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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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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솔


완벽의 환상



우뚝 솟은 시작


토론토는 나를 포근하고 희망찬 "백지상태의 캔버스"로 맞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 바람과 축축한 습기, 그리고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한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 음울한 하늘로 나를 환영했어. 거대한 낯선 도시에 발을 디딘 나는, 서툰 솜씨로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옷가지들로 가득 찬 낡은 여행 가방 하나와 함께 섰지. 서울의 눈부신 거리와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이곳의 풍경 앞에서, 내 안에는 모든 소리가 지워진 듯 텅 비고 쨍한 감각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유리잔 속에서 홀로 진동하는 미약한 작은 소음처럼, 나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했다. 나의 뿌리가 뽑힌 지점과, 뿌리내릴 곳 없는 현재의 막막함 사이에서, 나는 한없이 흔들리고 표류하는 이방인 같았다. 이곳의 날씨는 마치 내 영혼의 황량함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자유의 충격


나는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중립적인 기운이 감도는 어느 길모퉁이, 아주 작고 낡은 스튜디오를 빌렸다. 그곳은 완벽주의자 준호가 설계하고, 내가 완벽한 아내의 가면을 쓰고 살았던 서울의 그림 같은 우리 집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공간이었다. 마치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두 개의 세계처럼. 이곳 스튜디오의 벽은 매끄럽지 못했고, 여기저기 벗겨진 페인트 자국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낡은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고, 창밖 풍경은 한강의 황홀한 노을 대신, 그저 회색빛 벽돌담과 낡은 에어컨 실외기만이 전부였다. 어떤 미학적 고려도, 어떤 완벽함에 대한 갈망도 없는, 그저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투박하고 불완전함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위로'를 느꼈어. 이 삐걱거리고, 낡고, 미학적 기준과는 동떨어진 공간에서는 무엇 하나 완벽할 필요가 없었어. 무언가를 지켜낼 필요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나의 완벽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은 이 공간에서, 나는 오랜 시간 나를 짓눌러왔던 '완벽함의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숨 막힐 듯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숨 쉴 수 없었던 완벽함의 공기 대신, 투박하지만 솔직하고 날것 그대로의 이곳의 공기가 나의 폐부를 채우는 듯했다. 모든 것이 허락되는 곳. 내가 나 자신이 되어도 괜찮은 곳.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는 나를 덮쳐오는 거대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승객'으로 살아왔잖아. 내 인생이라는 이름의 열차에서, 누가 운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흐르는 풍경만 바라보는 수동적인 승객으로. 그런데 이제 갑자기 내 손에 그 열차의 핸들이 쥐어졌어. 나는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지.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통제권을 쥐게 되자마자, 극심한 혼란과 함께 끝없는 선택의 미로 속에 갇혀 버린 듯했다. 나는 방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익숙한 여행 가방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어. 그 공포와 함께 목을 조여 오는 패닉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음을 울렸다.


'더 이상 준호의 완벽한 아내도, 회사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카피라이터도 아니라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이 질문은 메아리처럼 나의 텅 빈 내면에 부딪혀 돌아왔지만, 그 어떤 답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마치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름 모를 유령처럼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진공 상태에서, 나는 스스로의 존재 의미마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튜디오의 침묵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의 텅 빈 공간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색을 향한 우스꽝스러운 탐색


나는 스스로를 강하게 다그쳐 집 밖으로 나섰어. 원격 근무는 여전히 나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이 낯선 도시에서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물리적인 끈이었다. 서울에서의 화려한 커리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지만, '돈'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닻만이 나를 이 거대한 물살 속에서 간신히 붙잡아 두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나는 기계적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고, 나의 영혼은 여전히 방황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 깊이 묻어두었던 '호접란'이 떠올랐어. 내가 감히 준호의 질서 정연한 세계에 던졌던, 작고도 무모했던 반항의 흔적. 시들어버린 그 꽃은 나의 억눌린 자아의 한 조각 같았다. 그날 나는 결심했다. 나의 첫 번째 자기 탐색의 행위는 '색깔'이 되어야 한다고. 잃어버린 나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고. 나의 잃어버린 열정, 잃어버린 감성,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한다고.


나는 무작정 시내의 화방으로 향했어. 생전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내가 화방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진열된 형형색색의 물감과 붓들 사이를 어색하게 배회했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서울의 나라면, 아마도 이런 곳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적절한' 물건을 재빨리 집어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나는 달라. 이곳에서는 그 어떤 시선도 나를 재단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한 시간 내내 화방 구석구석을 기웃거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물감 튜브의 색깔 하나하나를 응시했고, 나의 손가락 끝으로 다양한 질감의 종이를 쓸어내렸다. 모든 것이 낯설고 미숙했지만, 그 생경함 속에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들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죽었던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미세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바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눈부신 '푸크시아 핑크'색 물감 통이었다. 정확히 내가 서울 아파트에 두었다가 시들어버린 그 호접란과 똑같은 색이었다. 나의 억압된 열정과 반항심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강렬하고 독기 어린 색. 그 물감 통을 집어 드는 순간, 나는 마치 그 색깔이 나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준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거대한 물감 통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첫 붓질


스튜디오로 돌아온 나는 물감 통을 탁자 위에 놓고 한참 동안 물끄러미 응시했어. 이 거대한 색깔의 덩어리로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벽을 칠할 수는 없었어. 이곳은 세입자가 사는 아파트였으니까. 나의 시선은 스튜디오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낡고 큼지막한 나무 서랍장에 닿았다. 브라운색으로 칙칙하게 칠해진, 그야말로 못생기고 볼품없는 서랍장이었다. 마치 나의 지나온 삶을 그대로 응축해 놓은 듯, 단조롭고, 지루하고, 아무런 생동감도 없었던. 서랍장이라는 이름처럼, 내 안의 모든 것들을 억눌러 깊숙이 가두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 어떤 계획도, 그 어떤 고민도 없이 무작정 물감 통의 뚜껑을 따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붓이나 집어 들었어. 그리고는 서랍장 위에 거침없이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지. 나의 붓질은 서툴렀고, 엉성했으며, 물감은 뚝뚝 흘러내렸다. 마치 오랜 억압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나는 이 밝고, 요란하며, 소리치는 듯한 푸크시아색 물감을 그 지루하고 칙칙한 브라운색 나무 위에 마구잡이로 문질렀어. 이것은 '예술'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공격'이었다. 나의 억눌린 자아가 분노와 함께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억눌러왔던 모든 것에 대한 격렬한 공격. 절제와 미니멀리즘에 대한 비웃음과 반격. 준호가 사랑했던 질서 정연한 세상에 대한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러워라'라고 속삭이던 아버지의 그림자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 나는 손목이 아파오고 어깨가 뻐근해질 때까지, 그 서랍장이 나의 회색빛 스튜디오 한가운데서 마치 불타는 듯한, 독기 어린 핑크색 등대처럼 찬란하게 빛날 때까지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내 심장은 그 어떤 록 콘서트장보다 더 뜨겁게 울부짖었다. 물감의 강렬한 냄새가 나의 폐부를 가득 채우며 나를 현실로 일깨우는 듯했다.


