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목소리를 담아내기엔, 아직 제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1년 전, 한 여성을 인터뷰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자리였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는 제게 ‘엄마’ 같았습니다.
그녀의 삶을 듣는 동안 저는 수없이 울었고, 마치 제 가족의 이야기처럼 마음 깊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그리고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견디며 살아낸 세월이었습니다.
저는 그 삶을 글로 옮기며, 단순한 인터뷰가 아닌, 한 세대 여성들의 숨겨진 목소리를 듣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직 책으로 세상에 내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가 직접 살아낸 그 눈물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혼자 간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브런치를 통해 그 목소리의 일부와, 제가 글을 쓰며 느꼈던 제 마음의 떨림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불빛이 되기를, 긴 밤을 버티는 누군가에게는 손을 내미는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시절, 우리는 버티며 존재했다
살아내는 법, 버텨내는 법, 다시 시작하는 법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살다 보면 다 그런 일 있다고.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매일 새벽, 깨어난 순간부터 다시 이어붙여야 하는 하루가 어떤 건지.
숨을 쉰다는 것조차 감당처럼 느껴지는 무게가 어떤 건지.
나는 그 시간을 통과했다.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여자로, 그리고 결국은 나 자신으로.
수없이 무너지고, 굴욕을 삼키고, 꿈도, 말도, 마음도 꾹꾹 눌러가며.
내 이름은 조영례.
1960년에 태어나, 시대의 굴레 속에서 여자로 살아야 했던 사람.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상처만 받았고,
무언가 되고 싶었지만 늘 타인의 이름으로 불려야 했다.
이 책은 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단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의 수많은 여자들, 엄마들, 며느리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살아온 모든 ‘조영례’들의 이야기다.
사는 게 버거운 당신,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당신,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안고 사는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살아내는 법은 완벽함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걸.
버텨내는 힘은 강한 마음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일어나는 용기라는 걸.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건 새로운 내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잃어버렸던 나를 천천히 되찾는 일이라는 걸.
이 글이 누군가의 긴 밤 끝에 조용히 켜지는 작은 불빛이 되기를.
울음을 삼키던 누군가의 가슴에 조용히 놓이는 손바닥이 되기를.
이제, 조영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광의 강가에서
1960년대 초, 전라남도 영광이라는 작은 마을.
들판은 넓고,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으며, 사람들의 인사는 늘 정겹고 따뜻했다.
영광은 해가 질 때 가장 아름다웠다. 붉게 물든 논길 끝으로 바람이 지나고, 아이들은 맨발로 풀밭을 뛰어다녔다.
조영례는 그곳에서 태어나, 열세 살까지 자랐다.
그 시절, 그녀의 삶은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매일 새벽이면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거나, 솥에 밥을 안치고 김치를 꺼내 식구들의 아침상을 준비했다.
그녀는 2남 4녀 중 세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어머니를 도와 가족을 위해 끼니를 준비하며 자랐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논밭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위해 수건을 데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고생'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고, 영례는 그런 하루하루가 익숙했다.
학교에서는 글씨를 배우고, 친구들과 종이접기를 하며 깔깔 웃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여름, 그녀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앞으로 뭘 할까? 아니, 그저 매일 밥하고 웃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녀에게 미래는 아직 막연했고, 무겁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어머니가 웃어주면 그걸로 충분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열세 살, 삶은 그녀를 갑자기 다른 강으로 이끌었다.
멈춰버린 배움, 그리고 서울
초등학교를 다니며 산과 들을 누비던 영례는 어린 마음에 공부에 흥미를 가졌고, 졸업 후에는 꼭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절 영광의 산골에서 여학생이 중학교에 진학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아니, 마을 안에서는 단 한 명도 그런 사례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영례의 꿈은 그렇게 꺾였다. 그녀는 공부 대신 가정의 손이 되었다.
그러다 소개로 서울에 있는 어느 집으로 보내지게 된다.
아들 셋을 둔 큰 회사에 다니는 집. 영례는 그 집에 들어가 초등학생의 등하교를 챙기는 일, 그리고 집안일을 도왔다.
