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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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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솔

완벽의 환상


만약 삼 년 전의 나, 지우를 만났더라면, 스치는 사람 누구라도 내게 '인생의 복권에 당첨된 여자'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거야.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남산 타워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진 대형 광고 에이전시.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가장 깊숙한 욕망을 건드리는, 꿈같은 이야기들을 엮어냈지.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명품', '사랑을 시작하게 할 한 송이 꽃'처럼, 사람들의 희망과 결핍을 채워줄 환상을 정교한 언어로 포장하는 일이 내 주특기였어. 연필 끝에서 춤추듯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마법 같았고, 그 대가로 내 통장은 언제나 두둑했지.


내 곁에는 늘 믿음직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차분하고 깊은 눈매의 건축가 남편 준호가 있었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물들처럼, 그는 삶의 균형과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우리는 한강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어. 해 질 녘이면 붉게 물든 노을이 강물 위에 찬란한 금빛 길을 놓았고, 그 빛은 거실 창을 넘어 우리 집의 티끌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까지 스며들었지. 그야말로,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는 순간 수천 개의 '좋아요'가 폭포수처럼 쏟아질 만한, 흠잡을 데 없는 삶의 정수 그 자체였어.


하지만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잖아. 내게는 단 하나의, 그러나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어. 나는 그저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아니었다는 거야. 마치 어느 전람회에 전시된 조각품처럼, 너무나 정교하게, 완벽하게 '디자인된' 존재였지. 세상이 원하는 틀과 내가 꿈꾸는 나 자신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간극을 경험했어. 한강을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면서도, 그 황홀한 빛이 내 안의 어딘가 텅 빈 공간까지는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미미한 아픔.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허물을 벗어던지고 싶은, 간절하고도 비밀스러운 갈증과도 같았어. 완벽함 뒤에 숨겨진, 진짜 나의 얼굴을 찾고 싶은 갈증 말이야.




황금 새장


내 삶은 마치 황금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겉은 화려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새장과도 같았어. 우리 결혼기념일 저녁, 준호는 나를 자기 품에 꼭 안고는 친구에게 속삭였어. "지우는 내 '평안(平安)'이야. 내 삶의 '닻'이지." 그의 목소리는 사랑스러웠지만, 그 말은 내게 비수처럼 꽂혔어. '닻'이라니. 나는 그의 삶을 제자리에 붙들어 매는 존재인데, 그럼 나의 '파도'는 어디에서 일렁일 수 있을까? 나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걸까. 그가 말한 '평안'은 내게 자유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 너무나 단단히 나를 묶어두는 쇠줄 같았어. 내 안의 넓고 깊은 바다가 점점 고요해지고, 잔잔해지다 못해,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는 기분이었지.


나는 겉으로는 세상의 모든 성공을 거머쥔 듯 보였지만, 내면에서는 희미하고,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 간지러움이 마치 뿌리 깊은 잡초처럼 점점 더 자라나고 있었어. 그 미세한 간지러움은 때로는 어둡고 차가운 밤의 공기처럼 스며들어와 나의 깊은 잠을 방해했고, 때로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알 수 없는 불안을 드리웠어. 나는 그 찌르는 듯한 간지러움을 야근이라는 열정적인 가면 뒤에 숨기거나, 혹은 백화점의 값비싼 쇼핑 목록으로 채우며 억눌렀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문을 걸었지. '행복은 질서에서 오는 거야. 완벽하게 정돈된 삶만이 예측 불가능한 불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수 있어. 모든 변수를 통제하면, 삶은 불쾌한 놀라움을 주지 않을 거야.' 나는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안전했어. 그 안전함은 세상의 거친 파도에서 나를 격리시키는 투명한 유리벽 같았지만, 동시에 세상과의 진정한 교감과 생생한 삶의 감각마저 가로막았어.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어. 삼 년 후, 캐나다 토론토의 어느 고요하고 차가운 아침에, 내가 이토록 공들여 쌓아 올린 견고한 세계가, 한 줌의 모래성처럼 소리 없이 허물어질 거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완벽해 보이는 이 견고한 토대 아래,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겨나고 미세한 땅울림이 느껴지고 있었어. 그 흔들림은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대지의 숨결 같았지. 그것은 결코 '끝'의 시작이 아니었어. 오히려 진정한 나의 '깨어남'의 서막이었어. 마치 꽁꽁 얼어붙었던 땅 밑에서, 작은 씨앗이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어둠을 뚫고 싹을 틔우기 위해 움트는 것처럼 말이야.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작고도 강렬한 생명의 손짓이 느껴졌어. "이제, 진짜 너를 찾아야 할 시간이야. 너의 파도를 찾아 떠나야 해."라고 속삭이는 듯했어. 이 간지러움은 어쩌면, 오랜 시간 나를 잃고 살았던 내가, 마침내 나 자신에게 보내는 가장 솔직한 부름이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그 부름에 서서히, 아주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하고 있었어. 내면의 깊은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


