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약서

15 - 화 시즌 중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by 나리솔

15 - 화 시즌 중반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2024년 5월 12일, 인천 그랜드 파크

사실 소연은 오늘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이태섬이 부탁한 일에 참여할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일요일 하루 종일 방 침대에 누워, 햇살이 천장을 대각선으로 스치며 책상 위를 지나고, 화장품과 향수 병들로 어지럽게 뒤덮인 서랍장을 건너, 마침내 문까지 내려오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계획이었다.

그 문에는 그녀가 한때 음악 그룹에 빠져 살며, 머리색이 화려하고 환하게 웃는 소년들 포스터로 벽을 도배하던 흔적 — 테이프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태섬이 음악 페스티벌 티켓을 구해왔고, 소연은 그와 데이트를 하겠다고 얼떨결에 약속했기에, 결국 억지로 집을 나서야 했다.

태섬은 회사 사람들 중 소연이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인물이었다.
둘은 같은 날, 우연히 잘못된 지원 부서로 면접을 보러 들어갔다가 함께 채용된 사이였다.

태섬은 원래 임원실 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면접 과정에서 실수가 겹쳐 결국 다른 부서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의외의 성실함과 붙임성으로 자리 잡으며, 어느새 회사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소연에게 그는 늘 편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함께 입사한 동기라는 점에서, 또 서로의 어설픈 시작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보다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태섬이 건넨 페스티벌 티켓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무심코 웃으며 “같이 가자”라고 말했을 때, 소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그녀는 괜히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집에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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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현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대 앞에서는 젊은 관객들이 함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고, 주변에는 음식과 굿즈를 파는 부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소연은 잠시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흥겨워해야 할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그저 낯설고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소연아, 이쪽이야!”
태섬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소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표정이 왜 그래? 재미없어 보여.”
“아니야… 그냥 아직 분위기에 적응이 안 돼서.”

태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손에 페스티벌 팔찌를 채워 주었다.
“괜찮아. 곧 익숙해질 거야. 오늘은 즐기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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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했고, 관객들은 리듬에 맞춰 환호성을 질렀다.
베이스가 울릴 때마다 공기가 진동했고, 소연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귀를 가렸다.

태섬이 그녀를 흘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시끄럽지? 그래도 이게 현장 분위기의 묘미야.”

소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음악보다 사람들의 열기와 소란스러움이 더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여름의 햇빛은 강했고, 바람은 따뜻했다.
마치 모든 것이 생동하는 듯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그녀 혼자만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태섬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컵을 내밀었다.
“이거 마셔. 조금 시원해질 거야.”

소연은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이 목을 스치며 잠시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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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잠시 쉬어가는 사이, 태섬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연을 데리고 한쪽 벤치로 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웃었다.

“우리 입사할 때 기억나? 둘 다 엉뚱한 부서에 들어가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소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어. 잘못 온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잖아.”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 됐잖아. 네가 없었으면 아마 나 오래 못 버텼을 거야.”

태섬의 진심 어린 말에, 소연은 순간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그저 편한 동료,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 생각했는데… 태섬의 눈빛은 그 이상을 담고 있는 듯했다.

“소연아.”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불렀다.
“혹시… 오늘 온 게 후회돼?”

소연은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아니… 그냥 좀 낯설어서 그래. 사실은… 고마워. 이런 데 데려와 줘서.”

태섬의 얼굴에 안도하는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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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다시 음악이 울려 퍼졌지만,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고요가 흘렀다.
태섬은 손에 든 종이컵을 천천히 굴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

소연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뭔데?”

“넌 늘 열심히 하고, 누구보다 성실하잖아. 그런데도 가끔은 너무 혼자 버티는 것 같아서… 옆에서 보는 내가 답답할 때가 많았어.”

소연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나 격려가 아니라, 오래 지켜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진심 같았다.

태섬은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난, 네가 단순한 동료 이상이었으면 좋겠어.”

소연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태섬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정직했고, 그 따뜻함은 그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만큼 진지했다.

그녀는 무언가 대답해야 할 것 같았지만, 목이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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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은 순간 얼어붙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태섬의 고백이 귀에 맴돌았지만,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다.

‘동료 이상이라니… 나는 태섬을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태섬아…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줘서.”

그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명확하게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애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태섬은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갑자기 말해서 놀랐을 거야.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줬으면 해.”

그는 다시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어쩐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소연은 손에 쥔 종이컵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는 태섬의 얼굴과 함께, 또 다른 얼굴이 끊임없이 겹쳐졌다.

황지훈.

그 이름이 떠오르자, 그녀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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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 무렵, 페스티벌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대 위 조명은 눈부시게 번쩍였고, 관객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소연은 그 소란 속에서도 어쩐지 외로움을 느꼈다.
옆에서 태섬이 즐겁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메시지 목록 가장 위에 떠 있는 이름 — 황지훈.

그 이름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하필 지금…’

태섬은 옆에서 환한 미소로 말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 소연아. 너랑 같이 있어서 진짜 즐거웠어.”

소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마워.”

하지만 그 순간조차, 머릿속에는 지훈의 차가운 목소리와, 가끔 스쳐 지나가던 따뜻한 눈빛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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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끝나자, 인천의 밤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소연은 태섬과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집까지 잘 들어가.”
태섬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일은 푹 쉬고.”

소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었다.
“응, 고마워. 너도 조심히 들어가.”

버스가 도착하자, 그녀는 서둘러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손에 쥔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화면에 여전히 떠 있는 이름, 황지훈.

몇 번이고 메시지를 쓰려다 지웠다.
“대표님, 오늘은…”
“대표님, 혹시…”

결국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한 채, 휴대폰을 끄고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마치 그녀 마음속의 혼란처럼,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왜 나는…’

소연은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에게도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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