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화 꽃과 그림자
왜 또 찾아온 거야? 도대체 왜?
내가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다시 떠올리게 하려고? 이해할 수가 없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물론 이번 일은 그녀의 잘못에서 시작됐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면, 당연히 연인의 편을 드는 게 맞지 않나? 도윤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다.
우리가 함께였을 때 그는 항상 내 편이었다. 내가 잘못했을 때조차도, 남들 앞에서는 늘 내 편에 서서 나를 지켜줬다. 잘못을 지적하거나 화를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 둘만 있을 때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벽처럼 나를 감싸 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번 일에서 그는 여자친구가 아닌 나의 편을 들어줬다. 그 사실이 나를 너무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시 과거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아마 도윤과의 관계가, 내가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리석게 끝나 버렸지만, 그때만큼은 진짜였다. 헤어진 후 나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게… 그렇다고 내가 아직도 도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를 잊지 못해 5년 내내 괴로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 싶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운명이 끊임없이 우리를 다시 부딪히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나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모든 게 이제는 너무나 아프게 다가온다.
왜? 자기 여자친구를 사랑했다면, 그녀를 지켜주고 도와줬어야지. 그랬다면 나도 훨씬 편했을 거다. 둘이 함께 행복하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단호히 과거를 떠올리지 말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난다. 그리고 도윤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리면, 괜히 조금 서운해진다.
다시 잠에 빠져든다. 여전히 몸은 좋지 않고, 이 상태를 억지로 견디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낮이고 밤이고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잠만 잔다. 깨어나는 건 화장실에 갈 때와 고양이 밥 줄 때뿐이다. 샤워조차 이틀 만에 겨우 나가서, 뜨거운 물은 피해야 해서 차가운 물에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몸을 식힌다.
조금은 나아진다. 머리도 예전처럼 심하게 아프지 않고, 메스꺼움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괜찮다. 살 수 있겠다. 처음에는 더 끔찍할 줄 알았는데.
텔레비전도 켜지 않고, 전화기도 멀리 두고, 책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다. 대신 가볍게 저녁을 준비하고, 발코니에 앉아 차를 마시며 공기를 마셔 보기로 한다.
나는 작은 꿈의 발코니를 꾸며 놓았다. 라탄 의자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화분 가득한 꽃들. 겨울 동안 창가에 두었던 화분들을 다시 바깥으로 옮기자, 꽃들이 더 화려하게 피어난다. 나도 저 꽃들처럼 될 수 있을까? 정말 그러고 싶다.
오늘은 놀랍게도 따뜻한 하루다. 햇살이 기분 좋게 비추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인생이 그렇게 엉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필요한 건 단순했다. 푹 자고, 두통약 하나 삼키고, 몇 시간이라도 억지로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 것. 그뿐이었다.
모든 게 생각보다 간단했다. 단지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바보 같은 생각들과 겹쳐져서 더 힘들게 만든 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도윤 때문에 괴로워하진 않을 거다. 맞다, 우리 함께했던 시간은 좋았다. 아마 내가 그 빛나던 것을 지켜내지 못한 걸 후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섯 해가 지난 지금까지 그를 붙잡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그 없이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
일은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렇게 바보 같은 이유로 해고된 게 억울하긴 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더 나에게 맞는 곳을 찾고 싶다고. 아마도 삶이 내 바람을 억지로라도 현실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다음번에는 우주에다 소원을 던질 때 좀 더 조심해야겠다. 괜히 “이렇게 사는 게 지겹다, 차라리 내일 차에 치이면 어쩌지” 같은 생각을 했다가는, 진짜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쉽진 않다. 특히 내 성격에선 더더욱. 나는 결코 이를 악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스물일곱 살이면 이제는 최소한 필요한 순간엔 성격을 세우고 버틸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따뜻한 차 향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햇살에 얼굴을 맡긴다. 지나가는 차 소음이 관자놀이를 조금 짓누르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이 평화로운 순간을 즐기려 한다. 공기는 아직 완전히 따뜻하지 않아 두꺼운 가운을 여며 입는다. 그런데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데마의 울음소리에 결국 얼굴을 찡그린다. 배고픈 고양이는 귀찮은 고양이다. 특히 이 녀석은 전형적인 남자처럼, 배가 고프면 무조건 소리부터 지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사료를 주러 가려던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손에 들고 있던 차를 거의 쏟을 뻔했다.
내가 지금 꿈꾸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뇌진탕 때문에 시력이 이상한 건가? 아니면 둘 다?
아니. 분명히 현실이다.
집 앞에 낯익은 차가 서 있고, 그 차에서 미로가 꽃다발을 들고 내리고 있었다.