닻의 대가


준호가 나를 "평안(平安)"이라 부르며 자신의 "닻"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어. 응, 그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 '나는 굳건한 존재구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는구나'라고 말이야.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여겼어. 하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어쩐지 이 단단함이 나를 옥죄는 줄처럼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였지.


우리의 집은 준호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 같았어. 건축가인 그는 미니멀리즘과 스칸디나비아풍의 절제를 사랑했지. 그의 손길이 닿은 모든 곳은 그가 말하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회색과 베이지색의 은은한 물결로 가득했어. 완벽한 비율과 간결한 선들은 마치 숨 쉬는 것도 조심해야 할 듯한 고요함을 드리웠지. 차분하고 정돈된 공간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나는 가끔 그 속에서 내 영혼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인 그곳에서, 나의 색깔은 설 자리를 잃고 서서히 퇴색되어 가는 것만 같았지.


나는 어릴 적부터 색채를 사랑했어. 세상의 모든 색들이 내 안에서 춤을 추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지. 강렬한 붉은색,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 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색… 내면의 팔레트에는 늘 생동하는 색채의 갈증이 가득했어. 하지만 준호와의 공간에서 그 모든 색은 서서히 빛을 잃었고, 나는 그저 배경 속에 녹아드는 하나의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지. 침묵과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나의 내면은 마치 색을 잃은 나비처럼, 갇힌 듯 불안하게 날갯짓했어.




색채 계획 속 오류


나의 첫 번째 반항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았지만, 내 영혼에게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어. 나는 꽃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우리 집 인테리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가장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꽃을 골랐어. 바로 뜨거운 불꽃같은 푸크시아색 호접란이었지. 그 강렬한 색채는 마치 나를 향한 어떤 외침 같았어. '나는 여기에 존재해! 나는 살아 숨 쉬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지.


나는 조심스럽게 호접란을 우리 집 거실 중앙에 놓인 디자인 서적 바로 옆, 빛이 잘 드는 유리 테이블 위에 두었어. 마치 고급스러운 박물관에 갑자기 나타난 저항적인 펑크 록커처럼, 그 호접란은 주변의 모든 회색빛 침묵을 깨부수며 홀로 찬란하게 빛났어. 그것은 나의 침묵하는 영혼이 던진 작은 돌멩이였고, 조용하지만 섬세한 전복의 시작이었어.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작은 반역의 깃발 같았지.


준호는 그날 저녁, 퇴근하자마자 호접란을 발견했어. 리모컨을 쥔 채 소파에 앉으며 나를 부드럽게 돌아보았지. "여보, 지우야. 이 꽃은 참 예쁘네. 하지만 우리 집 '통일성(統一性)'과는… 조금 조화롭지 않지 않아? 우리 집의 색채 계획을 흐트러뜨리는 것 같아." 그는 화를 내거나 치우라고 명령하지 않았어. 그저 너무나도 침착하게, 오직 두 손가락 끝으로 호접란 화분을 살짝, 고작 두어 인치 옆으로 밀어낼 뿐이었어.


그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어. '닻'이라 불리던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가 꽃을 움직이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지. 그는 단지 꽃을 움직였을 뿐인데, 나는 내 안의 색깔을 향한 갈증,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욕구마저 그렇게 쉬이 밀려나는 듯했어. 나는 또다시 스스로 작아지는 것을 느꼈고, 내 영혼은 다시 한번 깊은 심호흡으로 내 안의 생명력을 억눌렀어. 폐부 깊숙이 가둔 숨결은 답답하게 맴돌다 차가운 공기처럼 가라앉았지.


그것은 안정이라는 이름의 허상 아래, '건축가의 완벽한 아내'라는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가장 비싼 대가였다는 걸. 내 안의 푸크시아색 열정과 야생을 가두고, 회색빛 세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치러야 했던, 가장 슬픈 대가였던 거야. 그리고 그 대가는 나의 내면에 깊고 아릿한 상처를 남기고 있었지.