그들은 2년만 함께 지내면 삼영전자에 취직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당시 영례는 월급으로 4천 원을 받았다. 지금 기준으로 약 20만 원 정도의 값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녀는 익숙해졌고 조용히 약속된 시간을 견뎠다.
하지만 8개월쯤 지난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시골에서 자라 몸이 날렵했고, 몇 번 문이 잠겼을 때 지붕을 넘어 들어가 문을 열어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증거도 없이 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에게 연락이 갔다.
아버지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고, 영례는 가발공장의 기숙사로 옮겨졌다.
그녀는 그곳에서 20살이 될 때까지, 기숙사에서 공장 생활을 이어갔다.
공장과 꿈, 그리고 첫사랑의 그림자
가발공장에는 약 600명의 여공들이 있었고, 영례는 그중에서도 손이 가장 빠른 사람이었다.
보통 한 달 월급이 3만 원이던 시절, 그녀는 6~7만 원을 벌었고, 그 돈은 대부분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수백만 원이라는 돈이 고향으로 흘러들어갔다.
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영례는 군인과 펜팔을 하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은 하사였고, 직접 찾아와 결혼을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그녀는 아직 배우고 싶었고, 결혼을 이야기하는 남자들과는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러던 중, 같은 기숙사에 살던 여자 동료가 밖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동료의 오빠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 오빠는 처음부터 결혼을 원했고, 영례는 또다시 마음을 닫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과 함께, 거의 마지막이라는 말에 속아 집으로 불려갔고,
그날 이후 그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강제적인 상황 속에서 첫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결혼이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이 이야기는 이제 어머니가 '아내'이자 '어른'으로 변화해 가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는 그녀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다.
반쯤은 운명, 반쯤은 속임수
1977년대 후반, 조영례의 인생은 아무 예고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 시작은 그저 평범한 어느 날, 친구 오빠와 점심을 먹으러 간 일이었다.
당시 영례는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학교 급식을 먹고 있었다. 습기 찬 트레이에 얹힌 밍밍한 국과 묽은 밥. 맛은커녕 따뜻함조차 없는 식사였다. 그런데 그날, 외부 식당에서 먹은 밥은 달랐다.
짭조름한 된장찌개에 잘 구워진 고기 한 점. 입안에서 살살 녹는 감칠맛에 정신을 놓고, 영례는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나서도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결국 두 공기를 먹고 말았다.
식사는 맛있었고, 분위기는 가벼웠다.
친구의 오빠는 영례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지만, 그날의 대화엔 어색함이 없었다. 그냥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돌아왔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그는 그저 친구의 오빠였고, 영례에겐 그 어떤 이성적인 감정도 없었다. 다만 식당 밥이 너무 맛있었다. 그것이 기억에 남았을 뿐.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남자는 자꾸만 영례를 만나러 왔다.
차를 마시자고, 영화 보자고, 산책하자고.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영례는 단호히 거절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 뒤로, 그녀는 그를 더 이상 만나주지 않았다.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의 길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놀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영례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남자 밑에서 일하던 직원이 ‘마지막 부탁’이라며 만들어낸 연극이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영례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로부터 세 달 후.
영례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고, 운명인지 속임수인지 모를 결합 속에서 조용히 가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떠나고 싶었던 집, 떠날 수 없었던 나
결혼 후, 나는 시어머니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은 생활력이 없었다.
군 입대도 늦어져 1년을 어영부영 보내고, 결국 1980년에 군에 가게 되었다.
그해 12월, 우리 첫 아들이 태어났다.
마침 그 해는 광주의 5.18이 있었던 해였고, 남편은 그 당시 31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곧 방위병으로 전환되어 집과 가까운 곳에서 복무하게 되었지만, 그의 무능은 여전했다.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시댁은 형편이 안 되고, 시부모님은 늘 돈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시어머니는 아예 농사나 조금 지으며 시골에서 겨우 버티는 정도였고, 나는 친정에 한 번씩 손 벌리러 가는 처지가 되었다.
밥상엔 김치 하나뿐인 날이 부지기수였고, 마음속에선 매일같이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같았으면 도망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어렸고, 이 삶이 그냥 ‘사람 사는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참고 살았다.
