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약서

22 화 - 불평등한 결혼의 문제

by 나리솔


22 화 - 불평등한 결혼의 문제

2024년 5월 27일
에이치케이 사무실, 인천

지원은 솔직히 일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장소연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집중력은 산산조각 났다.
어제 그녀는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사실상 사랑을 고백한 후였다. — 아니, 정확히는 그가 먼저 고백했지만, 이제 와서 따질 필요도 없었다. 이제 지원은 어린 소년처럼 생각의 흐름을 잃고, 유리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런 벽을 세운 걸까…

소연은 그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자기 자리로 가서 서류 더미 뒤에 몸을 숨겼다. 마치 지원이 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그는 그녀를 불러 세우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소연이 정한 선을 지켜야 했고, 그녀의 뜻에 귀 기울여야 했다. 지원은 이번만큼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하고 싶었다.

그는 이미 김미숙에게 연락을 보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아직 답은 없었다.) 민석에게도 물었다. 김家가 큰딸의 결혼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다른 상대를 찾을 수는 없는지. 민석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은 미숙 개인의 문제일 뿐, 아버지와 자신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지원은 미숙과 공개적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문제는 재산이나 가문의 이해와는 상관없는, 순전히 사적인 영역에 속했다. 그는 일과 사적인 감정을 섞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미숙은 겨우 점심 무렵 답을 보냈다.

미_야: 세 번째 데이트 초대가 아니라면, 나 관심 없어.
잇_노비즈: 애처럼 굴지 마. 우리 이야기해야 해.
미_야: 목요일에나 가능해.

지원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문질렀다. 목요일이라니, 너무 멀다. 소연은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미숙의 문제를 그렇게 오래 끌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 소연을 보았다. 그녀 역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일부러 못 본 척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워서?
소연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지원의 행동도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았지만, 어색한 표정만 지어지고 말았다. 그는 손으로 서둘러 그 표정을 지워 버렸다.

소연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지원은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 여인을 다시 한번 안고 싶다는 갈망이 너무도 고통스럽게 그를 죄어왔다. 어제의 순간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 전 그는 소연이 나오는 꿈을 꾸고 새벽에 깼다. 그 뒤로는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이 두려울 만큼 가까이 하고 싶었다. 소연은 평범한 업무 이야기를 하고, 그의 일정을 확인하고, 그냥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지원은 그녀를 떠올리며 단 한 가지 생각만 했다. — 그녀를 품에 안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정말… 미친놈 같았다.
지원을 불편하게 만드는 미숙의 태도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결과를 약속하지 않았다.

“부서지지 않았어.” 지원이 차갑게 반박했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내 직원이 아니야. 그녀에 대해 말할 땐 존중을 보여.”

미숙은 과장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네? 역시 너는 키 작은 여자들에게 약하지.”

“미숙.”

“뭐? 난 내 마음대로 말할 수 있어. 그 여자는 내 눈앞에서 내 인생의 사랑을 빼앗아갔어.”

지원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때 그들에게 커피가 놓였고,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난 네 것이었던 적이 없어. 게다가, 난…”

그는 말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맴돌던 진실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껏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바보였다.

“넌 늘 그 여자만 사랑했던 거지, 그렇지?” 미숙이 대신 마무리하듯 말했다. “놀랍네. 너조차 몰랐던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녀도 아마 알았을 거야. 다 파악했겠지.”

지원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소연과 함께한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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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오래 전 체육관에 가지 않았다. 저녁 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았다.

it_nowij: 목요일 오후 세 시. 순두부 식당에서 기다릴게. 늦지 마!
Mii_ya: 성급하네! 선물 기대할게 ;)

약속된 날, 지원은 식당에서 미숙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늦게 도착했다.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반짝이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지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명령조로 날 불러낸 거겠지? 이제 우리 관계를 끝내려는 거 아니야?” 그녀는 인사 대신 비웃음을 보냈다.
지원은 미간을 찌푸렸고, 미숙은 여유롭게 웃었다.

“여자의 직감은 언제나 정확해. 절대 틀린 적이 없어.”

“그럼 알겠네. 난 이제 너와 에둘러 말하지 않을 거야.”

미숙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렸다.
“결국 네 비서가 널 무너뜨린 거지?”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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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은 언제나 지원의 신경을 긁었다. 단 몇 마디면 그를 하얗게 태워버렸다. 짜증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끌렸다.

만약 자신이 감정에 조금 더 솔직했다면, 결혼 전부터 그녀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모든 게 제대로 되었을까.