마침내 모든 붓질을 마쳤을 때, 나는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나 서랍장을 응시했어. 나의 몸은 온통 물감 방울로 얼룩져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의 심장은 마치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분노와 슬픔이 터져 나오는 듯 격렬하게 뛰었다. 서랍장은 정말 추악했다. 조악했고, 난잡했으며, 그 어떤 미적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 추함 속에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 진실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오롯이 나 자신의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속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어떤 감각을 느꼈어. 그것은 더 이상 패닉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감각. '이것은 내가 해낸 거야. 이 추악하지만 진실한 서랍장은 내가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나는 비로소 그 작은 서랍장 앞에서, 내가 살아왔던 삶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 발을 내디딘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작은 함성 소리 같았다.


그것은 내가 이룬 나의 첫 번째 '자율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썼던 글도 아니었고, 내가 연출했던 완벽한 저녁 식사도 아니었다. 그저 추하고, 요란하며, 유독성 같은 핑크색 서랍장.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치유의 끝이 아니었다. 그저 기나긴 여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이 서랍장 앞에서 처음으로 '지우'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닻'이 아닌, 오롯이 스스로의 빛으로 빛나는 '나' 자신을. 내 안의 뿌리가 비로소 새로운 땅에서 다시 자라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나의 영혼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커피와 온전한 받아들임


나의 스튜디오 한구석에 우뚝 솟아선, 그 요란하고 독기 어린 푸크시아색 코모드는 더 이상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나, 지우만을 위한 신성한 제단처럼 존재했어. 이전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던 내가, 이제는 오직 나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투영한 첫 결과물이었으니까. 매일 아침, 흐릿한 잠에서 깨어나 코모드 앞을 지날 때마다, 그 강렬한 색깔은 내게 아무 소리 없는, 그러나 너무나도 확고한 긍정의 고개를 끄덕여주는 듯했어. '너는 여기 존재해. 너의 색깔을 자랑스러워해. 그리고 너는 너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 없어.' 그 무언의 격려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감을 서서히 되찾아가는 듯했다. 그 색은 나의 용기와 도전을 대변하는 상징이자, 매일 아침 나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는 부적 같았다. 코모드에 덧칠된 붓 자국과 흘러내린 물감 자국까지도 나에게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내가 '흠결'이라 불렀을 모든 것들이 이제는 '진실'로 느껴졌다.



어울리지 않는" 카페: 혼돈 속의 위안


여전히 노트북을 붙들고 원격 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스튜디오의 삐걱거리는 고요함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이 문득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졌어. 나는 이제 더 이상 속도와 바쁨 속에 나를 감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밖의 회색빛 벽돌담을 응시하며 텅 빈 화면 앞에서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메말라가는 듯했다. 서울에서의 완벽한 삶은 물론 거짓된 환상이었지만, 적어도 그 속에서는 끊임없는 자극과 소음으로 내면의 공허함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고요함은 날마다 나를 그 공허함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내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스튜디오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고 이상한 카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혹은 이 고요함을 깨뜨려줄 단 한 조각의 혼돈이라도 갈망하듯이 말이야.


그 카페는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다. 빛바랜 꽃무늬 패브릭으로 덮인 낡은 소파들은 여기저기 찢겨 있거나 얼룩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과 무늬를 가진 접시와 컵들이 뒤죽박죽 놓여 있었다. 벽은 마치 낙서장처럼 이런저런 그림과 글씨들로 가득했고, 스피커에서는 언제나 카페를 가득 채우는, 귀청을 때리는 듯 시끄럽지만 왠지 모르게 흥겨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어. 그곳은 준호가 사랑했던 미니멀리즘과 절제의 미학과는 완벽하게 대치되는, 어쩌면 그의 '안티-카페'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어수선하고,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서울의 우리 아파트처럼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아, 되려 내 안의 불완전한 내가 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이 혼란스러운 풍경 속에 완벽하게 녹아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민-주를 만났다. 그녀는 키가 아담했고, 마치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오래전 시들어버린 나의 푸크시아색 호접란이 떠올랐다. '아, 이 사람은 자신의 색깔을 숨기지 않는구나.'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민-주는 한국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네덜란드계 캐나다인이었지만, 그녀의 거침없는 솔직함과 꾸밈없는 태도는 나를 단번에 매료시켰어. 그녀는 카페를 마치 거대한 허리케인처럼 활기차게 운영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그녀의 에너지는 나의 지쳐버린 영혼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혼돈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별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그 어수선한 카페 한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 노트북 화면에는 '원활한 통합'이라는 진부한 광고 문구를 어떻게든 써보려 애쓰는 내 모습이 비쳤다.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손은 왠지 모르게 무거웠고, 머릿속은 온통 공허함뿐이었다. 그때 민-주가 아무런 예고 없이 다가와, 묻지도 않고 내 앞에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툭 놓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 속 커피는 너무 진하고, 너무 뜨거워서 한 번에 마실 수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위안을 주는 커피였다. 그녀는 잠시 테이블을 닦다가 내 노트북 화면을 곁눈질하더니, 쿡 하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마치 둥근 구멍에 사각형 못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것 같아. 안 그래?"

나는 그녀의 돌발적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통합에 대한 글은 그만 써. 여기 있는 누구도 '통합'되지 않아. 아니, 통합되려 하지도 않지. 모두가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야." 그녀의 말은 내 허를 찔렀다. 나의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완벽이라는 허울 아래 억지로 욱여넣어 왔는지를 그녀의 솔직한 말속에서 깨달았다. 그녀는 테이블을 마저 닦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봐, 삶이란 원래 좀 삐걱거리고 어수선해야 제맛인 거야. 안 그러면 너무 지루하지 않겠어?"



진실을 품은 푸크시아색 코모드: 고백과 해방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어.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너무나 생경해서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다. 마치 오랜 체증이 한꺼번에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웃음이었다. 서울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터져 나온, 가식 없이 순수한, 날것 그대로의 웃음이었다. 나의 얼굴 근육은 경직되어 웃는 법조차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제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영혼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가벼움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민-주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 어느 날 밤, 카페 마감 시간. 우리는 빈 테이블에 마주 앉아 와인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고, 나는 어쩐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서랍장 한 면을 온통 요란한 핑크색으로 칠해버린, 나의 은밀하고도 기묘한 반항에 대한 이야기. 준호와의 찻주전자 사건부터, 호접란의 죽음, 그리고 그 색깔이 내게 주었던 해방감까지. 나의 삶에서 가장 부끄럽고 추하다고 여겼던, 엉성하고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거나, 적당한 충고로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녀에게도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치기 어린 객기처럼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주는 그저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살짝 들었다.