아이가 두 살이 되었을 무렵, 남편은 일본에 가게 되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일본에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따라간 것이었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꽤 큰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집안 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시골에서, 시댁의 그늘 아래서 일하고 또 일하며 버텼다.
그러다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그 계기로 삶이 잠시 바뀌었다.
둘째가 생기자, 남편은 시골에서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했다.
결국 시댁에서 논을 팔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살이는 약 2~3년 정도였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무능했고, 돈이 생겨도 순식간에 써버렸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겨우 버텼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공장 근처에 와서 게으름을 피웠다 하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시골에 맡기고, 나 혼자 나가서 살아보려고 집을 내놓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가 눈치를 챘다.
내가 아이들만 두고 나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즈음, 또 다른 일이 터졌다.
둘째 아이가 집에서 불을 내버렸다.
불은 크게 번졌고, 그 이후 몇 달이 지난 뒤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제야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나가지 못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1년쯤 뒤였다.
그 아기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아이
아기를 잃은 날, 조영례는 처음으로 절을 찾았다. 작은 불상 앞에 앉아 엉엉 울었다. 그 아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스님을 집으로 모셔와 향을 피우고,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좋은 데로 가게 해주세요. 제발…”
하지만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좋은 데 갈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조상 업보에 끌려간 거예요.”
조영례는 얼떨떨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원래 죽을 운명이 아니었고, 누군가의 업보 때문에 데려가진 것이었다. 스님은 한 손에 대나무를 들고 땅을 짚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고, 숨이 멎을 듯한 침묵 속에서 그는 나직이 말했다.
“조상 중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아이를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하네요.”
그날 밤, 조영례는 잠들지 못했다. 남편은 이미 정관수술을 한 몸이었다. 그런데도 스님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문을 다시 열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한 달 후, 남편은 수술을 되돌리는 시도를 했고, 믿기지 않게도 그 달에 다시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아이가 죽은 날은 4월 5일이었다. 화장을 하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화장장이 쉬는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장의사는 평동 근처 야산을 찾아 묘를 만들었다. 시어머니는 함께 그 자리를 지키며, 밤새 태몽을 꿨다고 했다. “아가가 흰 옷을 입고 웃으며 다가왔어. 무슨 꽃밭 같았어.”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그 아이는 같은 날, 4월 4일에 다시 태어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병원도 같았고, 진통의 시간도 비슷했다. 뱃속에서 차가운 손길 같은 것을 느낀 것도 같았다. 그 아이는 첫 아이처럼 생겼고, 울음소리도 비슷했다. 조영례는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온 아이’라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 않았다.
출산 후 퇴원한 지 일주일 만에, 아이는 머리를 다쳤다. 피 한 방울 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아이가 누워 있던 자리에 마치 무릎처럼 솟아오른 주먹만 한 혹이 생겼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영례는 그렇게 두 번이나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니, 같은 아이를… 두 번.
한 생(生)이 아니라, 두 생을 품었던 것만 같았다. 조상과 스님, 예언처럼 들리던 말들, 현실에선 믿을 수 없는 고통과 반복.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 절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새벽녘 바람에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그 아이는 짧은 생이 아니었어요. 그 아이는... 조영례 당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왔던 거죠.”
사는 게 무서웠던 날들
모유를 먹이던 아기가 어느덧 돌을 지나고 있었다. 조영례는 아이를 안은 채로 작은 트럭에 짐을 실어 장사를 다녔다. 살림이란 게 마음만으론 되지 않았다. 수입이 있어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남편은 그때 운전 중이었다. 그날도 장사 끝에 돌아오는 길, 예상치 못한 사고가 벌어졌다.
“교통사고 났어요.”
그 말 한마디에 조영례의 세상은 또다시 무너졌다. 보험이 들어있지 않아, 남편은 구속되었고, 면회를 가기 위해 젖먹이를 안은 채 교도소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합의를 보지 않으면 남편은 풀려날 수 없었다. 하지만 연락조차 닿지 않는 상대. 돈은 계속 빠져나가고, 희망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때 또 한 번, 그녀는 절을 찾았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요?”
