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 - 예신의
차를 끓이는 이 기묘한 상황.
전 여자친구의 집 부엌에서, 그녀를 깨워버리고 나서 스스로도 이유를 잘 모른 채 서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
아니, 사실 이유는 안다. 너무 겁이 났다. 예신이 전화를 받지 않고, 민준에게서 그녀가 쓰러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걱정할 자격이 있을까?
한편으로는, 있다.
우린 낯선 사람들이 아니다. 다섯 해라는 긴 시간 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어도, 예전에 서로의 몸에 있는 작은 점들까지 외울 만큼 가까웠다. 그런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또렷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격이 없다.
똑같은 이유다. 우리는 무려 다섯 해 동안 남처럼 지냈다.
게다가 지금 내 곁에는 세진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 수진. 내가 지켜야 하는 현재의 여자친구. 하지만… 우리는 심하게 다투었다.
수진은 예신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제안한 내 말에 크게 화를 냈다. 면허 정지, 벌금, 복잡한 절차로 이어질 거라고, 내가 그녀를 보호하기는커녕 배신했다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예신은 뇌진탕까지 입었다. 누가 봐도 가해자는 수진이었다.
내가 예신 편에 선 건 단순했다.
사고로 다친 사람은 예신이었고, 나는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감정도 그랬다. 그냥 외면할 수 없었다. 만약 내일 또다시 수진이 같은 실수를 한다면? 혹은 누군가를 더 크게 다치게 한다면? 나는 그런 걸 방관할 수 없다.
예신의 부엌에 앉아, 팔팔 끓는 주전자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책임감일까, 후회일까, 아니면 아직도 남아 있는 미련일까.
그 일로 결국 수진과 크게 다투었다.
민준 역시 여동생 편에 서지 않았다. 늘 누군가가 그녀 대신 모든 걸 해결해주길 바라는 세진을 더는 감싸주지 않았다.
연애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상식과 책임이 먼저다. 이번 상황에서 나는 예신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진심이었으니까. 만약 내일 또다시 수진이 무단으로 차를 몰다가 보행자를 치면? 그녀는 반드시 알 필요가 있었다. 모든 잘못이 그냥 넘어가는 건 아니라는 걸.
예신은 지금 영 안 좋아 보였다.
지쳐 보이고,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눈 밑엔 짙은 다크서클, 입술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민준이 다 말해줬다. 병원에 간 일, 회사에서 해고당한 일, 그리고 거의 의식을 잃을 뻔했다는 일까지.
그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냥…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민준에게 무리해서라도 번호를 얻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결국 민준에게 주소까지 받아냈다. 우리가 사귀던 시절 살던 집은 이미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 찾아왔다. 그냥,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그런데도 문을 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진짜 119를 부를 뻔했다. 문을 부수려 했지만,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왔다.
내가 알던 늘 환하게 웃던 소녀와는 달리, 너무 슬퍼 보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 그저 창백한 그림자 같은 표정.
나는 본능처럼 끌어안았다.
살아 있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슴에 얹힌 돌덩이가 굴러떨어졌다. 비록 최악의 상태였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의 부엌에 서 있다. 주전자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여기에 왜 온 거지?
무슨 말을 하려고?
겁이 나서 달려와, 문을 두드리고, 그녀를 안아버린 뒤… 그다음엔?
나는 진짜 바보처럼 굴고 있는 게 아닐까.
형편없이 싸구려 냄새가 나는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두 잔을 책상 위에 놓고, 하나를 예신 앞으로 살짝 밀어준다.
나도 어색하지만, 그녀는 더 어색해 보인다.
다섯 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습관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머리카락을 귀 뒤로 억지로 넘기고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날 정도로 참는 모습은… 극심한 긴장과 불편함의 신호였다.
도대체 어떻게…
언젠가 서로의 모든 점과 숨소리까지 알고 있던 두 사람이 이렇게 낯선 남남처럼 되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지금의 예신을 전혀 모른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생일에는 무엇을 받고 싶어 하는지, 스물둘의 나이에 산타클로스를 아직도 믿는지조차 모른다.
그저 오래된 기억 속 건조한 사실들뿐.
그리고 나는 미친 듯이 이 공백을 메우고 싶다.
“나… 지금 오면 안 되는 타이밍이지?”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예신의 입가에 작은 어색한 미소가 번진다. 그렇다. 나는 맞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불편하다.
“아니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전히 뜨겁게 김이 나는 차를 한 모금 삼킨다. 위험할 정도로.
“나 너무 오래 잤어. 일어나야 했어. 안 그러면 밤에 못 잘 거야.”
“아직도 아프지?”
