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화 데이트는 절대 없어!
2024년 5월 23일, 인천
다음 며칠 동안 소연은 자신의 사무실에만 머물렀다.
지훈이 방에 있을 때는 그의 문 앞에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업무를 처리하고, 그가 자리에 없을 때만 들어가 그의 책상 위에 인쇄된 일정표를 두거나, 전자 서명이 필요한 문서가 열린 태블릿을 올려놓았다.
다른 순간에는 아예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물론 지훈은… 늘 그렇듯 차분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차갑고, 더 무심해 보였다.
소연은 공기 속에 걸린 긴장을 느꼈다.
해결되지 않은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두터운 벽을 세운 듯했고, 그 뒤편에서 지훈은 보이지 않는 울분에 부딪히고 있는 것 같았다.
소연은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분노로 들끓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도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녀가 거절한 것을 빌미로 수없이 조롱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시간을 겪을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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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문서를 검토하고,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회의에서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마치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다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소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무심한 얼굴 뒤에서 자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고개를 들면, 그는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곧바로 눈길을 돌렸다.
그럴 때마다 소연의 가슴은 이유 모를 긴장으로 조여 왔다.
‘왜 이러는 거야… 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거지?’
그녀는 더 철저히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고, 그가 건네는 사소한 말조차 짧게 끊어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은 점점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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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사무실은 이미 한산해졌다.
남은 직원들은 몇 명 되지 않았고, 복도는 고요했다.
소연은 마지막 서류를 정리해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지훈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장소연.”
그녀는 문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지훈은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곧장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잠깐 와.”
소연은 망설였다.
“지금은… 퇴근 시간이잖아요.”
“상관없어. 할 얘기가 있어.”
그 말에, 그녀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이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연은 조용히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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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자, 사무실 안은 적막해졌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단단했지만, 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흔들림이 느껴졌다.
“며칠째 나를 피해 다니는 거 알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업무 때문에 바빴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일부러 나를 피했어.”
소연은 한순간 시선을 돌렸지만, 곧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요. 그게 대표님께 뭐가 문제죠?”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문제? 네가 날 무시하는 게 문제지.”
“무시한 게 아닙니다.”
소연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저는 그냥, 필요 없는 대화를 피한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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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필요 없는 대화라니… 그게 네가 생각하는 우리 관계야?”
소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표님과 저는 상사와 비서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 말에 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예상했던 답이면서도, 막상 들으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날 이렇게 피한 거야?”
소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서요.”
그 순간, 지훈의 손이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만큼 강하게.
“넌…”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선을 긋는 거지?”
소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그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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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치밀어 올랐지만, 그것을 끝내 말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소연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 역시 떨리는 숨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섰다.
“더 할 말 없으시면, 퇴근하겠습니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문 쪽으로 향했다.
지훈은 손끝이 움찔했지만, 끝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남겨진 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어떤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지훈은 주먹을 쥔 채 낮게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