“너를 보고 있으면 구역질 나.” 미숙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여자를 보는 눈빛,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준 적 없잖아. 대체 그녀에게서 뭘 찾은 거야?”

지원은 크게 숨을 내쉬고 미숙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메뉴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난 해산물 샐러드를 먹을래. 네가 계산해.”

지원은 눈을 굴렸다.
“우린 오늘 식사하고 끝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가짜 연인의 만남은 여기서 끝.”

“오?” 미숙은 눈을 크게 뜨며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결국 넌 네 비서를 위해 날 버리는 거네?”

“김미숙!”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붉게 칠한 입술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네 가짜 아내를 위해서라면.”

지원은 주먹을 쥐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가짜 아내가 아니야. 진짜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미숙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어깨에서 넘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쇼를 벌인 건 너야. 정상적인 구애를 멜로드라마로 만들어버린 건 바로 너지. 3세대 재벌이라는 네가 죽을 듯이 집착한 게 고작 가난한 여직원이라니. 다른 여자는 없었니? 나랑 결혼했더라면 난 전혀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몸을 기울여 지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원은 찌푸린 채 침묵했다.

“불균형한 결혼으로 행복을 꿈꾸다간 결국 너도 무너질 거야. 그 여자는 울게 될 테지.”

“그녀는 울지 않아.” 지원이 단호히 맞받았다. “그리고 또 나를 협박한다면, 네가 한 짓을 네 오빠와 아버지에게 전부 말할 거다.”

미숙은 코웃음을 쳤다.
“네 몰락을 바라는 사람들이 없을 거라 생각해? 질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원을 가리켰다. “자만하지 마, 황지원. 네 결혼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결국 네가 그렇게 지키려는 여자일 거야. 타깃은 언제나 너 하나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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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1일
지원의 아파트, 인천

소연이 말을 끝냈을 때, 지원은 10초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지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걸쳤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 쪽으로 향하던 그를 소연이 불러 세웠다.

“어디 가?”

“그 자식을 찾아서 죽일 거야.” 지원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눈앞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고,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소연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그 안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산산조각 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인간을 찾아가 목을 조르고 싶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두들겨 패고 싶었다.

“멈춰.” 소연이 낮게 불렀지만 지원은 듣지 못한 듯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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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그 사람을 넌 못 찾아. 나도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해.”

“그건 문제가 안 돼. 반드시 알아낼 거야.”

“지원. 황지원.”

간신히 손을 떼고 돌아선 그는 분노로 떨고 있었다. 소연은 맨발로 바닥에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얇은 셔츠 속 작은 어깨, 아무런 방패도 없는 모습. 키와 체격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참지 못한 지원이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끌어안았다. 소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달래주듯이.

“왜 그 자식을 감싸는 거야…” 지원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샴푸 향과 은은한 향수가 섞여 나왔다.

“그 사람을 지키는 게 아니야.” 소연이 조용히 답했다. “널 지키는 거야. 사람들이 네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이미 미쳤어.” 지원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 자식을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어.”
지원은 고개를 떨구고 소연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은 작았다. 회사에서 태블릿을 들고 차가운 얼굴로 일할 때가 아니라, 이렇게 그의 손 안에 있을 때는 한없이 작고 연약했다.

“그럼… 좋은 얘기 좀 해줘.” 지원이 쉰 목소리로 속삭이며 침대로 몸을 옮겼다. 소연을 함께 끌어당기며.
“아니면 다른 비밀들. 내가 또 걱정해야 할 게 있어?”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지원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더는 비밀 없어. 나머지는 다 네가 알고 있잖아.” 그녀가 조용히 말하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지원은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따뜻한 피부를 손끝으로 느끼며 천천히 어루만졌다.

“왜 그때 나를 불렀어? 대학교 때… 그 프로젝트.” 소연이 갑자기 물었다.

지원의 손끝이 멈췄다.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뺨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같이 일해보고 싶어서.”

“알아.”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마워. 참… 다정하네.”

“다정?!” 지원이 흠칫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그 일 때문에 상처받았어! 네 명예도, 네 몸도…”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지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밤을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그는 저항하지 못한 채, 소연이 다시 침대로 끌어당기고 품에 안아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따뜻한 체온.
소연은 마치 모든 걸 다 품어주는 듯했다.

지원에게 지금 그녀는 전부였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사업가로서 국제 시장에 나아가야 한다는 꿈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단순한 남자였다. 로맨틱 코미디 속 멍청한 주인공처럼, 그녀만을 원했다.

