는데 굳이 집에 들를 이유는 없었다.
“그럼 마르키즈한테 안부 전해 줘.” – 예슬이 웃으며 말했다.
“누구?” – 순간 멈칫하다가, 내가 만든 거짓 설정을 떠올렸다. – “아, 맞다! 마르키즈… 그럼, 당연하지.” – 고개를 끄덕이며 출구로 향했다. 스스로 이마를 탁 치고 싶었다. 자기 거짓말조차 기억 못하다니, 더 큰 문제는 어떻겠는가.
도현과 그의 여자친구, 아마 ‘수진’이라 했던 것 같은 그녀가 카페 입구 왼편에 서 있었다. 제발 오른쪽으로 빠져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길 간절히 바랐다. 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내 안의 기쁨이 통째로 빨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에 디멘터라도 지나갔나? 분명히 나를 스쳐 갔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난 바로 반대쪽으로 뛰듯 걸음을 옮겼다. 예슬을 향해 커다란 창 너머로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진심 어린 손키스를 날렸다.
사실 십 대가 자라면서 성격이 바뀐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다. 예슬은 참 따뜻하고 배려 깊었다. 그녀와 만난 건 정말 기쁜 일이었고, 이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냥 예슬이 날 보고 있기를 바랐다. 도현의 여자친구 성격이 어떤지 전혀 몰랐고, 내가 그들의 사이를 흔드는 원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도망쳤다. 마치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선택이라도 되는 듯, 사실은 문제를 말로 해결할 줄 모르고 기회만 나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나는 못난 사람처럼.
사실 난 회사에서도 종종 버티기 힘들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많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업무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점. 그래서 보통은 불평도, 불필요한 질문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지적이라도 받는 날이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 그냥 집으로 달려가 이불 속에 파묻히고 싶다. 못난 성격이지만 고칠 수도 없다. 난 강해지는 법을 배운 적도 없고, 삶이 특별히 나를 단련시킨 적도 없었다. 그냥 그저 살아왔을 뿐이다. 회색빛 나날, 무난하고 평온하지만 아무런 빛도 강렬한 감정도 없는 삶. 마치 정신병동에라도 갇힌 듯.
카페에서 꽤 멀리 벗어나자, 빠른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생각해 보니 산책을 나온 게 참 오랜만이다. 늘 차만 타고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걷는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봄이었다. 마지막 눈이 녹아내리고, 땅속에서 첫 초록이 고개를 내밀어 햇살을 향해 뻗어 가는 계절. 난 봄을 정말 좋아한다. 더 자주 밖에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내 차 바퀴를 찢은 사람이, 내가 이렇게 걷길 바라던 건 아닐까?
묘하게 비뚤어진 방식의… 배려 말이다.
꽤 오랫동안 거닐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제야 차를 찾으러 갈 시간이 된 것이다. 확실히 오랜만에 바람을 쐬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마음을 짓누르던 문제들이 조금은 가벼워졌고, 발밑의 웅덩이조차 더 이상 성가시지 않았다.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햇살은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목적지인 자동차 정비소까지도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걸어서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보통 이런 정비소를 이용해야 할 때면 집 근처에서 다 해결하곤 했다. 집에서 나가 도보 5분, 길만 건너면 타이어 교체든 차량 점검이든 다 할 수 있었다. 가까워서 참 편리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낯선 동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의사가 좋다는 추천을 받아 멀리까지 왔다가, 그 결과 문제만 산더미처럼 떠안게 됐다. 전 남자친구, 펑크 난 타이어, 시내 한복판의 정비소까지. 기가 막힌 하루였다.
제발 벌써 수리가 끝나 있기를, 그래서 차를 받아 바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랐다. 반나절을 더 기다리는 일은 없기를. 내일은 다시 출근해야 했다. 병가도 끝났으니 오늘 저녁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저녁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정비소 대기실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라.
주소대로 도착해 보니, 살짝 놀랐다. 깔끔하고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정비소가 아니었다. 세차장도 있고, 작은 매장까지 마련된 제대로 된 센터였다.
이게 정말 미로슬라프 소유라고? 그렇다면 놀라움은 더 커졌다. 그는 늘…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 같았으니까. 그런데 예슬 말로는 이미 체인점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 참 알 수 없는 법이다.