“며칠 후면 올 겁니다. 그날이 되면… 풀려나올 수 있어요.”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 날 정확히 연락이 닿았고, 점쟁이가 말한 날짜에 남편은 석방되었다. 기이한 현실이, 오히려 삶을 더 무섭게 만들었다.
“사는 것 자체가 두려웠어요.”
조영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고 있지 않았다. 단지 ‘이 집’이 굴러가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을 계속해서 희생하며 살아갔다. 합의금으로 집안 살림은 텅 비었고, 생계를 꾸려갈 방법도 없었다.
시골에서 장사를 하며 버텼지만, 일하는 사람은 없고 식구는 많았다. 사남매, 시누이들, 시아제까지. 모두 그녀의 손을 필요로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솟았지만, 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 “결혼하고 종갓집으로 들어간 것도 모르고 갔어요. 그냥… 산 너머 산이었어요. 좋은 날이 없었어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놀라지만, 조영례에게는 일상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았다. 기쁨도, 꿈도, 오롯이 ‘나’라는 존재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던 그날 이후, 다시 품에 안긴 생명을, 조영례는 지켜내야 했다. 가슴을 물고, 품에 안고, 길을 걷고, 장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내내 후회가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 “정말 정성껏 안아주고 키웠어야 했는데… 그걸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미안해요.”
그 말은 한 어머니의 참회였다. 가난도, 슬픔도, 억울함도 많았지만, 결국 남는 건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날들. 누구도 대신 걸어주지 못할 그 고단한 길을, 그녀는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냈다.
어머니 명언 :
“그 시절엔 ‘너는 무엇을 원하니?’라는 질문은 없었어. ‘이 사람이 네 남편이야. 이 집이 네 가족이야. 살아.’ 그냥 그렇게 사는 거였지.”
---
> “우리는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 대신 참는 법, 견디는 법만 배웠지.”
---
> “내 행복이 뭐였는지 알아? 모두가 잠든 밤. 아무도 울지 않는 순간. 냄비에서 국물이 자작자작 끓는 소리. 아이가 숨 쉬는 것, 남편이 교도소에 없는 것. 그게 전부였어.”
---
> “내가 조금만 이기적이었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아이들은 배고팠을 거야. 그건 절대 안 됐지.”
---
> “60년대엔 입 다무는 법을 배웠고, 70년대엔 참고 사는 법을 배웠어. 80년대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미덕이었지. 우리는 삶을 살아낸 게 아니라, 버티며 존재한 거야.”
---
> “집에 돈이 없으면, 시간도 없어. 하루하루가 생존이고, 숨 쉬는 것조차 일인 날들이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누군지조차 잊게 돼. 아내인지, 엄마인지, 여자였는지. 그냥… 끌고 가는 몸뚱이 하나일 뿐.”
---
>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해. 하지만 나는 ‘시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우리는 선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 따르는 법만 배웠지.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따르고 싶지 않아.”
---
> “나는 멈추는 법을 몰랐어. 그저 걸었어. 뒤에 아이들이 있었고, 뒤돌아갈 길이 없었으니까.”
멈춰선 길 위에서
세상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할 고통이 있다.
조영례는 그 고통의 이름을 ‘삶’이라 불렀다.
시골 장터에서 남편과 함께 장사를 하던 어느 날, 남편은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냈다. 단순한 접촉 사고가 아니었다. 사람을 다치게 한, 그야말로 인사사고였다. 문제는 보험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 결국 그는 구속되었다.
합의를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데, 피해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딸은 멀리 떨어져 살았고, 사람을 수소문해도 찾을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있었는데,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조영례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전에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 남편이 다칠 운명을 대신한 거다.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주고 합의를 봐라.”
스님의 말은 무겁고 명확했다. 그리고 정말 그 날짜에 피해자 측에서 연락이 왔다. 결국 거액을 들여 어렵게 합의를 이뤄냈다. 현재 가치로 치면 수천만 원이었다. 막바지에는 상대 측에서 150만 원을 더 요구했고, 그 돈조차 없었던 조영례는 절망에 빠졌다.
