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자국

넘어짐을 허용하는 치유의 리듬

by 나리솔


균형의 자국



사람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팽팽히 놓인 한 가닥의 밧줄과 같다.

이 말에는 비난이 없다. 오히려 이해가 있다. 사람은 어느 한쪽 편으로만 기울어져야 할 의무가 없다. 순수한 본능만으로 살아가도 안 되고, 완전한 이상만을 향해 달려가야 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균형을 잡는다. 흔들린다. 실수한다. 무너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우리 모두 안에는 동물적 기제가 살아 있다 — 두려움, 욕구, 생존에 대한 본능, 받아들여지려는 갈망, 홀로 남지 않으려는 요청. 그것은 위협이 닥치거나 피곤하거나 아플 때 깨어난다. 우리가 방어할 때, 질투할 때, 숨거나 공격할 때, 그 본성은 모습을 드러낸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다. 한때 우리를 지켜준 것, 생존을 가능하게 해 준 힘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위로 향하는 다른 지향성도 있다 — 의미를 찾으려는 갈망, 극복하려는 의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열망. 그것은 용서하게 만들고,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선택하게 하며, 쉽게 마음을 닫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친절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다. 이 위로의 움직임은 초인으로 향하는 노력이다 — 완벽함이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초인이다.

두 극 사이에 밧줄이 걸려 있다. 우리는 그 위를 매일 걸어간다.

어떤 날은 발걸음이 단단하다. 어떤 날은 떨린다. 때로는 추락한다 — 두려움 속으로, 약함 속으로, 오래된 반응으로 돌아간다. 그런 순간에는 마치 뒤로 물러난 것처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무너짐은 여정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여정의 일부이다.

사람은 항상 위로만 올라가야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이지 프로젝트가 아니다. 강함은 본능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다. 강함은 그 소리를 듣고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있다. 그걸 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치유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을 멈출 때 시작된다. “그래, 내 안에는 혼돈이 있다. 그래, 나는 두렵다. 그래, 나는 지쳤다.”라고 인정하는 순간이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걷고 있다.” 천천히라도, 멈추었다가도, 짧은 숨을 고르며라도.

여기서 초인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초인이라 함은 왜 다시 일어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고통을 이해로, 두려움을 주의로, 약함을 다른 이에 대한 연민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가진 초능력은 완전함이 아니라 방향감이다 —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용기다.

우리는 모두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그 균형 속에는 수치가 없다. 용기가 있다. 인간다움이 있다. 움직임이 있다.

오늘 밧줄이 흔들리고, 발걸음이 불안정하다면 —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였고 누구로 되어가고 있는지 사이를 오가는 길이다.

당신은 초인이 될 의무가 없다.
그저 걷는 자이면 충분하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걷는다는 행위는 단지 앞으로의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멈추어 숨 쉬고, 뒤를 돌아 자신의 흔적을 살피고, 때로는 옆으로 비껴 서서 바람을 느끼는 것 또한 걷기의 일부이다. 그 모든 순간이 삶의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 안에서 우리가 조금씩 달라진다. 완전함을 향한 압박을 멈추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너그러워질 수 있고, 다른 이들의 흔들림에도 더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

오늘의 흔들림도 그저 지나갈 하나의 발걸음이다. 천천히이든,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하든, 그 모든 걸음이 당신이 가는 길임을 기억하시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진실과 환상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