속도와 망각


내가 어렵사리 피워 올렸던 푸크시아색 호접란은 결국 두 주를 넘기지 못하고 시들었어. 그 찬란했던 색은 마치 꿈에서 깨듯 빠르게 퇴색되었고, 나는 생명을 다한 그 꽃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어. 시들어버린 꽃과 함께, 내 안의 작은 반항심마저 함께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지. 다시금 내 '자아'를 키워내려는 시도 대신, 나는 현실 속의 속도와 일에 나의 모든 것을 내던졌어. 그렇게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어.


마치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속도와 망각은 서로를 부추기며 나를 나락으로 이끌었어. 호접란의 짧은 생명은 내게 한 조각의 색깔을 되찾아주는 듯했으나, 그 색깔이 바래지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멈췄지. 대신, 삶의 엔진에 기름을 들이붓듯, 내면의 고통을 잊기 위해 가속 페달을 더욱 세게 밟았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사색의 공간을 허용할수록 고통과 불안이 파고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는 바쁜 삶 속에 나를 파묻었어.



그림자와의 경주


나, 지우는 그렇게 그림자와의 경주를 시작했어. 나 자신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가장 잘 숨길 수 있는 곳으로 질주하는 경주였지. 나는 더 이상 멈출 수 없었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나의 일정은 빼곡했어. 미국과의 늦은 밤 전화 회의, 숨 가쁜 비즈니스 런치, 잠깐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헬스장, 그리고 완벽해야만 하는 다음 '이상적인' 저녁 식사 계획까지. 바쁨은 나를 지배하는 유일한 신념이었어. 내게 사색(思索)할 여유, 즉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한 줌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을수록, 나는 안심했어. 고요함은 위험했으니까. 고요함 속에서는 나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불만족과 공허함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할퀴려 들었어.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지. "지우야, 너는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 모든 걸 해낼 수 있어? 정말 목표 지향적이야!" 그들의 칭찬은 나의 피로에 대한 달콤한 보상처럼 느껴졌어. "그냥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뿐이야"라고 으스대듯 대답하면서도, 내 안에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이 동시에 밀려왔어. 마치 속이 텅 비어버린 깡통처럼, 겉은 화려해도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그런 공허함 말이야. 바깥의 나는 완벽하게 균형 잡힌 곡예사였지만, 안의 나는 위태롭게 줄 위를 걷는 외로운 그림자였지.



뒷좌석에서의 잠


물론 내 몸은 쉬지 않고 비상 신호(SOS)를 보냈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만성적인 피로감, 눈 밑에서 끊임없이 씰룩거리는 신경성 경련은 나의 한계를 알리는 절박한 메시지였지. 그리고 가장 섬뜩한 경고는 바로 꿈속에서 찾아왔어.


나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어.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는 거야. 창밖으로는 이름 모를 풍경들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스쳐 지나가. 나는 분명 이 차를 멈춰 세워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내 두 손은 마치 안전벨트에 묶인 것처럼 시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어. 나는 그저 내 인생이라는 질주하는 자동차의 승객일 뿐이었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미래로 끌려가고 있었지. 이 꿈은 현실의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어. 마치 나 스스로가 삶의 방향키를 놓아버린 채, 사회라는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 같았거든.


나는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어. 하지만 그런 내 몸의 경고를 외면한 채, 곧바로 차가운 샤워를 퍼붓고 다시 하루를 시작했어. "이건 그저 스트레스 때문이야. 커피를 더 마시고, 더 일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였지. 멈추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멈추는 순간, 내가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거든.


나는 몰랐어. 이 모든 '움직임'이야말로 나를 가두는 가장 큰 덫이라는 것을.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그 '속도'는 나에게 통제감과 목표 의식이라는 허황된 환상만을 심어줄 뿐이었지. 멈추는 순간, 내 영혼의 모든 균열과 상처, 그리고 깊은 공허함이 한꺼번에 드러날 것을 알았기에 나는 멈출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더더욱 가속 페달을 밟았어. 차갑고, 견딜 수 없이 고요했던 토론토의 그 아침을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하고 있었던 거야. 모든 것이 마침내 폭발하거나, 혹은 차가운 침묵 속에서 산산조각 날 그 순간을 향해서 말이지.