그 무렵 조영례는 갓난아기를 모유로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인지, 모유가 나오지 않았다. 젖도 못 물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고된 길을 다니며 면회를 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오가며, 그녀는 스스로를 되뇌었다.
‘이게 내 인생인가…’
모든 게 무너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조영례는 하루하루 버텨냈다. 남편은 결국 합의로 풀려났고,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정신적인 불안 증세가 있었고, 동네 점쟁이에게 마금을 받기도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시어머니와는 같이 살지 말라고 했잖아. 같이만 살면 왜 그렇게 일이 터지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반복됐다. 조영례는 그저 앞만 보며 살았다. 시골 장터에서 하루하루 장사를 하며 몇 년을 버텼다. 아기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시골에서 학교를 보내는 것이 두려워 도시로 나왔다.
운 좋게도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이 있어 조금씩 팔며 임대아파트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버거웠다. 사람들은 말했다.
“조상 기운이 세서 일이 생기면 다 날린다. 노는 게 버는 거다.”
그래도 도시에 나와 가게를 다시 열었다. 남편은 택시 운전을 시작했지만, 성실하게 돈을 벌지는 못했다. 도망다니고, 거짓말을 일삼고, 결국 모든 재산은 사라졌다. IMF 때 모든 것을 잃고, 다시 길거리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초반,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몸을 웅크렸다.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위해 거리로 나갔다. 아침 10시부터 정오까지 장사를 하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
회상 —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은 내 남편이었다.
같이 아이를 낳고, 함께 살았고, 같은 하늘 아래 잠을 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항상 혼자였다.
나는 늘 혼자였다.
말은 잘했다.
언제나 그럴듯하게, 누구보다 멋지게.
하지만 그 말들 뒤에 책임은 없었다.
실천은 없었고, 변명만 있었다.
교통사고가 나고, 구속되었을 때…
그는 보험조차 없었고, 모든 건 내 몫이 되었다.
아이를 안고, 버스를 타고, 면회를 가고,
돈을 구하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 사람은? 그냥 사라져 있었다.
그는 버는 사람이 아니었다.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너뜨리는 사람이었다.
IMF 이후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내가 아끼며 모은 돈, 땅, 시간…
모두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길가에 앉아 호떡을 팔던 나,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고개도 못 들던 나,
그런 나를 그 사람은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
택시 운전을 한다고 나섰지만,
그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놀았다.
돈을 벌지 않았고, 가족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현실조차 직시하지 않았다.
나는 앞만 보고 살았다.
아이들만 생각하며, 그저 버티며 살았다.
그런 내 곁에서, 그는 언제나 한 발짝 멀리 있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이가 말했다.
“당신은 남자 아홉을 품은 사주예요.”
나는 웃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하며,
겨우겨우 모은 돈으로 가게도 차렸지만,
삶은 늘 엉키고 또 엉켰다.
그게 내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멀리 있었던 가까운 사람이었다.
화는 나지 않는다.
이젠… 그냥 쓸쓸하다.
남편이 있었지만,
한 번도 진짜 내 옆에 있어준 적은 없었으니까.
---
그 시절, 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었다.
남편은 감기도 심했고, 마음도 자주 흔들렸다. 스쳐 지나가던 이가 말했다.
“당신은 남자 사주가 아홉이나 들어있다…”
그 말을 들은 후, 조영례는 생각했다.
‘왜 내 사주가 이 모양일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고, 결국 저금도 조금씩 모였다.
가게도 장만하고, 가족도 겨우 일어섰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꼬이고, 다시 돌아온다.
그게 인생이었다.
그래도 재미도 있었다.
장사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그 속에서 웃고, 잊고, 또 버텼다.
삶은 늘 거칠었지만, 조영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살았다’. 오늘도, 내일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가끔은 아주 사소한 기회가, 인생을 다시 살게 만든다.
남편이 드디어 운수회사에 정식으로 취직하게 됐다. 버스 기사로 채용된 그는 매달 110만 원씩을 집에 가져다주었다. 그 돈은 단순한 금액 이상의 의미였다. 그건 희망이었고, 안정이었고, 더 이상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조영례의 위안이었다.
