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약서

13 - 화 차라리 거절하고 싶은 제안

by 나리솔


13 - 화 차라리 거절하고 싶은 제안


2024년 4월 28일, 인천 ‘다운업 컴퍼니’ 사무실

지훈은 김민석의 사무실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운업 컴퍼니’는 작은 IT 개발 회사였고, 그 아버지 김무온은 과거 황시원의 파트너였다. 하지만 지훈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자마자, 김무온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 지훈의 의지로 배제되었다며 막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지훈은 반년 가까이 영향력 분할 협상을 정리해야 했고, 그 뒤로 김무온은 물론 그의 아들이자 회사를 물려받은 김민석과의 관계도 극도로 껄끄러워졌다. 무엇보다 ‘HK’를 경쟁 상대로 여기며 도전하는 김민석의 집착은 지훈에게는 한심하고, 그에게는 끝없는 오만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콧등을 문지르며 혀를 차고 물었다.
“굳이 날 불러낸 이유가 뭐지? 네 질문은 월요일까지 기다리지 못할 만큼 급한 거야, 민석?”

김민석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여유로운 듯 웃었다.
“급한 건 맞지. 하지만 널 불편하게 만들 일은 아닐 거야. 오히려 흥미로운 제안이지.”

지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늘어졌다.
“흥미롭다고?”

민석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네 비서, 장소연 말이야. 그녀를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하고 싶어.”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눈가에 미세한 떨림이 스쳐갔지만, 금세 굳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 봐.”

“장소연.” 민석은 느긋하게 반복했다.
“너한테는 수많은 직원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한 인재야. 그녀의 기획 능력, 정리력, 그리고 성실함은 이미 유명하지 않나? 네가 데리고 있기엔 아깝지.”

지훈은 의자 팔걸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너… 선을 넘는구나.”

민석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비즈니스잖아. 게다가 그녀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줄 수도 있어. 월급도 두 배, 자율 근무제도 제공하고. 그녀가 원한다면 해외 프로젝트에도 참여시킬 수 있지.”

지훈은 속으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민석의 말이 단순한挑発(도발)인지, 진짜 제안인지 구분하기조차 싫었다. 다만 분명한 건, 장소연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함부로 오르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사람이다.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마.”

민석의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입술 옆으로 서늘한 긴장감이 드러났다.
“그래? 그럼 지켜보지. 누가 더 설득력이 있는지.”

사무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지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단단히 다문 입술과 매서운 눈빛만이 그의 의지를 대신했다.

민석은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의자를 뒤로 젖히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그렇게까지 과민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언젠가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보게 될 거야.”

지훈은 의자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협박이라면 수준 낮군.”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다.
“그리고 기억해 둬. 장소연은 네가 건드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문을 열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지자, 남겨진 민석의 눈매에 서늘한 집착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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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온 지훈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팔걸이를 움켜쥐던 순간,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민석의 말에 담긴 불순한 의도를 간파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장소연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화면 위에 저장된 ‘장소연’의 이름이 떠올라, 잠시 멈춰 서게 만들었다. 전화를 걸까, 아니면 메시지를 보낼까.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화면을 꺼버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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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HK 사무실.
소연은 책상 위에 놓인 네 개의 꽃다발을 차례로 정리하다가, 괜스레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걸 어디다 두라는 거야…”

동료 직원들이 장난스럽게 놀리자,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오늘따라 지훈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의 눈빛, 짧지만 의미심장했던 말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림자가 깃든 표정까지.

소연은 고개를 흔들며 서류를 챙겼다.
‘괜히 신경 쓰지 말자. 이건 그냥 일일 뿐이야.’

그러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파문이 끊임없이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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