예신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세진 때문에 생긴 일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죄책감이 밀려온다. 상황 자체가 너무 창피하다.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을 만큼. 만약 내가 이 모든 걸 언니한테 솔직히 말하면… 큰일 난다. 언니는 원래부터 세진을 좋아하지 않았고, 최근 며칠 동안은 입만 열면 예신 얘기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세진은 도저히 못 버틸 거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더 아픈 건 아니고… 계속 어지러워. 속도 좀 메스껍고. 솔직히, 머리도 아프긴 해.”
예신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
나는 단숨에 대답했다.
“필요한 약이나 검사가 있으면 말해. 내가 다 낼게, 예신.”
멈칫할 틈도 없이 뱉은 말이었다. 정말 그만큼 미안했으니까. 자동차도 내가 세진에게 사준 게 아니었지만, 책임만큼은 분명히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세진을 경찰 조사에서 지켜주려고 했던 거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네 치료비를 부담하는 게 맞아.”
걱정하지 마. 민석이 병원비 다 내고, 약도 다 사왔어. 내가 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동안 말이지. 네가 말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 거절했는데 듣지도 않고.”
…민석. 갑자기 나타난 기사님.
내 여자친구를 몰래 좋아했던 남자.
아마 그때도 민석이 계속 예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래서 내가 결국 힘이 빠진 건 아닐까? 다섯 해 전, 딱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 관계가 끝나버린 이유. 그냥 어느 순간 서로 손을 놓아버린 것.
솔직히 말해, 민석의 고백은 아직도 날 건드린다.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이미 다 끝난 과거인데.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잖아. 바꿀 수도 없고. 그런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왜 그때는 아무 말도 안 했을까?
왜 지금에서야 그런 마음을 내뱉는 걸까?
그리고 지금은 예신에게 고백까지 했다는 건가? 치료비까지 대주고?
아직도 예신을 좋아하는 건가?
이제는 대놓고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건가?
…젠장.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이상하다… 이런 생각만 해도 속에서 용암이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마치 아직도 내가 예신의 남자이고, 민석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온 것처럼. 웃기지 않은가? 정신 차려야 한다. 나 정말 헛소리만 하고 있다. 바람 좀 쐬고, 머리도 식혀야 할 것 같다.
“뭐, 민석이가 그렇게 잘나셨다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말했지만, 예신은 몸이 너무 안 좋아서인지 내 말 속의 날카로움을 읽지 못한 것 같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부탁해. 언제든.”
“예를 들면 뭐?”
예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날카롭게 비튼 미소를 짓는다. ‘도윤, 제정신이야? 내가 대체 너한테 뭘 부탁하겠어? 너 말고 누구라도 낫지.’ 그런 의미가 담긴 듯한 눈빛. 순간적으로 가슴이 쿡 찔린다.
“뭐든. 네가 원하면… 도시에서 제일 맛있는 도넛이라도 사 올게. 방금 튀겨낸 걸로. 그냥 전화해. 내 번호 떴을 거야. 부재중만 스물네 통일걸. 끝자리 세 개, 전부 삼(3)이야.”
“첫째, 난 도넛 같은 거 몇 년째 안 먹어.”
예신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순간 나는 모든 말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둘째, 그 도넛은 네 여자친구한테 주지 그래? 그녀에겐 네 관심이 더 절실하잖아.”
“…예신.”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빛과 마주쳤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슬픈 시선.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이제 집에 가. 제발.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쉬고 싶어.”
문득,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내쫓는다. 돌려 말하지도 않고, 눈치 보라는 식도 아니다. 그냥 대놓고, 지금 당장 나가 달라는 말. 나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놈이 된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자꾸만 사과하고 싶어진다. 세진에게? 아니면 지난날의 나 자신에게? 잘 모르겠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고, 그녀가 더는 나를 원망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세진에게도 사과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역겹다. 정말 역겹다.
“미안.”
차 한 모금도 못 들이키고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 앞에서 멈춰 버렸다.
예신의 향기가 너무 진하게 풍긴다. 다섯 해가 흘렀는데도 그녀는 향수를 바꾸지 않았다. 그 익숙한 냄새가, 미친 듯이 머리를 때린다. 단숨에 과거로 끌려간다. 수많은 장면들이 영화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순간적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향기 하나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
“귀찮게 해서 미안.”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우리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웠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경계는 너무나 얇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내가 집을 떠나려 할 때면, 예신은 조용히 다가와 고양이처럼 입술을 내밀며 입맞춤을 원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언제나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예신은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순간의 흔들림과 기억을, 단숨에 끊어 내듯이.
우리는 다섯 해 전, 정말 행복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뭐가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