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약서

12- 화 네 송이의 쓸모없는 꽃다발

by 나리솔


12- 화 네 송이의 쓸모없는 꽃다발


2024년 4월 26일, 인천 HK 사무실

점심을 동료들과 마치고 돌아온 소연은 지훈의 사무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처럼 그는 식사도, 간식도 하지 않았을 것이 뻔했기에, 소연은 건강식을 주문해 그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태블릿도 두고 간 것이다. ‘늘 붙어 다니는 보조 도구’ 없이 어디를 다니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소연은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기는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울렸다. 그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황지훈 씨!”
소연이 소리 내어 불평하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지훈이 문틀에 느긋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뭐 잃어버린 거 있어, 꼬마야?”
그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며 놀리듯 말했다.

소연은 그의 건방진 모습에 짙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 잃어버렸죠.”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그가 방금 자신을 부른 호칭은 무시했다.
“제 상사요. 키 작고 투덜거리는 남자분을 못 보셨나요?” 그녀도 맞받아치며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늘 휴대폰을 놓치지 않는다더니, 제가 필요할 때 언제든 찾으라 하지 않으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지훈은 짙은 회색 바지에 검은 블레이저, 그리고 칼라 없는 검은 셔츠 차림이었다. 목덜미 아래로 드러난 희고 가느다란 쇄골이 눈에 띄었다. 소연은 그와 대조적으로 흰색 블라우스에 목을 감싼 커다란 리본, 그리고 하늘빛의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지훈의 미소가 더 넓어진다.
“아, 그 잔소리꾼 말이지.” 그는 일부러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키가 작지는 않은데?”
“전 ‘작다’고 했지 ‘난쟁이’라고는 안 했거든요.”

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식탁 위에 놓인 샐러드와 커피 잔을 흘끗 보았다.
“이건 뭐야?”
“점심이요.” 소연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어머님께서 식습관 관리 잘 하라고 부탁하셨잖아요.”

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넌 내 엄마가 아니잖아. 넌 내…”
“비서입니다.” 소연이 단호하게 끊었다.
“부지런한 비서는 자기 상사가 제때 밥을 먹고, 책상 서랍에 몰래 숨겨둔 칩스 말고는 안 먹도록 관리해야 하거든요.”

지훈은 저도 모르게 눈길을 위쪽 서랍으로 내렸다. 과자, 쿠키, 견과류 같은 군것질거리를 가득 숨겨둔 곳이었다. 소연은 며칠에 한 번꼴로 그 껍질이나 부스러기를 그의 책상 밑에서 발견하곤 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옥상에 다녀왔어.”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였다.

소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끔은 그냥 쉬고 싶을 때도 있지. 게다가 네가 나 못 찾아서 당황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더라고.”

쉬다니, 사실은 담배를 피운 게 분명했다. 그의 몸에서 또다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대체 언제쯤 이 건강 망치는 습관을 끊을 건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순간 팔꿈치가 미끄러져 어색하게 바로잡았다. 이번엔 본인도 민망한 듯했다.

소연은 눈을 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못 말려.’
“어쨌든,” 그녀가 그의 태블릿을 내밀며 말했다, “25분 뒤 주주 회의가 있습니다. 모시러 온 거예요.”

지훈이 태블릿을 받아들며 손끝이 소연의 손가락에 스쳤다.
“언제나 일에만 충실한 꼬마 비서네.”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아, 안내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먼저 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소연은 제자리에 버티며 말했다.
“먼저 식사하세요. 아직 점심시간 남았어요.”

그녀는 발뒤꿈치를 돌려 사무실을 나갔고, 그 뒤에서 지훈의 미소는 한층 깊어졌다.

그가 빈 샐러드 박스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사무실을 나올 때, 소연은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치마를 고쳐 입고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다.

엘리베이터 안. 지훈은 그녀 뒤에 서 있었고,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머리를 귀 뒤로 넘겼지만, 몇 가닥은 창백한 이마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비 중인 ‘한 그룹’과의 거래 탓인지, 또다시 잠을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아, 아까 어머님이 전화하셨어요.” 소연이 말했다.
“언제 부모님 댁에 같이 오냐고 묻더군요. 내년쯤이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녀가 빈정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지훈은 눈을 굴렸다. 자기 역시 집요한 어머니가 달갑지 않았지만, 동의하지 않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년? 꽤 낙관적이네, 장소연.”

소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흘겨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그럴듯한 핑계라도 생각해 보시죠. 제가 대신 정중히 거절할 수 있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소연이 먼저 나섰다.

그때 그의 말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동의하는 게 좋을 거야.”
소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농담하신 거예요? 그럼 우리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내 기억으론, 우리 부모님 앞에서는 행복한 부부 행세를 하기로 했잖아.” 그는 거만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약속은 지켜, 장소연.”

소연은 무대 앞으로 그를 안내하며 이번 분기의 자료를 정리해 연단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주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훈에게 쏠렸다. 그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발표를 이어갔다. 정확한 수치와 차분한 어조, 그리고 단호한 결론. 누구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 옆에서 서류를 건네며 도와주는 소연은 순간적으로 그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동시에 느꼈다.

회의가 끝난 뒤, 한 주주가 소연의 손에 무언가를 건넸다. 하얀 난꽃이 곱게 담긴 꽃다발이었다.
“늘 성실하게 도와주는 비서 양에게.”

소연은 당황스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회의장을 나서는 길, 또 다른 주주가 분홍빛 장미 다발을 내밀었고, 이어서 노란 튤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라색 프리지어.

손에 안기는 꽃다발이 네 송이나 되자, 소연은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품에 안은 꽃을 바라보다가, 결국 짧게 한마디 던졌다.
“쓸모없는 짓거리들.”

소연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꽃 같은 건 금방 시들잖아.” 지훈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실속 없는 선물이지.”

소연은 잠시 말이 막혔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마음이 담긴 선물이잖아요. 어떤 사람에겐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죠.”

그녀는 꽃다발을 소중히 안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지훈의 시선이 따라왔다. 차갑게 던진 말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누구에게 진짜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그 기억이, 지금 그녀 품에 가득 안긴 꽃들과 겹쳐졌다.

지훈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잔잔히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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