"이제는 정말 잘 살아보자…"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돈이 많진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다는 사실은 큰 힘이 되었다. 남편이 정직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오랜만에 '함께 사는 느낌'을 받았다. 매일의 삶에 작은 기쁨이 스며들었고, 집 안엔 오랜만에 웃음소리도 돌아왔다. 딸아이도 아빠와 눈을 마주쳤고, 조용히 흘러가던 가족의 시간에 따뜻함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게 평탄해지지 않았다.
1년쯤 지났을 무렵, 남편은 다시 새로운 결심을 한다.
"차 한 대만 사면, 2~3년만 일해서 차값 빼고 나머지는 다 수익이야. 기사 하는 것보다 나아."
그 말에 조영례는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과, 다시 흔들리지 않기 위한 다짐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남편은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빚을 냈고, 결국 중고 화물차 한 대를 사들였다.
처음에는 꽤 괜찮았다. 직접 운전하며 일하니 수입도 괜찮았고, 시간도 자유로웠다. 첫 달, 두 번째 달… 그렇게 가정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마음에 희망이 깃들었다. 차는 한 대에서 두 대로 늘어났고, 조영례는 다시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남편은 만족하지 못했다. 욕심은 점점 커져갔고, 그는 말한다.
"형한테도 차 한 대 해줘야지. 우리 같이 벌자. 동생도 같이 하면 좋고."
가족끼리 함께 잘되자는 말에 조영례는 다시 빚을 냈다. 그렇게 오빠도, 시동생도 각각 화물차를 가지게 되었고, 함께 법인을 만들고 작은 운수 회사를 꾸려갔다. 처음 몇 달은 꽤 잘 돌아갔다. 오더도 들어왔고, 가족 간의 협력도 괜찮았다. 집안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그 즈음, 서울에 있던 언니가 내려왔다. 지하에 작은 부식 가게를 차리며 함께 살게 됐다. 언니는 남편과 별거 중이었는데,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합쳤고, 가족의 풍경도 달라졌다.
매일 함께 밥을 해먹고, 웃고 떠들고, 수영장도 다니며 조영례는 오랜만에 사람다운 삶을 느꼈다.
"언니 얼굴만 봐도 힘이 났어. 하루하루가 따뜻했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산 너머 산
시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했고, 가정에 다시 긴장이 흘렀다. 한쪽이 나아지면 다른 쪽이 무너졌다.
아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낙방했고, 그 또한 마음의 짐이 되었다. 하지만 조영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해. 너는 최선을 다했잖니."
딸은 대학에 합격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대신 미용학원에 다니며 기술을 익혔고, 각종 대회에 참가해 상도 받았다. 그녀의 손끝은 점점 숙련되어 갔고, 그 모습이 엄마에게는 또 하나의 자랑이자 안도였다.
그 무렵, 동수와 함께 친정 근처로 잠시 이사했지만, 사정상 다시 단감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가족 간의 의견 차이, 기대와 실망이 엇갈리며 마음의 골도 깊어졌다.
언니는 여전히 조영례의 곁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빠는 성격이 거칠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회사 안에서 여러 갈등이 생겼다. 외부의 갈등보다도, 내부의 긴장감이 조영례를 더 지치게 했다.
돈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은 돈 때문에 언성이 오갔고, 사업이 잘 되나 싶으면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차량이 고장 나거나,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하고, 계약이 취소되기도 했다. 그래도 조영례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는 게 원래 이런 거지. 조금 좋아졌다 싶으면 또 무너지고, 다시 또 일어나고. 그게 인생이야."
어느 날, 남편이 회사 내에서 문제가 생겨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됐다. 그 이후 몇 달간 그는 무기력하게 지냈고, 주변에서는 그를 범죄자처럼 여겼다. 조영례는 처음엔 그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진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법인을 다시 설립했다. 오빠, 남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조영례는 말했다.
"그래도… 나를 믿고 움직일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게, 다행이야."
일은 여전히 버거웠고, 하루하루가 녹록지 않았지만, 조영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걸었다. 걸어야만 했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이었고,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내고 있었다. 지금도,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