“다른 얘기 해보자.” 소연이 속삭이며 그의 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어깨와 쇄골을 따라 움직였다.

지원은 잠시 얼어붙었다.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모든 걸 잊고 그녀만 붙잡아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빛나며 흔들렸다.

지원은 웅얼거리듯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다.

소연은 몸을 기울여 그의 시선을 붙잡으려 했다.


“뭐라고? 미안, 뭐라고 했어?”

지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널 더 알고 싶었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서로의 비밀을 꺼내놓기 시작한 이상, 지금만큼은 솔직해야 했다.


“나, 예전부터 네 마음에 들었지?”

소연은 묻는 게 아니라 단정하듯 말했다.


지원은 속으로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지만, 수년간 눈먼 채 살아온 건 아니지 않은가. 그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우쭐대지 마.” 지원이 반박했다. “그땐 너한테 다가온 남자들이 많았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가 내 옆 방 놈들까지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어.”


소연은 코를 찡그렸다.

“나, 친구도 별로 없었어. 거짓말 하지 마.”


하지만 지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한소연을 바라보던 남자들은 학년을 불문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늘 공부에 매달리고, 자신만의 사정에 파묻혀 있었으니까.


대학교 2학년 때는 집 근처 ‘시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곳에는 그녀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학생들까지 있었다. 지원은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다른 애들 골라서 통역 잘하는 애랑 일할 수도 있었잖아.” 지원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널 원했어.”


그 말은 거의 고백처럼 들렸다. 지원은 뺨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소연은 잠깐 그를 보더니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렸다. 손끝은 그의 셔츠 깃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대학교 때는 엄마를 돌보느라 힘들었어.” 소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가 많이 무너졌거든. 우울증이 심해서… 나도 학교 다니면서 모른 척했지만, 결국은 감당하기 어려웠어.”


지원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소연은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며 조금 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1학년 때 엄마 상태가 더 나빠졌어. 우린 부정, 분노, 체념을 다 겪었어. 돈이 많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도 계속 했고, 그러다 보니 언어 수업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잘해왔어.”

“엄마는 요즘 괜찮아. 내가 곁에서 챙기고 있어.”


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 네가 필요한 건 나도 알잖아.”


소연은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녀가 이사를 원하지 않는 거야?”

지원이 눈치를 챘다. 소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래, 원하지 않아. 사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그래.”

소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마치 체념하듯 말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아버지가 남긴 그 집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결국 남은 건 그 집뿐이었어. 그래서 그냥… 그냥…”


“추억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구나.”

지원이 대신 말을 이어주자, 소연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통찰력이 있네.”

“난 원래 통찰력이 있어.”

“거짓말.”


소연이 그의 목에 입술을 살짝 댔다. 지원은 낮게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뺨을 붙잡아, 이번엔 제대로 입을 맞췄다. 순간 소연이 숨을 내쉴 때, 지원은 그녀의 입술에서 익숙한 치약 향을 느꼈다.


“네 칫솔로 양치했어.”

소연이 속삭였다.

“괜찮지? 이런 건 예민하게 굴지 않을 거라 믿어.”


“그럼, 한 번 더 입 맞춰봐. 내가 얼마나 예민하지 않은지 보여줄 테니까.”

지원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소연은 얼굴이 붉어지며 그의 가슴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렸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소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독일어는 제대로 못 배웠어.”


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뉘른베르크 계약서 보낼 때마다 통역을 쓰잖아. 네 덕에 일이 참 느려져, 한소연.”


“조용히 해. 그럼 다른 비서를 고용해.”

소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원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싫어. 넌 평생 나를 괴롭혀야 해. 그래야 내가 산다.”


스스로도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소연에 대한 다른 후보 이야기를 떠올리자, 지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너… 이태솜이랑 사귀는 건 아니지?”


소연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말도 안 돼. 아니야. 그 애가 축제에서 자기 전 여친, 재희한테 복수하려고 나더러 여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했을 뿐이야.”


“재희?”

“우리 부서 사람이야. 태솜이랑 사귀다가 먼저 차버렸거든. 그래서 날 이용한 거야.”


지원은 얼굴을 굳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녀석… 결혼 얘기까지 꺼냈다며?”


“어이없는 제안이었지.” 소연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그 순간 지원의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그 말… 받아들일게. 다른 이유가 필요 없어. 지금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소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의심스러운 고백이네. 하지만… 이번엔 받아줄게.”