"푸크시아색이라니, 정말 용감하네. 지우."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사람들은 왜 밝고 선명한 색깔을 싫어하는지 알아? 왜냐면 그 색들은 '주목'을 요구하거든. 존재감을 드러내잖아. 그리고 주목은 곧 '책임'을 의미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순간, 그 색깔로 인한 모든 시선과 판단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책임 말이야. 너는 너의 색깔에 대한 책임을 진 거야." 그녀는 나를 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그것도 아주 근사하게 말이지."


그녀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동시에 메마른 대지에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듯한 충격과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는 과거에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이라는 이름 아래, 나의 열정과 본연의 색깔을 철저히 감추며 회색빛으로 살아왔던 거야. 아버지의 "부드러워라"는 말부터 준호의 "통일성"이라는 기준까지, 나의 강렬한 감정들, 내가 꿈꾸던 모든 열정은 타인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어두운 색으로 위장했다. 나는 나의 본연의 빛깔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것에 따르는 '책임'이 두려워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민-주는 그 한마디로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아픔과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나는 그녀의 통찰력에 압도당했다.


민-주는 나에게 어떤 조언도,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우뚝 솟은'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의 불완전함과 엉뚱함을 비웃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녀는 준호가 나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던 '이상적이고 차분한 아내'의 모습과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허용과 해방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대본 없는 삶: 발견되는 나


민-주와 함께 나는 천천히, 그리고 서투르게 '대본 없는 삶'을 사는 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어. 우리는 더 이상 대화의 주제를 고민하지 않았고, 때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그녀는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즐겼고,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열정적이고 때로는 파격적인 음악에 대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미니멀리즘을 끔찍이도 싫어하는지에 대해 마치 철학자처럼 열변을 토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껏 웃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나에게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나에게 '나도 저렇게 솔직하게 살아도 되는구나'라는 무언의 허락을 내려주는 듯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만이 '집'이 될 수 있다고 믿어왔어. 하지만 그날, 그 시끄럽고 어수선한 카페에 앉아 민-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집'이란 완벽한 장소나 이상적인 파트너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불완전함, 나의 독특함, 나의 '엉뚱함'이 결코 오류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언어'임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것이었다. 완벽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야 했던 나의 모든 어둠과 그림자마저도, 나를 이루는 소중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안의 진정한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분명히 그 '언어'를 알아듣고, 함께 기꺼이 소통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치유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그 혼돈 속에서, '나'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다운 집을 발견했다. 나의 영혼의 뿌리가 다시금 새로운 땅에서 자라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집' 말이다. 토론토의 회색빛 하늘 아래, 나는 불완전한 커피 한 잔 속에서 완벽하게 온전한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대본 없이, 날것 그대로, 오직 나의 진실한 색깔로 써 내려지고 있었다.



반음으로 된 말들



민-주는 나, 지우에게 존재의 화려한 색깔을 허락하고, 감춰두었던 자아를 드러낼 '권리'를 선물해 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눈빛과 솔직한 언어는 내가 스스로 쌓아 올린 높은 벽의 균열 사이로 스며들어왔지.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나의 '목소리'까지 줄 수는 없었어. 그 목소리는 오롯이 나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안전한' 광고 문구와 '완벽한' 클리셰 아래 겹겹이 묻혀버린, 마치 깊은 땅속에 묻힌 고대의 보물과도 같았지. 나의 진정한 목소리는 끊임없이 '좋아요'를 갈구하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던 과거의 그림자 아래에서, 속삭임조차 낼 수 없는 반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깊은 내면을 끊임없이 긁어대며 나를 괴롭히는 보이지 않는 상처였다. 곪아 터지기 직전의, 그러나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



노트와의 대화: 침묵의 저항


나는 토론토에 오면서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그 규칙을 상기했다. 나의 모든 비밀과 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 그 낡은 노트에만 나의 이야기를 쓰리라. 나는 결심했고, 왠지 모르게 비장한 마음으로 깨끗한 빈 페이지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써내려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서울 탈출에 대해, 준호와의 깨어진 관계에 대해, 그리고 스튜디오 한구석에서 요란하게 빛나고 있는 푸크시아색 코모드에 대해. 그 어떤 가식도 없이, 오직 진실하고 날것 그대로의 나의 감정을. 나를 괴롭히던 그 '진짜' 무엇인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빈 페이지는 나의 영혼의 거울이 될 터였다.


하지만 펜은 페이지 위에서 허공에 뜬 채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마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인 중력을 가진 것처럼, 펜촉은 종이와 간신히 거리를 유지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받으면 1분에 80 단어를 능숙하게 타이핑하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나의 손가락은, 이제 마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저항력에 부딪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듯, 단 한 글자조차 쉽게 써 내려가지 못했다. 나의 몸이 나의 영혼의 침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첫 시도로 이렇게 써보았다. "나의 결혼 생활은 불행해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내 펜으로 거칠게, 마치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격렬하게 그 문장을 지워버렸다. 진실이긴 했지만, 마치 싸구려 잡지의 가십 기사처럼 감정적으로 텅 비어 있는 문장이었다.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평범해서, 나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심경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의 영혼은 더 깊은 무언가를 갈구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번에는 다른 문장을 시도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이것 역시 몇 번의 시도 끝에 지워버렸다. 또 다른 진부한 클리셰. 마치 누군가의 시선과 판단을 염두에 둔 듯한, 잘 포장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의 영혼은 끊임없이 '진실'을 외쳤지만, 나의 손은 여전히 '듣기 좋은 말'을 갈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훈련된 나의 뇌는, 나 자신을 위한 언어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 안에는 내가 수년간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과 광호 팀장의 예리한 비판 속에서 '승인'을 얻기 위해 키워왔던 강력한 편집자가 여전히 건재했다. 그는 나의 감정들이 깔끔하고, 논리적이며, 아름다운 수사학적 표현으로 포장되기를 요구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너무나 거칠고, 흉했으며, 세상에 내보일 가치가 없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가위에 눌려 나의 진정한 감정들을 재단하고 있었다. 마치 꽃잎을 솎아내듯, 나의 가장 솔직하고 빛나는 감정들을 버리고 있었다. 나의 영혼은 내 안의 이 편집자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귀환: 터져 나오는 분노와 고백