벌써 또 우울해해도 될까?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데, 왜 나만 제자리걸음인 걸까. 지난번에 이런 생각한 게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는 아름다운 여직원이 다가왔다. 실내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깔끔했다. 이렇게 멋진 곳일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제 차가 여기 있을 거예요. 타이어가 찢겨서 견인차로 옮겨졌다고 들었는데, 전화로 예약된 걸로 알고 있어요.”
“네, 차량의 차종과 번호, 그리고 연락 주신 전화번호를 알려주시면 시스템에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은 노트북이 놓인 안내 데스크로 걸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차종과 번호를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도현이 직접 통화했지, 나는 그 사람 전화번호조차 모르잖아.
“…그게, 제 번호가 아니라 오래된 친구가 대신 연락을 했거든요.”
“그럼 그 친구분 번호를 알려주셔야 확인이 가능합니다. 아시죠? 본인 확인이 없이는 차량을 돌려드릴 수 없어요.”
“제 차 키가 여기 있어요!” – 당황한 나는 가방을 허겁지겁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 농담 아니지? 물론 아무한테나 차를 내주지 않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내 차는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차 때문에 2년 동안 대출 갚아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가씨, 이해해 주세요. 규칙이라는 게 있거든요. 차를 직접 가져오신 게 아니니, 주문이 정말로 고객님 본인으로부터 들어온 건지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차량 번호와 열쇠를 안다고 해도 누구든 흉내낼 수 있으니까요. 저희는 고객을 보호해야 하고,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직원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저녁의 환상은 점점 사라져 갔다. 오늘 이 미친 하루의 나머지를 여기서, 내 차가 정말 내 것임을 증명하는 데 허비해야 할 게 뻔했다. 젠장, 도대체…
도현의 번호를 어디서 구하나? 소셜 미디어를 뒤져 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웃기는 일이다. 애써 그에게서 도망쳤는데, 몇 시간도 안 돼서 다시 연락할 구실을 찾게 될 줄이야. 최악이다.
“혹시 차량 서류라도 가지고 계신가요?” 직원이 희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저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차 안에 있어요…” 나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내준다. 환상적이다.
“아, 미로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직원이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내 뒤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얼어붙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로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이런 일이 있는데요. 이 아가씨가 오늘 낮에 들어온 차를 찾으러 왔는데, 전화를 건 번호를 모르신대요. 그래서…”
“괜찮습니다, 소냐. 제 친구 부탁으로 맡긴 겁니다. 차량 돌려드리세요.”
여전히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내가 누군지 알아본다면? 그 순간 “그런 차는 모른다”며 쫓아낼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도현의 번호도 없는데, 내 차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결국 집까지 가서 서류를 몽땅 챙겨 와야 한다는 건가… 세상에.
도현과 사귀던 시절, 왜인지 그의 주변 사람들 중 나를 좋아해 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 예슬을 만나 반가웠던 건 진심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런 감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미로슬라프. 그는 누구보다도 나를 싫어했다.
“내 옛 굳은 껍데기 같은 친구를 다정한 왕자님으로 바꿔 놓은 여자가 바로 당신이군요.”
그가 안내 데스크에 몸을 기댄 채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완전히 실패한 기분으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
“…세상에.”
“안녕.” –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혹시 13일의 금요일인가? 아니면 월식이라도 있나? 행성이 ‘조롱의 궁’에라도 모여 있나? 도대체 오늘은 무슨 날이란 말인가. 아무도 마주칠 준비가 안 돼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한꺼번에, 꿀에 모여드는 파리처럼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최악이다.
나는 황급히 눈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아마도 우주 밖에서도 보일 만큼 내가 얼마나 불편하고 긴장했는지 뻔히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 차는 돌려주실 수 있나요?” – 대화를 단칼에 본론으로 돌려버렸다. 더 이상 잡담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놀란 듯하면서도 못마땅한 표정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도현이 왜 나한테, 누구 엉덩이를 구하러 간 건지 말 안 했는지 알겠군.” – 미로슬라프는 뻔뻔하게 비웃었다.