나는 세 번째 층 발코니에서 미로를 내려다보며, 환각이 아닌지 확인하려고 몸을 기울이다가 그만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속으로 욕을 했다. “그래, 예신, 뇌진탕 하나로는 부족해서 다리까지 부러뜨리려는 거야? 딱 종합 패키지네.”
“뇌진탕 하나로는 부족해서 두 번째로 굳히려는 거야?”
내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본 미로가 웃으며 말했다. 꽃다발을 든 채 발코니 아래에 서 있는 그는, 믿기 힘들 만큼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미로가 맞는지, 아니면 내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걸로 끝날 리가 없지.”
나는 가볍게 받아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조심 좀 하라고, 예신.”
미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꾸짖듯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 있어? 마치 세레나데라도 부를 기세잖아.”
내가 농담을 던지자, 그는 잠시 웃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래는 못해도, 휴대폰 사용법 강의는 해줄 수 있는데? 전화를 받으란 걸 몰라? 사람들이 너 걱정하고 있는데.”
“도윤?”
무심코 입 밖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말끝을 삼켰다. 그가 꽃을 들고 서 있는데, 내가 왜…
“미안, 며칠은 핸드폰 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혹시 유혹받을까 봐 아예 숨겨버렸어. 드라마 보는 것도 참아야 해서.”
“차 한 잔 대접 안 해줄래?”
그는 도윤에 대한 질문을 모른 척하고 화제를 바꿨다. 오히려 그게 고마웠다.
“귤차밖에 없는데?”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좋지.”
고개를 끄덕인 미로는 드디어 그 자리를 떠나, 우리 건물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고양이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요구에 바로 응답하지 않고 잠시 늦게 반응한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얄미운 남자 같으니라고. 그래도 내겐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미로가 올라오는 동안, 나는 황급히 가운을 벗고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집이라고 해도, 그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건 좀 민망했다. 예쁘지도 않고, 왠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곧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알 수 없는 긴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상한 불안감이 스쳤다. 너무 어색하다.
나에게는 좋은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 언제나 말이 통하지 않았고, 늘 부딪히기만 했던 사람. 심지어는 대놓고 나를 싫어한다고 말하던 남자.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꽃다발을 들고 내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나를 도와준 것도 모자라, 오늘은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정말 이상하다. 나는 미로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떻게 그와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이렇게까지 달라진 건, 예전처럼 내가 그에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걸까? 아니면… 내가 더 이상 도윤과 그의 우정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진 걸까? 혹은 과거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지금 이렇게 보상하려는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너무 이상하다.
문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런 긴장감 때문에 스스로를 속으로 욕하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녕.”
미로가 너무도 따뜻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 미소에 내 마음의 얼음 조각들이 한순간에 녹아내려 바닥을 굴러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안녕.”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 그대로 따라 웃음을 지어 버렸다. 억지로 감출 수가 없다. 그는 진심이었고, 나도 진심으로 답하고 싶어졌다. 이것이 약한 걸까? 아니면 그냥 인간적인 반응일까?
“너, 이 꽃들이랑 닮았어. 그래서 꼭 전해주고 싶었어.”
그가 내게 내민 건 분홍빛과 주황빛이 섞인 거베라 꽃다발이었다. 사실, 나는 거베라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무심한 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너무 예뻐 보였다.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또 미소 짓고, 꽃을 받으며 얼굴이 붉어진다.
“예쁘다.”
나는 꽃 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말했다.
“너도 그래.”
미로가 답했고, 그 말에 나는 더 진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도대체 이게 뭐람? 정말 미치겠다.
“들어와.”
나는 그의 뜻밖의 칭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초대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고마워”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말도 안 돼, 지금 나 완전 엉망인데”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침묵이 나았다.
꽃을 꽃병에 꽂으며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 부엌 문가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미로. 이상하다. 이 사람은 누가 바꿔 놓은 건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불안해졌다.
“앉아 있어. 나 휴대폰 좀 가져올게. 혹시 다른 사람이 또 전화했을지도 모르니까.”
미로는 의자에 앉았고, 나는 방으로 가 휴대폰을 들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가 그렇게 전화를 했을까?
정말이었다. 무려 열여섯 번.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꼭 중학생처럼.
부엌으로 돌아오던 순간, 손에 든 휴대폰이 진동했다. 또 미로일까?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나를 못 찾고 전화한 걸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곧 화면을 보고 멈춰 섰다.
도윤: 지금은 좀 어때? 내가 정말 미안해. 잠시 후에 택배가 갈 거야. 네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