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처럼 향기 난다

5- 화 숨겨진 마음들

by 나리솔


5- 화 숨겨진 마음들



알람 소리가 여섯 시 정각에 울려 퍼졌다.

“아… 지옥이다.”

예린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투덜거렸다. 며칠 동안 병가로 늦잠을 자다가,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려니 세상의 모든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이불 속을 벗어나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새하얀 가운마저도 입은 지 처음 몇 분은 냉랭했다. “진짜 너무하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빠른 샤워, 쓴 커피, 겨우 삼킨 작은 아침, 그리고 발밑을 맴도는 고양이. 예린은 급히 스타킹을 신다가 그만 올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 제발 오늘은 좀 봐줘…”

눈 화장을 하던 중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마스카라가 눈꺼풀을 덮었다. 거울 앞에서 깊은 한숨.


“도윤아, 나 진짜 늦겠어!”

고양이 도윤은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슈렉’ 속 장화 신은 고양이 같았다. 예린은 바쁜 와중에도 잠시 쭈그려 앉아 그를 꼭 안아주었다. “너 때문에 출근하기 싫어지잖아…” 속삭이며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서면서도,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며칠 동안 회사와 그 숨 막히는 상사 없이 지낸 시간은 병으로 누워 있어도 행복했으니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래전부터 회사를 옮길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다니는 이 회사는 더 이상 나에게 성취감도, 즐거움도 주지 않았다. 남은 건 끝없는 스트레스와 실망뿐.
밥도 제때 못 먹고, 몸매는 망가지고, 신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학력도 있고, 경험도 있고, 아는 것도 많으니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신은 있었다. 이젠 정말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 매일 감옥에 끌려가는 죄수 같은 기분으로 회사에 간다는 게 정상일 리 없으니까.

유일한 장점이라면… 집에서 가까웠다는 것. 차로 7분이면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도착해 내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하자,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룸미러로 메이크업을 고치고, 바닥에 물웅덩이를 밟아 더러워진 구두를 닦으려고 글로브 박스를 열었는데—

“아, 젠장!”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박았다.

순간의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프다기보다 무서움이 더 컸다. 여기는 분명 주차장인데, 방금 ‘쿵’ 하는 충격이 분명히 느껴졌다.

차문을 열고 나와 상황을 확인했다. 믿기 힘들게도 붉은색 승용차가 내 차 뒤 범퍼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어떻게…? 분명 나는 제대로 주차했는데.

허리를 굽혀 파손 부위를 확인하니, 깨져 버린 후미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상대편 차에서 한 여자가 허둥지둥 내리더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얼굴엔 눈물이 맺힐 듯했고, 도망칠지 울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뭐야, 이게…”
나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는 바퀴 문제로 애먹더니, 오늘은 이런 사고라니. 도대체 왜 내 차만 이렇게 시련을 겪는 건데. 제발, 그냥 조용히 탈 수만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스스로 다잡았다. 지금이라도 더 이상 울고만 있으면 안 된다. 누가 대신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 곁에 있는 유일한 남자는 지금 집에서 꼬리를 베개 삼아 코를 골고 있는 고양이뿐이다. 결국 움직여야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세상에…”
사고를 낸 여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후진하다가… 그런데 언니가 여기 서 있어서…”

나는 황당해서 손을 벌렸다.
“저는 제자리 제대로 주차하고 있었거든요? 눈은 어디 두시고 운전하신 거예요? 공간도 넉넉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박을 수가 있죠?”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저… 아직 운전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냥 쇼핑하러 왔다가… 지금 전화해서 다 처리할게요.”

여자는 허둥지둥 전화를 걸었지만, 표정은 미안하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처럼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람. 출근길에 사고라니…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떨리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러 번 전화를 시도하는 사이, 나도 회사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지각으로 혼나지 않기를 빌면서.

억울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보험도 있고, 내 잘못도 아닌데, 이 무력감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여자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눈빛이 마치 내가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도윤 오빠한테 전화했어요. 곧 올 거예요. 다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도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빠’라니, 뻔히 보이는 그림이었다. 이제 곧 서른이나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서, 돈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하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내 잘못도 없는데.

게다가 아까는 긴장감에 못 느꼈지만, 지금 머리가 어지럽고 욱신거렸다. 충격이 생각보다 심했던 모양이다. 하필 오늘, 또 이런 불운이라니.

“저는 어떤 디민가 하는 사람 기다릴 생각 없어요.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나는 굳게 버티며 말을 내뱉었다. 오히려 약간의 자존심이 생길 정도였다.
“사고 접수하고, 현장 조사하고, 과태료든 뭐든 다 정식으로 처리해야죠. 제 차는 범퍼가 긁히고, 전조등은 깨지고, 저도 다쳤습니다. 당신 남자친구가 와도 이 문제 해결 안 됩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경찰 번호를 찾으려 했다.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금방 나올 터였다.