나는 그제야 광호 팀장이 나의 글을 향해 내뱉었던 "글이 죽었다"는 비판을 떠올렸다. 그 단어는 나의 가슴에 꽂혀 여전히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너무 시끄럽구나, 아가"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도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여전히 '반음'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솔직하게, 너무 크게 외치면, 다시금 세상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두려움. 그것이 나를 펜조차 들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의 영혼은 그 두려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자유롭게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그 끈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노트 위로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차단한 채, 오직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여덟 살의 내가 있던 그 낡은 음악 교실로 돌아갔다. 창밖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낡은 마루는 희미한 빛을 반사하던 그 공간. 아버지의 차가운 한 마디에 움츠러들어 작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아버리던, 그 어린 지우의 나약하고 슬픈 모습. 그 슬프고 무기력했던 과거의 순간으로. 나는 다시 바이올린을 든 나를 상상했다. 섬세한 나무의 질감이 손에 느껴지고, 차가운 활이 현 위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활을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분노'를 허락했다. 내 안에서 들끓는 모든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화를. 나 자신을 억압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바이올린 활이 현을 격렬하게 긁으며 내는 날카로운 소음마저도 기꺼이 허락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격렬한 분노가 휘몰아치는 대로 펜을 휘갈겼다. 그것은 글쓰기가 아니었다. 노트의 페이지 위로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피고름을 토해내는 행위였다. 나는 그날을, 내가 스스로를 억압해야만 했던 그 슬프고 나약했던 나를, 그리고 나의 삶 전체를 증오했다. 나는 나 자신이 축소되어야만 했던 모든 순간들을 저주했다. 준호가 나의 존재를, 나의 열정을, 나의 아픔을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비통함을 토해냈다. 그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이 노트 가득 새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가장 미워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상황을, 나의 삶을 타인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가장 잔인한 가해자였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비겁함, 나의 나약함. 이 모든 것들이 페이지 위에 춤추듯 펼쳐졌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절제되지 않고 거칠었다.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글은 비난과 원한, 분노와 자기 연민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나의 '완벽했던' 모습, 그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모든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짜였는지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완벽한 것은 완벽하게 죽은 것과 같았다.


나는 준호의 '평안(平安)'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삶의 아름다운 배경이었을 뿐이었다. 고요하고 조화로운 공간을 채우는, 그저 한 폭의 그림에 불과했던 나. 나는 준호가 나를 그런 역할에 가두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그를 미워했다. 하지만 가장 증오했던 것은 그 역할을 그토록 완벽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연기했던 나 자신이었다. 나의 완벽한 연기 속에 나의 영혼이 질식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의 비통함이란. 이 감정은 페이지 위에 먹물처럼 번져나갔다.


이 글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감정의 파도처럼 종횡무진 넘나들었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였다. 정돈된 문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안의 편집자는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과 추함 속에서, 마침내 '생명'이 느껴졌다.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살아있는 에너지. 짓밟혀도 다시 솟아나는 생명력.



첫 진실한 소리: 나의 무게, 나의 진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글을 마쳤을 때, 나는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린 듯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어. 마치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른 것처럼 탈진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수십 년 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과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써왔던, 세상에 내보일 글이 아니었다. 이 글은 그저 오랫동안 댐 속에 갇혀 있던 물줄기가 마침내 터져 나온, 첫 균열에 불과했다. 작은 균열이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의 힘은 거대했다. 나의 내면에서 터져 나온 붉은 용암과 같았다.


나는 아직 '나만의 목소리'를 완전히 찾지는 못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소리'를 찾았다. 크고, 불협화음을 내는 듯했으며, 때로는 듣기 불편할 정도로 날것 그대로였다. 나의 아픔과 분노, 슬픔과 혼란이 뒤섞여 뒤엉킨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 없는, 나 자신의 '진실한 소리'였다. 오랜 시간 동안 침묵하고 억압되었던 나의 영혼이 비로소 세상에 외치는 소리였다. 마치 굳게 닫혔던 바이올린 케이스가 열리고, 활이 거침없이 현을 켜는 소리처럼.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마치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이 글은 여전히 '추했다'. 논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이고,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학적으로 훌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추함 속에는 내가 찾고 있던 '나'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나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 나는 오직 이 방식으로만 글을 쓸 것이라고. 나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솔직하게, 그리고 '크게' 외치듯이. 누가 나에게 다시 '좀 더 부드럽게 쓰라'라고 속삭이든, 이제 더 이상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나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혼을 다시 침묵 속에 가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에 아직도 펜의 감촉이 생생했지만, 더 이상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던 것이 '압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의 무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분명 무거운 무게였지만, 그 무게는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더 이상 타인의 짐이 아니었다. 나의 어깨 위에는 나 자신의 삶이 놓여 있었고, 나는 비로소 그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무게는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 아니라, 나를 단단히 지탱해 주는 새로운 뿌리였다. 나의 영혼의 바이올린은 이제 스스로의 소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비록 완벽한 음색은 아닐지라도, 그 소리는 진실했다. 그리고 그 진실함 속에서, 나는 나의 삶이 비로소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토론토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의 새로운 숨결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고 있었다.


닫히는 바이올린 케이스



나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분노와 아픔, 그리고 자기 연민이라는 이름의 독액을 노트 페이지 위에 쏟아내고 난 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희한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해방감인 동시에, 나의 존재를 관통하는 어떤 깊은 공명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짓눌렸던 영혼의 무게추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져 자유를 얻은 듯한 울림이었다. 이 터져 나온 감정의 용암 속에서, 나의 영혼은 비로소 오랜 시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는, 문득 지극히 사적이고도 원초적인 욕망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비난이나 원망의 화살을 날려 그의 가슴에 꽂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를, 나의 각본 속에 박제된 '아버지'라는 차갑고도 엄격한 역할이 아니라, 나와 같은 불완전함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어쩌면 나를 억압하던 그 오래된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 손으로 직접 닫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케이스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함이었다.



보내지 않은 편지: 과거와의 섬세한 교감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은 내 안의 또 다른 치열한 싸움이었다. 나의 노트 속에 거칠게 토해냈던 '너무 시끄럽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은, 아버지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냉정한 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어쩌면 나약함이라 치부하며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언어는 질서와 절제, 그리고 때로는 무관심이라는 이름의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그의 세계는 내가 존재하기 시작한 새로운 혼돈의 우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질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차가운 이성을 붙잡고 글을 써 내려갔다. 나의 떨리는 손가락 끝은 오랜 침묵을 깨고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나약한 새싹처럼 느껴졌다. 편지 속에는 나의 비통함이나 원망 대신, '바이올린' 이야기가 담겼다. 어린 시절, 바이올린 활이 현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온몸으로 느껴지던 생생한 전율. '헝가리 무곡 5번'을 연주하던 여덟 살의 어린 내가 어떻게 세상의 모든 소리와 하나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연주가 나의 영혼을 얼마나 충만하게 했는지에 대해 썼다. 그 멜로디는 단순한 음표의 배열이 아니라, 어린 나의 가장 순수한 환희이자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 연주가 아버지의 "너무 시끄럽구나, 아가. 조금 더 부드럽게 해라"는 차갑고 날카로운 한마디에 어떻게 멈추었는지도 담담하게 적었다. 마치 오랜 세월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을 다시 녹여내는 것처럼.