지원은 베개에서 몸을 옆으로 돌려 소연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가만히 누워 있기 싫으면… 홍콩까지 같이 여행 갈래?”


소연은 얼굴이 붉어져 그의 품에 파묻혔다.

“변태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지원은 그것을 초대장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다시 입을 맞췄다.


그날 밤 늦게, 소연이 그의 품에서 미소 지은 채 잠들자, 지원은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담배를 물었다. 차가운 바람이 침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변호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2018년 2월 27일 밤에서 28일 새벽 사이, 그 지역에서 운전했던 택시 기사를 찾아.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복수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바보 같아.”

소연이 어느새 깨어 있었고, 팔꿈치를 괴고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은 멍청해지는 법이야.” 지원이 낮게 말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을 핑계 삼아 억지로 결혼을 밀어붙이는 짓이라든가.”


소연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네가 시작한 거잖아.”


지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부모님이 날 궁지에 몰아넣었어. 결혼하지 않으면 계속 소개팅 자리에 끌려다닐 상황이었지.”


“그럼 왜 하필 나였어? 왜 김미숙이 아니라?”


지원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내가 고른 게 아니야. 어머니가 널 좋아한다고 직접 말씀하셨거든. 그래서… 너를 제안하셨어.”


그는 얼굴을 감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연아, 믿어줘. 솔직히 말해서, 불과 두 달 전까진 너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어. 하지만 네가 그날 식당에 들어왔을 때… 그 순간부터는, 너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운은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기사 속 사진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였다. 누가 이런 글을 쓴 거지? 누가 이런 더러운 짓을 했나? 소연을 마치 생선처럼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하다니… 역겹고 추악했다.


지운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곧바로 놀라 움찔했다. 혹시 소연이 깨어나 모든 걸 알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옆에서 살짝 몸을 뒤척였을 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지운은 허겁지겁 휴대폰을 멀리 치워버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치를 떨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온몸이 굳은 채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 순간, 이유 없는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우리… 이혼하자.”


말이 튀어나온 순간 지운 자신도 놀랐다. 그 말이 얼마나 경솔하고 날카로운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운이 무슨 말을 덧붙여 해명하려 해도, 그 순간만큼은 어떤 설명도 소용없었다. 설령 신께 기도해 그녀를 설득할 힘을 달라고 빌어도, 소연 같은 여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대를 뛰어넘어 저주하듯 쏟아내며 떠나갔다. 분명 화가 났을 텐데도, 이상하게도 얼굴에는 지나친 분노 대신 냉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지운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갑고도 단단하게 등을 돌린 그녀의 발걸음. 그 발걸음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운은 이미 김민석과 격렬하게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 “오늘 네 아버지 집에서 보자. 네 성가신 여동생을 내가 죽여버리겠다!”

소연은 그의 어깨 너머로 휴대폰 화면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사무실 한가운데 서서 핸드폰을 꽉 쥔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젠장…” 지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소연이 온갖 기사 댓글 속에서 온갖 모욕을 받고 있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억지로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바보처럼 굴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런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책상 위의 커피잔이 날아왔지만 지운은 피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내가 네 이름을 지켜낼 거야. 반드시 깨끗하게 만들 거야. 걱정하지 마.”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연은 이미 상처 입었다. 진실과 반쪽짜리 진실, 노골적인 거짓이 뒤섞인 소문은 너무나 집요했고, 사람에게 기생하듯 달라붙었다.


― “넌… 이혼하고 싶었던 거야?”

소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지운의 가슴은 서서히 가라앉는 듯 무너져 내렸다.

“아니야, 장소연, 그게 아니야…”


“좋아, 이혼해. 네가 원한다면 해줄게. 이제 우릴 묶어둘 건 아무것도 없어, 황지운. 아무것도!”


소연은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지운은 그녀를 붙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소연의 말이 옳았다. 이혼, 그것이 지금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일지 모른다.


“최 변호사.” 지운은 차갑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서류 몇 개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김민석 회사에 대해 캐낼 수 있는 건 전부 캐내세요. 최우선입니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탁자 위에 내던진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식어버린 커피가 묻은 유리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김미숙. 그 여자를 내가 끝장낼 거다. 그녀와 그 가족 전부. 그리고 저 쓰레기 같은 언론사를 무릎 꿇게 만들어 수십 개의 기사를 내보내도록 할 거다. 사과와 정정 보도, 수백 번이라도.”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장소연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운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약 지금 무언가 하지 않으면,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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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합의를 거절하다니요.”