도현… 그는 언제나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그 호칭이 싫었다. 그리고 사실, 지수 자체가 마음에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내가 그의 친구를 ‘순종적인 남자’로 만든다고 비난했다. 도현이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게 다 내 탓이라며 질투했고, 나를 그저 잠깐 스쳐 가는 여자, 진지한 상대가 될 수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되어 버렸다.
“만약 네 차인 걸 알았다면 어땠을까?
고쳐 주기는커녕 나머지 바퀴까지 다 찢어 놨겠지?”
말이 튀어나오고 나 스스로도 놀랐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수와 얽힌 기억은 죄다 상처투성이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렇게 날카롭게 받아칠 수 있었다. 아직도 선명하다. 나를 벽에 몰아붙이고 목을 조여 오던 그의 손아귀, 증오로 가득 찬 눈빛. 괴물. 아니, 괴물보다 더한 인간.
“그만해, 세진아. 화내지 마. 과거는 그냥 과거로 남겨 두자.”
뜻밖에도 지수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세진아?
진심인가? 그가 나를 그렇게 불러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봄 햇살이라도 머리를 태운 걸까. 그 말은 오히려 비꼬는 듯 들렸다.
“가자. 네 차 돌려줄게.”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걸어갔다.
나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아마 영원히. 이미 사람에 치여 숨이 막히는데, 이제는 한계였다.
“설마 다시 만나는 거야? 도현이 세정이랑 헤어졌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세정.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조차 따뜻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당연하지. 세정은 얌전하고, 괜찮고, 바른 사람일 테니까. 다섯 해 전, 사랑과 관심을 요구했던 뻔뻔한 세진보다는 훨씬.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왜일까.
왜 나는 이렇게까지 과거를 붙잡고 있는 걸까. 놓아주려 해도, 과거가 나를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
“우연히 병원 앞에서 만났을 뿐이야. 차 문제를 도와줬을 뿐이지, 걱정 마. 우리 다시 만나는 거 아니야.”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짜증났다.
회색빛 복도를 따라 걷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답답했고, 공기가 너무 무겁고 뜨거웠다. 가슴을 활짝 열고 숨을 들이마시고 싶은데, 도저히 그러질 못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아직도 토라져 있네.”
지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어. 이제 상관없어. 오늘은 그냥 엉망인 날일 뿐이야. 차만 돌려주면 바로 집에 갈게.”
“아직도— 삐쳐 있잖아.”
그는 장난스럽게 길게 늘여 말하며 다시 웃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도현처럼, 지수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다 잘나고 멋있게만 보이는 그들이 괜히 더 밉게 느껴졌다. 나는… 나는 뭐지?
“커피 한 잔 할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지.”
…안 돼. 오늘은 더 이상 갑작스러운 제안이나 대화는 사양이다.
드디어 넓고 밝은 정비소 차고에 들어섰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공기를 들이마셨다. 조금이라도 진정하려는 듯. 배 속이 뒤틀릴 만큼 긴장이 밀려왔고,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자신감을 갖고 싶었지만, 아직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커피는?”
지수가 내 차 앞에서 멈춰 서며 물었다.
“사양할게.”
나는 가방 속을 뒤져 차 키를 꺼냈다. 지금은 오직 도망치고 싶었다. 빨리.
“그리고… 수리비는 얼마예요? 제가 내야죠. 도현이 대신 내는 건 원하지 않아.”
“필요 없어. 나 그 정도로 궁핍하지 않아.”
지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코트와 차분한 비즈니스 스타일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은 그 빌어먹을 셔츠만큼이나 여전히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뜨거운 목욕만으로는 오늘의 피로가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귤 한 바구니에다가, 펑펑 울 수 있는 슬픈 영화까지 필요하다. 그래야 겨우 숨 좀 돌리겠지.
“고마워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 차 정비소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이라면, 바퀴 하나쯤은 정말 대수롭지 않겠지. 다행히도 이제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테고, 나는 그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
급히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집에만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길 바라면서.
가는 길에 저녁을 배달 주문했다. 오늘은 도저히 요리할 힘조차 없었다. 현관문을 닫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에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정말 지긋지긋한 하루였다.
자, 이제 내 귤과 멜로드라마는 어디 있지?
이런 날은 눈물이랑 함께 마무리해야 제대로 끝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