나는 편지에서 그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내가 그의 말 이후에 스스로를 어떻게 숨기고 축소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나를 향해 건넸던 고요하고 다정한 '끄덕임'이, 그 자신은 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정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을 그 몸짓이, 나에게는 '사랑받기 위해서는 더 작아져야 해', '내 목소리를 죽여야 해'라는 잔인한 신호로 각인되었음을. 그 무심했던 신호가 나의 삶 전체를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나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고, 나의 목소리를 침묵시켰으며, 나 자신의 선율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음을. 이 편지는 내가 그의 말로 인해 어떻게 나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멀어져 갔는지를 설명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었다.

나는 편지에서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상태를 진술할 뿐이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부드러운' 딸이라는 이상에 맞추기 위해 너무나 오랫동안 애쓰느라, 제 자신의 고유한 선율을 잃어버렸습니다. 바이올린 활이 현을 떠난 후, 제 삶의 모든 음악은 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을 떠난 것은 당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의 진정한 '음량'을, 저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스스로의 음악을 연주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편지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나의 오랜 침묵에 대한 장엄한 선언이기도 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나는 한참 동안 그 종이를 두 손에 들고 있었다. 손끝에서 종이의 얇고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편지는 완벽했다. 모든 감정이 섬세하게 조절되었고, 진실하면서도 정돈된 문장이 마치 잘 닦인 보석처럼 빛났다. 내가 써왔던 광고 문구들처럼 유려하고 논리 정연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는, 명확한 '종결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이 편지가 이토록 완벽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아버지에게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완벽함은 때로 진실을 가리는 가장 교묘한 가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증인 없는 화해: 불타는 종이, 떠오르는 자유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낸다는 것은, 또다시 그의 '승인'이나 '이해'를 갈구하는 행위가 될 터였다. 그의 답장을 기다리고, 그의 사과나 변명에 나의 감정을 또다시 종속시킬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나의 기대만큼의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나는 또다시 '거절'당했다는 깊은 상처와 실망감에 빠져들겠지. 그것은 끝없는 상처의 고리를 재가동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의 치유는 다른 사람의 반응에 달려 있지 않았다. 나의 치유는 오롯이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의 '증인'이자 '재판관'이 되어야 하는, 지극히 내밀하고 고독한 과정이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그 누구의 판단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나의 내면만이 이 과정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 앞으로 걸어갔다. 그 요란하고 독기 어린 색깔의 서랍장은 이제 나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성한 제단처럼 느껴졌다. 손에 든 편지를 조심스럽게 구겨 작은 뭉치를 만들고, 나의 주머니에 있던 작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불꽃이 편지 끝을 집어삼키는 순간, 종이는 마치 고통받는 생명체처럼 파르르 떨었다. 나는 타오르는 종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붉고 뜨거운 불꽃이 종이를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것을, 나의 감정과 진실이 담긴 글자들이 열기 속에 뒤틀리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종이가 쪼그라들고 이내 검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동안, 나는 어떤 슬픔도, 어떤 미련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온몸의 세포가 열리는 듯한 깊은 '힘'과 해방감을 느꼈다. 내 안의 오랜 족쇄가 마침내 풀리는 듯한 자유였다. 마치 오랜 병마에 시달리던 몸에서 독소가 빠져나가는 듯한 정화의 순간이었다.

그 불꽃 속에서, 나는 치유의 근본적인 진실을 깨달았다. '화해'는 다른 사람의 물리적인 존재나 그들의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화해는 내면의 행위였다. 상대방에게 나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신, 나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나 스스로가 오롯이 받아들이는 과정. 그 불꽃 속에서 나의 상처와 분노가 재가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했다.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역시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자기 자신도 미숙하고 서툴렀던 한 존재로서, 딸에게 상처를 주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방식대로 딸을 '사랑'하려 했던 한 명의 아버지였음을. 비록 그의 방식이 옳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나는 그를 미워하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그의 한계를 이해하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는 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고정관념에 갇힌 채 자신만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나 자신을 용서했다.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믿어왔던, 어리석었던 나 자신을. 완벽함이라는 이름의 환상에 속아 내 삶의 진짜 주인이기를 포기했던 나 자신을. 나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 숨어 지냈던 나를.

편지가 재로 변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나는 마치 무겁고 오래된 '바이올린 케이스'가 마침내 완전히 닫히는 것을 느꼈다. '딸로서의 지우', '아내로서의 지우', '카피라이터로서의 지우'. 그 케이스는 과거의 억압과 침묵, 그리고 타인의 기대로 가득 찬 나의 옛 삶을 상징했다. 그 안에는 어릴 적부터 나의 목소리를 짓눌렀던 모든 낡은 악보들이 담겨 있었다. 이제 케이스는 닫혔고, 나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과거의 무게가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앞으로 나의 삶의 음악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때로는 조화롭지 않고,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며, 심지어 '음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서툰 멜로디는 전문가의 귀에는 거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 지우가 스스로 지휘하고 연주하는 음악이다. 타인의 기대와 완벽함의 압박에서 벗어나, 나만의 '새로운 선율'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여정. 그 선율은 완벽하지 않아도,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할 것이고, 가장 '지우'다운 소리로 울려 퍼질 것이다. 나의 손에는 더 이상 활이 아닌, 나의 삶을 연주할 지휘봉이 쥐어져 있었다. 나의 삶은 이제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는 닫혔지만, 내 영혼의 오케스트라는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음표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 미지의 음악은 나 자신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세레나데가 될 것이리라.


자기 결정의 행동



과거의 망령과 마침내 화해하고 나니, 내 몸, 지우의 몸은 이전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리적 가벼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어깨를 짓눌러왔던 거대한 바위를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하면서도 가슴 벅찬 해방감이었다. 나의 영혼을 속박하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녹아내린 듯, 모든 근육과 세포 하나하나가 자유롭게 숨 쉬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타인의 기대라는 보이지 않는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았다. 이 가벼움은 나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얼어붙었던 '창조력'을 마침내 깨웠다. 마치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샘물이 마침내 얼음을 깨고 힘찬 물줄기를 뿜어내듯,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에너지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나는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펜 끝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은 예감에 온몸이 전율했다.