김민석은 현금 다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망가뜨린 물건의 보상입니다. 법정에서 보죠.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할지 똑똑히 보게 될 겁니다.”


“황 부장.” 김민석은 팔짱을 낀 채 지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작은 비서 하나가 당신 눈을 멀게 했군요. 제발 상황을 냉정하게 보십시오. 당신에게는 우리 회사를 굴복시킬 힘이 없습니다.”


지운은 주먹을 움켜쥐며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지금이라도 그의 얼굴을 책상에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대신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곧 초대장이 갈 겁니다. 당신의 사형 집행장으로.”


그 말을 남기고 지운은 김민석의 사무실을 차갑게 떠났다.


회사 사무실 복도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유난히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지운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일렬로 놓인 책상들을 지나쳐, 마침내 소연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직원들은 놀라 움찔했지만, 지운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장소연만을 향해 걸어갔다.


민석은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네 사생활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믿으라고?” 지운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네가 그녀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걸 그녀도 알았지. 네가 그녀의 메시지조차 읽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장소연에 관한 불쾌한 사실들을 그녀가 알 리가 없잖아.” 민석이 몰아붙였다.

“그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 지운이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네가 그녀를 말할 자격 없어.”

“알았어, 알았어.” 민석이 손을 들며 물러섰다. “하지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 미숙은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다른 건 몰랐어. 너 그 기사 끝까지 읽어봤어? 미숙은 장소연이… 네 아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지운은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반지를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다 결국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민석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공감을 보이려 했지만, 그럴수록 지운은 더 짜증이 났다.

“내가 도와줄게, 지운.” 민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기자 몇 명을 알아. 그 기사 위에 다른 기사들을 덮어씌우고, 뉴스 사이트는 압박해서 삭제하게 만들 수 있어.”

지운은 고개를 홱 돌리며 혀를 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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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의 사무실. 지운은 약속한 지 반 시간 만에 도착했다.
민석은 커피를 권했으나 지운은 거절했다. 그는 예전의 친구를 똑바로 바라보며, 지금 당장 목을 조를지 아니면 잠시 참았다가 가슴에 꽂힌 만년필로 찔러 넣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우선 말하고 싶어.” 민석이 목을 고르며 시작했다. “나도, 내 동생도 네 명예를 더럽힌 기사와는 아무 관련 없어.”

“내 명예라고?!” 지운은 불같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들은 내 아내를 더럽혔어! 내 아내를, 김민석!”

민석은 기침하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진정해, 친구. 이렇게 할 필요는 없어. 네가 화난 건 알지만…”

“널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어.” 지운은 이를 갈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네 동생이 이 기사를 흘렸지! 이제 네 가족 전부를 네 저택 뒷마당에 묻어버리겠다!”

민석은 책상 너머를 돌아 나와 지운 앞에 섰다.
“미숙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침에 나한테 직접 전화해서, 네 사생활을 언급한 적 없다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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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의 말은 옳았다. 기사에는 분명 장소연의 과거에서 비롯된, 미숙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매일 감시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 그렇다면 누가? 누가 장소연이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린다는 점,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까지 알아냈을까?

‘그녀의 친구?’ 말도 안 됐다. 소연은 누구에게도 약점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직 지운만 알고 있는 그녀의 두려움.

누구를 죽여야 이 분노가 가라앉을까? 차라리 자신일지도 몰랐다.

“우린 이 소문을 다른 뉴스로 덮어야 해.” 지운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점점 격해졌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걸 내보내서, 사람들의 시선을 그녀에게서 돌려야 해.”

“너 제정신이야?” 민석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운, 네 회사 주가도 떨어지고 있잖아.”

“상관없어.” 지운이 잘라 말했다. “나중에 만회하면 돼. 지금은 오직 장소연만 지키면 돼. 다른 건 내가 처리할 거야.”

지운의 집안에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그 비밀을 이용해 동생 지욱이 자신의 친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비열해지고 싶지 않았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희생시키는 건 역겨운 짓이었다.

지운은 멍청할지언정, 비열한 자는 아니었다.

2024년 6월 6일

에이케이 사무실, 인천

민석의 예상은 맞았다. 미숙의 인맥으로 충분히 김흠석을 압박해 기사를 삭제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이미 몇몇 황색 언론이 그 기사를 퍼 나르며 떠들어댔지만, 며칠 뒤 법무팀이 움직이자 마치 회사가 동시에 국제 계약을 세 건이나 성사시킨 것처럼 주가가 반등했다.

