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화 관계의 새로운 버전
2024년 5월 10일, 인천 ‘HK’ 사무실
소연은 아침부터 서울 본사의 ‘한 그룹’ 비서실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HK와 소규모 사업 합병 계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한 그룹’ 대표의 비서는 어제부터 전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긴장했다. 처음부터 이 계약은 수상쩍었다. 그러나 황지훈에게는 ‘한 그룹’ 공장에서 생산되는 칩이 꼭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지점을 서울 대기업의 지점과 합병하는 타협안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정확히 말하면, 합병이 아니라 사실상 ‘흡수’였다.
계약 관련 문서는 이미 오래전 준비되어 있었고, 예비 계약서도 지훈이 서명해 ‘한 그룹’ 사무실로 보냈다. 그런데 지금, 상대 측은 HK를 무시하며 답을 끊었다.
소연은 대표 비서가 연락을 피하자, 결국 회사 대표의 개인 연락처를 찾으려 발로 뛰었다. 그러나 결과는 없었다.
이틀째가 되자 그녀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머리는 멍했고, 동료들의 질문에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 소동이 잠시나마 그녀를 개인적인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황지훈에 대한 고민.
생일날 이후 —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던 그날 — 지훈은 소연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그는 소연이 자기 몰래 지욱과 연락한 것을 두고 호되게 나무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불쑥 말했다.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다.”
그 말은 소연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훈은 차에서 뛰어나온 불고기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강아지는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소연은 그 후로도, 지훈이 늘 무심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투덜대고, 불평하고, 사소한 것까지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작은 부분까지 기억하고 챙겨주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라는 말은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건 일일 뿐이야. 감정을 섞으면 안 돼.’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지만, 지난 며칠 동안 지훈이 보여준 낯선 태도가 자꾸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말투, 불시에 드러나는 따뜻함, 그리고 모순된 눈빛.
소연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또 응답은 없었다.
‘이 계약은 정상이 아니야.’
그녀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두 밤을 새운 피로가 온몸에 쌓였다.
동료들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소연 씨, 괜찮아요?”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하지만 속으로는, 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차가운 말투,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그 속에 잠깐 비쳤던 따뜻함까지.
다음 날 아침, 지훈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는 소연의 책상 위 자료 더미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또 밤새웠나 보지.”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들렸지만, 묘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소연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대표님 계약 건 때문에요. 상대 측이 계속 연락을 피하고 있습니다.”
지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다.”
소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제 책임입니다. 비서로서.”
지훈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무리하지 마.”
그 말은 소연의 가슴 속을 흔들었다.
그날 오후, 또다시 연락은 닿지 않았다.
‘이건 분명 고의야. 우리를 무시하고 있어.’
소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침에 지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리하지 마.”
그 말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며 계속 울렸다.
다음 날, 회의실. 지훈은 임원들을 모아 직접 보고를 받았다.
“상대 측이 계속 연락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협상 자체를 미루려는 의도 같습니다.”
임원의 보고에 지훈은 차갑게 눈을 좁혔다.
“우릴 무시한다는 거군.”
그는 짧게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 방식대로 대응하지.”
소연은 그의 옆에서 기록을 하며,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표정을 느꼈다.
회의가 끝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강하게 나가셔도 괜찮을까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장소연. 세상은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아. 원하는 걸 얻으려면 더 강하게 나가야 해.”
그의 단호한 말은 그녀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옳은 걸까, 아니면 그저 또 다른 벽을 세우는 걸까.
그날 오후, 소연은 다시 전화기를 붙잡았다. 그러나 대답은 같았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왜 하필 지금…’
회사 문제, 계약 지연, 그리고… 황지훈.
그녀는 다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냉철하게 지시를 내리던 얼굴, 때로는 피곤에 젖은 모습, 그리고 드물게 드러나는 따뜻한 눈빛.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 무렵, 지훈이 직접 그녀 자리로 왔다.
“아직도 붙잡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소연은 몸을 일으켰다.
“네. 하지만 진전이 없습니다.”
지훈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직접 처리하지. 더 이상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이건 제 책임입니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책임이라니. 그쪽에서 시간을 끄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두 밤을 새운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네가 이렇게까지 지쳐 있는 게 싫다.”
소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의 차가운 얼굴 뒤에서 들려온 진심 같은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