거절의 편지: 울림 있는 고백과 진실의 대가

내 영혼이 마침내 자유로워진 후, 내가 외부 세계를 향해 내뱉은 첫 번째 '큰 목소리'는 한 통의 편지였다. 나의 서울 시절, 가장 중요하고도 견고했던 고객이었던 그 거대 IT 기업, 내가 더 이상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절망하며 나의 글쓰기 능력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던 바로 그 회사로 보낸 편지였다. 나는 이 결정으로 나의 유일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을 잃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그 화려했던 경력은 이제 종이 한 장 위에 남은 숫자에 불과할지라도, 당장 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믿지 않는 제품에 대해, 영혼 없는 문구로 '꿈'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었다. 나의 진정한 목소리를 다시 죽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비즈니스 레터 대신, 나의 영혼이 직접 쓴 듯한, 놀랍도록 '솔직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나의 손이 나의 뇌를 거치지 않고, 심장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제품을 위해 일할 수 없다고 적었다. 나의 새로운 윤리관, 즉 '진실성'과 그들의 제품이 '공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구차하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떠난다'는 식의 진부한 클리셰나,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는 기교는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습관을 떨쳐내듯, 그 어떤 인위적인 포장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썼다. 나의 영혼이 외치는 그대로를.

"저는 더 이상 제가 진심으로 믿지 않는 꿈을 팔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당신들의 힘이었던 저의 목소리는 이제 저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저 자신을 재정의하고, 저의 삶의 지휘봉을 다시 잡는 '자기 결정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어처구니없는' 편지였다. 기업과의 관계에서 이런 식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고백은 듣도 보도 못한, 비전문적인 행동이었다. 나의 서울 시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것이야말로 내 경력 사상 가장 '정직한' 편지였다. 나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피와 살로 이루어진 진실된 고백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떨리는 손으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나의 모든 과거와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광호 팀장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는 그가 나의 행동을 비웃거나, 무책임하다고 질책하거나, 혹은 나의 결정을 무효화시키려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답장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그는 나를 꾸짖기는커녕, 단 한 문장을 보냈을 뿐인데, 그 짧은 문장은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잘했어, 지우. 드디어 네가 '큰 소리'를 내는구나." 그의 글에서는 과거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태도 대신, 오랜 시간 나를 지켜봐 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깊은 이해와 따뜻한 지지가 느껴졌다. 마치 오랜 겨울 끝에 찾아온 봄바람처럼. 그의 한마디는 나의 모든 고뇌와 투쟁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듯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 눈물은 실패나 좌절의 슬픔이 아닌, 진정한 해방감에서 오는 기쁨과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나의 존재가 마침내 온전히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만 구천 단어: 나의 숲을 만들다

오래되고, 겉으로는 견고해 보였지만 실은 낡은, 그리고 나의 유일했던 수입원을 잃고 나니, 나는 또 다른 냉혹한 현실에 직면했다. 이제 정말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했다. 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자, 나의 새로운 존재 이유를 찾는 일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창조의 불꽃을 다시 한번 깨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임을 직감했다. 나의 영혼이 외치는 길이었다.

나는 나의 낡은 노트를 다시 꺼냈다. 거기에는 지난 장에서 내가 격렬하게 써 내려갔던, 그 '추하고' '거칠지만' '진실한' 말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피와 눈물, 땀방울이 응축된 나의 가장 솔직한 언어들. 나는 이제 그 날것의 감정들을 토대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장르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이 글을 읽을까, 누가 이것을 출판할까 하는 걱정은 나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저 나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나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끊임없이 쓰고 또 썼다. 나의 이야기가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는 듯했다.

나는 낡은 찻주전자와 시들어버린 푸크시아색 호접란에 대해 썼다. 준호의 '평안(平安)'이라는 이름의 '닻'이 나의 삶을 어떻게 옥죄었는지, '사랑받기 위해 축소되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갔는지에 대해 썼다. 토론토의 스튜디오 한구석에서 요란하게 빛나고 있는 푸크시아색 코모드가 내게 안겨준 해방감과 용기에 대해 썼다. 이 모든 글은 '지우'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나의 진실된 탐구이자 고백이었다.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었다. 나의 펜은 나의 영혼과 직접 연결된 듯, 거침없이 종이 위를 달렸다. 단어들은 나의 손끝에서 생명력을 얻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글을 쓰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 펜을 놓았을 때였다. 창밖의 회색빛 하늘은 어느덧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겨 있었다.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노트북 화면에 찍힌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만 구천 단어'. 나의 검지손가락이 수없이 많은 자판을 눌러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숫자였다. 준호나 광호 팀장이 원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다듬어지고 논리적으로 짜인, 상품성 있는 텍스트는 아니었다. 문장 곳곳에는 거친 표현과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비문과 오탈자도 분명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글보다도 '진짜'였다. 날것 그대로의, 살아 숨 쉬는 나의 영혼이었다. 나의 손끝에서 피어난 숲과도 같았다. 내가 지난 삶의 파편들을 모아 정성껏 가꾼, 나만의 우주였다.


새로운 미학: 나의 숲과 나의 빛

그날 저녁, 나는 민-주와 만났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또 다른 자아이자, 나의 영혼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서울의 IT 기업에 보낸 거절의 편지, 그리고 노트북 안에 쌓여가는 만 구천 단어의 글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민-주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깊었고, 그 안에는 따뜻한 이해와 함께 알 수 없는 반짝임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지 않았다. 나에게 '잘했다'는 식의 상투적인 격려도 건네지 않았다. 민-주의 방식은 언제나 그랬듯 직관적이고 본질을 꿰뚫는 것이었다. 대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나의 존재를 재정의했다.

"보이니? 너는 건축가이기를 멈추지 않았어, 지우. 다만 남의 가족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을 멈췄을 뿐이야. 이제 너는 너 자신의 '숲'을 짓고 있어."

그녀의 말은 나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숲'. 그것은 나의 새로운 성공의 정의가 되었다. 나의 숲은 준호가 설계했던 서울의 아파트처럼 대칭적이고 미니멀리즘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나의 숲은 울창하고, 야생적이며, 밝고 강렬한 색채로 가득했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혼란스럽고, 때로는 위험한 짐승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수많은 나무와 생명체들.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생동감이 넘실대는 곳. 그곳은 비로소 내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진정한 나의 고향이었다. 나의 숲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반음'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는 여전히 스튜디오 한구석에 우뚝 서 있었다. 요란하지만 든든한 등대처럼, 혹은 나의 여정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그것은 내게 말 없는 약속을 건네는 듯했다. '너의 진실은 세상의 기준에서 아름다울 필요 없어. 그저 너의 것이면 돼.' 이제 나는 내가 겪었던 모든 불완전함과 아픔, 그리고 나의 솔직하고 거친 감정들까지도 하나의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코모드처럼, 이 만 구천 단어의 글처럼. 나의 가장 추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이 가장 아름다운 진실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싸움의 끝이 아니었다. 나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장은 마침내 끝났다. 이제 나, 지우는 나의 삶에 바치는 새로운 장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존재하고, 창조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그리고 나는 이제 확신했다. 나의 말들이, 나의 진정한 목소리가, 마침내 자유롭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라는 것을. 나의 영혼은 푸른 하늘을 향해 힘껏 날갯짓을 시작했다. 나는 나만의 숲을 걸으며, 나만의 노래를 부르고, 나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출 것이다. 이것은 완벽한 삶이 아닐지라도, 가장 나다운 삶이 될 것이리라.