그런데 그녀가 내 전화를 확 낚아채더니, 마치 당장 내 얼굴에 던질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냥 제 남자친구 오빠 기다리면 돼요!”
명령조로 말하자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머리가 더 세차게 빙글빙글 돌았다. 속도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정말 환상적이다. 나는 차에 기대어 겨우 버티며 서 있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던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언니… 괜찮으세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아까 충격 때 부딪혔거든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머리에 올렸다. 점점 커지는 혹이 만져졌다. 완벽하다, 예린. 오늘 하루 만점짜리 불행이다.

“제발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시면 안 돼요? 도윤 오빠가 알면 저 죽어요. 차도 뺏길 거고요…”
그녀는 간절히 애원했지만, 그 말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무책임할 수 있지?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왜 나더러 눈감아 달라는 건가.

나는 아직도 몸이 휘청거렸고, 속에서 이상한 파도가 일렁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에서 억지로 참아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차를 잃을까 두려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때 내 휴대폰이 그녀 손 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되찾아 귀에 댔다.
“예린 씨, 괜찮아요? 도움이 필요합니까?”
무심한 듯 들려오는 건, 역시 하나도 ‘배려심 없는’ 내 상사의 목소리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다만… 오늘은 사정이 있으니 하루만 쉬겠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상사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사고는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 책임은 왜 늘 나에게만 돌아오는 걸까.


옆 눈으로 보니 두 대의 차가 더 들어와 멈췄다. 운전도 제대로 못 하는 그 여자애를 구하러 온 듯했다. 그녀는 곧장 달려가 자기 구원자들의 품에 안겼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더 서러워졌다. 피해자는 분명 나인데,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 올 수 있는 건 고양이 하나뿐인데, 녀석에겐 내 집 열쇠조차 없으니까.

“도윤 오빠, 드디어 왔네! 얘 경찰 부른다던 거 있지!”
“뭐? 너 분명히 네가 들이받힌 거라고 했잖아, 수아!”

익숙한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도윤과 지수가 그 여자 옆에 서서 우리 차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던가? 지옥의 사십 번째 고리? 딱 이거다.

그리고… 뭐라고? 내가 들이받았다고? 장난해?

그제야 나는 그 여자애가 며칠 전 카페 앞에서 도윤의 품에 안겨 있던 바로 그 수아라는 걸 알아챘다. 그때는 뒤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지금 이렇게 맞닥뜨리게 될 줄은… 순간 숨이 막혔다.

이건 악몽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누구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길에서라도 검은 고양이를 밟고 지나갔나, 아니면 할머니가 늘 말하던 흉한 징조라도 밟아버린 건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차에 등을 붙이고 몸을 최대한 숨기려 했다. 더는 사고도, 부러진 전조등도, 상사의 불만도 상관없었다. 그냥 이 순간 사라지고 싶었다. …다시 도윤과 지수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의 일만으로도 아직 가슴이 저린데.

그들은 아직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몇 초가 내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시간이었지만,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애초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빠졌다.

그래, 이쯤 되면 그냥 기절까지 해줘야 완벽한 하루일 것이다.

“예린?”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야, 괜찮아?”


강한 두 손이 나를 부축해 차 뒷좌석에 앉히는 순간, 눈앞에 지수의 얼굴이 보였다. 멀리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수아를 아이 다루듯 꾸짖고 있었고, 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그들의 언성조차 고통처럼 느껴졌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힘겹게 물었다. 지수는 내 손목을 잡아주며 등을 기대게 했다.


“내 동생이야.”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 정비소에서 따뜻하게 불렀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아, 가족이었구나.

“물 마실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무심코 도윤과 수아 쪽을 바라봤다. 수아는 팔짱을 낀 채 등을 돌리고 있었고, 도윤은 피곤하다는 듯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지친 모습… 어쩐지 내 마음과 비슷했다.


그때 도윤이 고개를 들어 내 시선을 잡았다.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돋아 어깨가 움찔했다.


“안녕.”

그가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다가왔다. 제발, 오지 마. 지금 이 사고, 이 순간 전부 잊고 싶다. 하지만 제발 내 앞에는 오지 마.


그와 함께 있는 건 여전히 너무 힘들었다. 다섯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내 마음속 가장 아픈 자리였다.


“예린.”

세 걸음 앞에서 멈춰 선 도윤이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그 역시 불편해 보였다. 뭐라고 말하려는 걸까? 돈으로 보상이라도 제안하려고?


“경찰 부르고, 절차대로 다 처리하자. 문제 없을 거야.”

뜻밖의 말에 나는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이지, 지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물.”

지수가 다가와 작은 생수병을 건넸다.

“기분은 어때?”


“어지럽고, 속이 좀 울렁거려.” 나도 모르게 약한 모습을 내비쳤다.


“무슨 일이야?” 도윤이 물었다.


“차 안에서 글러브박스 열다가… 뒤에서 받쳤어. 머리를 세게 부딪혔어.”


“뇌진탕 같은데.” 지수가 단정하듯 말했다. “내 차로 가자. 병원부터 가야 해. 도윤, 견인차는 네가 처리해. 차는 내가 맡아줄게. 예린, 키는 도윤한테 줘.”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알던 지수는 날 비웃고 상처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도윤은 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망설임, 혹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 하지만 수아를 두고 올 수는 없으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에서 키를 받아갔다.



월, 화, 수,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