일주일 뒤, 지운은 김흠석이 공식적으로 보낸 사과문과 함께 에이케이 주식의 폭락 보고서를 받았다. 거기에는 2020년 수준까지 떨어진 시세가 담겨 있었고, 동시에 소연과의 이혼 관련 문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충격은, 한소율이 공개적으로 “에이케이와의 계약은 부적절하다”고 밝히며 계약 파기를 인정한 기사였다.

그 순간, 지운은 막 그 뉴스를 읽던 중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그룹 비서와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

“박 비서님? 네, 기사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거짓으로 입을 맞춰드렸으니, 이번에는 저에게도 한 번 양보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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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놓인 지운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새 메시지 알림이었다.
지운은 변호사 보고서를 기대하며 화면을 열었으나, 거기엔 단 한 줄, 소연의 메일이 있었다.

“이혼 신청서를 보냅니다.”

젠장.

지운은 말문이 막혔다. 다만 짧고 차갑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서류에 서명하겠다. 절차까지 확인하겠다. 걱정 마라.”

‘걱정 마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장소연, 넌 정말 바보야. 아니, 황지운, 네가 더 바보지.

“며칠 동안은 내가 도시에 없을 거다.” 지운은 이유 없이 민석에게 말했다. “그동안 네 여동생을 잘 지켜라. 이번 기사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시켜버릴 거다.”

민석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에이, 우리 누나 성격이 까칠하긴 해도 그런 짓 할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도와줄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마.”

지운은 비웃었다.
“네가 예전에 똑같은 말 했을 때, 내 계약을 가로챘었지.”

민석의 입꼬리에 억지 웃음이 걸렸다.
“이번엔 안 그럴게. 넌 이미 충분히 맞고 있잖아, 친구.”

— 그 ‘한 그룹’ 말이야? — 민석이 잠시 생각에 잠기며 물었다. — 내가 알기로는, 네가 곧 대형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었던 걸로 아는데?

— 진행을 일부러 늦췄어. 한소율은 두 달째 나한테 답을 하지 않아.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증거 자료를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나는 바보처럼 기다리고 있었지.

— 그래? 그런데 직접 만나러 가보지는 않았어?

— 지금 상황에서, 저런 뉴스가 터진 뒤에 그가 나와 악수를 하겠나? — 지운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민석이 코웃음을 치자, 지운은 그의 건방진 미소를 올려다보았다.

— 굳이 악수할 필요는 없지. 차라리 거절하게 만들어. 큰 소리로 말이야. 그러면 네 회사의 해외 진출 야망은 박살나겠지. 제목이 뭐가 좋을까, 응?

지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끄덕였다. 아이디어 자체는 써먹을 수 있었다.

— 너 역시 결국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군. — 지운이 낮게 중얼렀다. 민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 결국 넌 1년 안에 나를 따라잡을 거야. 설령 내가 시간을 벌어도 말이지. 널 잘 아니까. 네 아내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회사에 매달릴 거고… 그때는 내 주가가 무너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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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6일

에이케이 본사, 인천

민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미숙의 인맥으로 김흠석을 압박해 기사를 삭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찌라시 언론들은 그것을 퍼 날랐고, 며칠 후 법무팀은 그 여파를 수습하느라 전사(全社)가 세 건의 국제 계약을 동시에 진행하는 듯 분주해졌다.

일주일 후, 지운은 김흠석이 보낸 공식 사과문과 함께 에이케이 주가 폭락 보고서를 받았다. 2020년 수준으로 추락한 수치였다. 거기에는 소연과의 이혼 관련 문서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한소율이 공식적으로 “에이케이와의 계약은 부적절하다”고 선언한 기사였다.

지운은 그 뉴스를 읽는 순간, ‘한 그룹’ 비서와 연결될 수 있었다.

“박 비서님? 네, 기사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거짓을 감수했으니, 이번엔 제 부탁도 들어주셔야겠지요…”

책상 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운은 변호사의 보고서일 거라 생각했으나, 화면에는 소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 단 한 줄.

“이혼 신청서를 보냅니다.”

지운은 숨을 멎은 듯 굳어버렸다.

“서류에 서명하겠다. 직접 절차까지 확인하겠다. 걱정 마라.”

하지만 어찌 ‘걱정 마라’라니? 장소연, 넌 평생 마음속에 남을 상처를 입었어. 황지운, 넌 정말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