존재하지 않던 음악



나는 민-주 카페의 익숙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그러나 이제는 편안함마저 주는 공간 속에 앉아, 새로 시작한 글쓰기 작업의 초고를 다듬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 위에는 나의 영혼이 쏟아져 나온 만 구천 단어의 기록들이 빼곡했고, 나의 새로운 푸크시아색 후드티는 이제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활기 넘치는 색깔이 나의 내면의 변화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굳건한 갑옷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모습으로,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색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낯설지만 감미로웠다.

카페에서는 민-주가 고른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인디 포크 음악이었는데, 마치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처럼 모나고,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날것 그대로의' 느낌을 품고 있었다. 그 음악은 그 자체로 타인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듯했다. 마치 나의 분홍색 코모드가 그랬듯이, 이 음악 역시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음악이, 나의 푸크시아색처럼, '주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낯설지만 나의 영혼을 깊이 끌어당기는 그 선율에, 나의 오래된 상처들이 조금씩 치유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카페를 둘러보았다.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카운터 뒤, 민-주 옆에 서서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조작하고 있는 한 남자에게 닿았다. 그는 나보다 대략 대여섯 살 정도 어려 보였다. 길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듯한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 같았고, 그의 손목에는 뭔가 엉성하고 난해해 보이는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서울의 완벽주의적 기준에서 '성공적'이라거나 '잘 정돈된' 외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든 것에서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분방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마치 이제 막 뿌리내리기 시작한 나의 숲에서 자란, 가장 야생적인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바로 현-진이었다.


티셔츠 위의 말들: "나는 실용적이지 않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과거의 지우라면, 아마 즉시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거나, 그의 시선을 불편해하며 펜 끝을 노트에 박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달랐다. 내 안의 새로운 용기가 나를 이끌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나의 작은 용기에 보답하듯,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났고, 그는 망설임 없이 나의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가 내뿜는 에너지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의 티셔츠에는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모든 가치, 즉 '실용성', '효율성', '완벽함'과 완벽하게 대치되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실용적이지 않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 글귀는 나의 새로운 인생 좌우명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그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미소는 넓고, 꾸밈없었으며, 내가 서울에서 겪었던 그 어떤 완벽하게 포장된 친절함보다도 더 따뜻하고 진심 어린것이었다. 그 미소 속에는 그 어떤 의도도, 그 어떤 계산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곡 어떠세요? 지금 나오는 거요. 제 플레이리스트인데, 되게 이상한 곡이죠?"

"좋아요." 나는 짧게 대답했지만, 나의 영혼이 동의한다는 듯 울림을 전해왔다. "이 곡은… 진짜 같아요. 꾸밈이 없어서 좋아요." 나의 말은 그 음악의 본질을 꿰뚫은 듯, 현-진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나의 영혼에 와닿는 솔직하고 날것 그대로의 음악.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록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라고 소개했다. 이곳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튜디오 사용료를 번다고 했다. 그는 '커리어'를 쌓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저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삶을 계획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삶이 자신을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곧 음악이었고 삶이었다. 그는 마치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를 그대로 의인화해 놓은 듯한 존재였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빛을 내는 존재.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내가 오랫동안 갈구해 왔던 '자유'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근데 당신은요?" 현진이 나의 푸크시아색 후드티와 테이블 위의 노트북, 그리고 나의 굳은 표정을 번갈아 보더니 농담조로 물었다. 그의 시선은 꿰뚫는 듯했으나, 따뜻했다. "어째 당신은 마치… 아주 심각한 재무 보고서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아요."

나는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에도 가식 없는,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내 얼굴의 근육이 비로소 완전히 풀어진 듯했다. "나는… 나의 삶에서 도망쳤어요." 나의 입에서 나온 진실이 그렇게나 가볍고 평온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이제는 객관적인 사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에서의 완벽했지만 공허했던 삶, 준호와의 결혼 생활에서 느꼈던 답답함,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쳤던 나의 일에서 찾아온 절망감에 대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더 이상 통증이나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났던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을 그 이야기 속에서 분리시켜, 객관적인 화자로 나의 지난날을 덤덤하게 풀어냈다. 현-진은 내 말을 단 한 번도 끊지 않았고, 어떤 충고나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나의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고, 그 안에 나의 모든 아픔이 스며들어도 괜찮을 것 같은 무한한 너그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나의 모든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듯했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안전함'을 느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나의 새로운 푸크시아색 후드티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가슴 깊이 파고드는 통찰력으로 말했다. "지우 씨는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가장 낮은 볼륨으로 연주되던 노래 같아요. 심지어 자신조차 그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할 만큼요.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볼륨을 최대로 올려버린 거지.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귀 아프다고 놀라지만… 이건 당신의 원래 '볼륨'인 거예요. 이제야 당신의 진짜 소리가 나는 것뿐이죠."

그는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바이올린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아버린 후에, 나의 모든 음악이 '반음'으로 연주되어 왔다는 사실을. 나의 과거를 몰랐다. 그는 내가 스스로 켜켜이 쌓아 올렸던 침묵의 껍질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 갇혀 있던 나의 진정한 '소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영혼이 그제야 비로소 온전히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진은 나의 살아있는, 실용적이지 않은, 시끄러운 푸크시아색 코모드였다. 그는 나의 닻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억눌렸던 삶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는, 살아 숨 쉬는 음악이었다. 그와 함께 나는 처음으로 이 음악에 맞춰 춤출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설령 내가 추는 춤이 조금은 어설프고, 발이 엉키는 '엇박자'일지라도. 이제 나는 내가 만든 음악에 맞춰,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춤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바이올린은 이제 어떤 속박도 없이 자유롭게 활을 움직이며, 나만의 멜로디를 세상에 울려 퍼뜨릴 것이다. 현-진이라는 새로운 리듬은 나의 삶에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화음을 더하고 있었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막 그 서막을 연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처럼,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즉흥성의 교훈과 회전목마


현진은 나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의 방식은 역시나 나의 오랜 관습과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그것은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근사한 저녁 식사나, 심지어 미술관 관람(준호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완벽한 계획과 교양 있는 만남이 그의 미덕이었다.)이 아니라, 그가 즐겨 쓰는 말처럼 '탐험'이었다. 나는 나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데이트란 으레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세심하게 계획되고 준비된 이벤트라고 배워왔으니까.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의 눈빛은 어떤 의미일까. 온갖 질문과 계산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무심코 긴장감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나는 불안감에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구글 맵스 앱을 열어 목적지를 찾으려 했다. 익숙한 계획과 통제 속에서만 안도감을 느끼던 과거의 지독한 습관이었다. 미지의 영역은 언제나 나에게 불안의 씨앗을 심어주었으니까.

그는 나의 행동을 보더니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의 눈가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고, 그 웃음 속에는 나의 긴장을 녹이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목적지를 미리 알면 그건 '탐험'이 아니지, 지우. 그건 그냥 '계획된 여행'이고. 그리고 우린 '계획'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그의 말은 나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기보다는, 나의 통제 욕구를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해방감 또한 느꼈다. 마치 오랜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작은 날갯짓처럼, 나의 영혼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듯한.



안티-데이트: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평온


우리의 '탐험'은 낡고 삐걱거리는 오래된 트램을 타고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트램은 느렸고, 때때로 기분 나쁜 쇳소리를 냈지만, 나는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나의 내면은 이미 수많은 불완전함들을 받아들였기에, 외부의 불완전함이 더 이상 나를 흔들지 않았다. 현-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패한' 밴드 활동에 대한 농담을 늘어놓았고, 그의 이야기 속에는 좌절과 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이 모든 것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까?'라는 외적인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준호와의 데이트는 항상 완벽한 그림을 위한 연극이었지만, 현-진과의 시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의 영혼이 비로소 외적인 시선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트램의 종착역은 낡고, 관리되지 않아 조금은 잊힌 듯한 작은 놀이공원이었는데, 한 시간 뒤면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녹슨 대관람차가 삐걱거리며 황혼 속에 잠겨 있었고, 색이 바랜 회전목마와 페인트가 벗겨진 놀이기구들이 스산한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폐허가 되어가는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곧 사라질 곳들을 좋아해요." 현-진이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덧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응시하는 시인의 그것과 같았다. "그런 곳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가장 진짜 같아서 좋아요. 아무런 가식도, 척도 하지 않으니까." 그의 말은 내가 늘 찾아 헤매던 '진실'과 맞닿아 있었다. 이 낡고 오래된 공간은 나에게 너무나 진실하게 다가왔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푸크시아색 코모드'처럼 느껴졌다.


그는 가장 달콤하고, 가장 몸에 해로운 설탕 솜사탕 두 개를 사서 내 손에 쥐여주더니,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나를 회전목마로 이끌었다. '분기별 계획'까지 세워 삶을 통제하던 내가, 이제는 낡은 목마에 앉아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낡은 회전목마 위에서 흐르는 낡은 오르간 음악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했다.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순수한 기쁨이 나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낡은 나무 목마에 나란히 앉아,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돌고 또 돌았다. 목마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음악에 맞춰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기억했다. 준호는 항상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장소"는 자신에게 불안감을 준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놀이공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겠지. 그런데 나는 지금, 혼돈의 한가운데, 그가 가장 혐오했을 법한 '소음'과 '색깔'과 '혼란'의 중심에서, 더없이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영혼은 맑고 투명한 유리창처럼 이 모든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끄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 기계음, 그리고 현-진의 낮은 콧노래가 뒤섞여, 나의 오랜 침묵에 새로운 소리들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저, 존재하라: 행복이라는 회전목마


어느새 회전목마가 서서히 멈추고 우리가 목마에서 내려올 때였다. 현-진은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은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 어떤 가식도 없는, 맑고 투명한 호수 같았다. 그의 눈빛은 나의 깊은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시선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지우 씨는 너무 많이 분석해요." 그가 비난하는 투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을 옥죄며 살아온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의 따뜻한 시선은 나를 녹이는 듯했다. "나는 지우 씨가 매 순간을 설계하고, 완벽하게 통제하려 애쓰는 걸 볼 수 있어요. 마치 끊임없이 다리를 놓듯이. 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다리를 굳이 애써 만들 필요는 없어요, 지우 씨. 행복은 그냥 '회전목마' 같은 거예요. 그냥 존재하는 거지. 그리고 당신은 그 위에서 그저 타고 있으면 되는 거야."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준호는 내가 '다리'를 건설하는 데 기꺼이 동참했던 공범자였다. 그는 '완벽하고 견고한 다리'를 함께 짓고 싶어 했고,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혔다. 하지만 현-진은 나를 그 복잡하고 고된 건설 현장에서 벗어나, 행복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에 태우는 '초대장'이었다. 나의 삶의 지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감미롭고도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조금 후, 우리는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식어버린 솜사탕을 나눠 먹고 있었다. 눅눅해진 솜사탕은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평온함은 달콤함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해가 지고 별이 하나둘씩 뜨는 놀이공원 위에서,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여덟 살의 내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아야만 했던 그날의 슬픔. 아버지의 한마디가 나의 영혼을 어떻게 축소시켰는지. 그리고 내가 '부드러운' 딸이 되기 위해, '조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7장). 나는 내 삶의 가장 아프고 어두웠던 부분들을 그에게 기꺼이 보여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의 진실이 부끄럽거나 나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진은 이번에도 나에게 "이제 더 크게 소리 내라"거나 "자유롭게 표현하라"는 식의 흔한 조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나를 깊이 들여다본 후, 나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나의 모든 관점을 뒤집어 놓았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안전하기'를 바랐어. 전 남편도 당신이 '안전하기'를 바랐고. 그들의 사랑은 모두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 그런데, 지우 씨는요?" 그가 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몸을 숙였다. 그의 눈빛은 강렬했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의 손이 나의 손등 위에 살며시 얹혔다. 온기가 스며들었다. "지우 씨, 당신은 '안전하기'를 원해요, 아니면 '살아가기'를 원해요?"


그 질문은 그 어떤 비난이나 질책보다도 강력하게 나를 강타했다. 나의 삶 전체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나의 삶 전체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안전'을 최우선으로 선택해 왔던 나의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정된 직업, 예측 가능한 결혼, 사회가 원하는 완벽한 이미지. 그 모든 것이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살아가는 것'을, 나의 온전한 생명력을 만끽하며 존재하는 것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나의 영혼은 안전한 상자 속에 갇힌 채 숨만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실용적이지 않은' 데이트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깨달았다. 사랑이란 반드시 '닻'처럼 나를 묶어두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은 어쩌면 현-진의 음악처럼 자유로운 '리듬'일 수도 있고, 내가 올라탄 회전목마처럼 나를 즐겁게 '회전'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를 어떤 곳에도 붙잡아 두지 않고, 나를 움직이게 하고, 춤추게 하는, 생명력 넘치는 그 무엇일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영혼은 더 이상 닻에 묶인 배가 아니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나아가는 범선이었다. 그리고 나, 지우는 이제 기꺼이 그 회전목마에 올라타 마음껏 돌고, 때로는 어설프게 흔들리며 춤추는 법을 배워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삶은 이제 새로운 리듬에 맞춰, 나만의 멜로디로 연주될 것이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벗어나, 생동감 넘치는 '삶'이라는 축제로 나아가는 나의 새로운 발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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