거울 미로


준호와 나의 결혼 생활은 그의 손에서 탄생한 모든 건축물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어. 오차 한 점 허용되지 않는 완벽한 설계도면처럼, 우리 관계는 마치 빈틈없이 짜인 각본 위에서 움직이는 연극과도 같았지. 일 년 중 언제 여름휴가를 갈지(늘 8월의 같은 주였어), 평일 저녁 식사 메뉴는 요일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었고, 잠자리에 들기 전 서로에게 건넬 평범한 인사말마저도 마치 잘 외워둔 대사처럼 흘러나왔어.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기복이나 즉흥적인 설렘은 존재하지 않는, 그저 고요하고 정돈된 각본 위에서 연기되는 삶, 그것이 우리의 결혼이었어.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불필요한 혼란을 주지 않았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는 안정감은 분명 겉으로는 견고하고 안전해 보였지. 그러나 그 견고함 속에는 자발적인 숨결이나 순수한 놀라움이 깃들 여지조차 없었어. 준호의 건축 철학처럼, 우리 관계 또한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달렸지. 과장된 장식도, 예상치 못한 곡선도 없이 간결하게 흘러갔고,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도 정돈되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졌어.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세상이 인정하는 '완벽한 부부'의 이미지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가면 아래에서는 두 영혼이 서로에게 온전히 닿지 못한 채 맴돌고 있었어. 마치 유리로 된 투명한 벽 안에 갇혀 서로를 바라보되, 결코 만질 수도, 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처럼 말이야. 그 무균질적인 공간 속에서 나의 내면은 끊임없이 작고 미세한 물음들을 던졌어. '이것이 정말 진정한 삶의 모습일까? 이 숨 막히는 고요함이 진정 내가 꿈꾸던 평안일까?'라고.


산산조각 난 찻주전자


우리 관계에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깊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사소하고, 어쩌면 어이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한 조각의 물건 때문이었어. 이태원의 북적이는 벼룩시장을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빈티지 도자기 찻주전자 한 점. 준호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니멀리즘, 즉 무채색의 고요한 절제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였지. 화려한 금색 테두리는 태양을 담은 듯 찬란했고, 찻주전자 전체에 수놓아진 이국적이고 섬세한 꽃무늬는 잊혔던 옛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어. 그 디자인은 어릴 적 할머니 댁 찬장 깊숙한 곳에서 보던, 정감 어린 유년의 풍경을 단번에 떠올리게 했어. 그 찻주전자를 만지는 순간, 억눌렸던 유년의 따뜻한 기억과 잃어버린 향수가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지.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한 것 같았어.


나는 마치 비밀스러운 보물을 꺼내듯,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그 찻주전자를 거실 중앙 테이블 위, 항상 비어있던 자리에 놓았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허브차를 정성스레 끓여 담고는, 그 작은 행위가 가져다준 충만한 자기표현의 기쁨에 흠뻑 취했지. 지우, 나 스스로가 내 과거의 한 조각을, 그리고 억압되었던 현재의 나를 상징하는 그 찻주전자를 이 무채색의 공간에 당당히 전시한 것에 대해 작게나마 자부심을 느꼈어. 그것은 오랜 침묵 끝에 내 영혼이 겨우 내쉰, 작고 떨리는 숨소리 같았어. 이 집에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흔적이었어.


준호는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찻주전자를 발견했어. 그는 놀라움도, 불만도, 어떤 특별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어. 그저 그 푸른빛 찻주전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잠시 멈춰 섰을 뿐이었지.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너무나도 침착하게, 그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어. 나의 눈빛이 그를 좇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망설임 없이 찬장 문을 열고 그곳, 즉 우리 집의 미학적 기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넣어두는 장소에 그것을 넣어버렸어. 그 무채색의 공간에서 홀로 빛나던 나만의 찻주전자는 이제 어둠 속에 갇히고, 그 자리에 우리 집의 통일된 디자인에 완벽히 부합하는, 모던하고 단조로운 전기 포트가 놓였지. 그 무언의 행동은 마치 내 작은 반항과 그 뒤에 숨겨진 나의 욕망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듯했어.


"왜…?"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어. 지난 세월 동안 억눌렸던 수많은 감정이 실려, 끝내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유리 조각처럼 처량하게 울렸어.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어. 그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이 차분했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평평한 톤이었지. "그건 실용적이지 않아, 지우. 그리고 우리 식기 세트와도 어울리지 않아. 너무 이질적이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 나는 깨달았지.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찻주전자가 아니었어. 그는 바로 나를 이야기하고 있었어. '실용적이지 않고', '우리 세트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이 공간 속에서 '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의 무덤덤한 목소리 속에서, 나의 존재 자체가 그의 완벽한 세계에서 어긋나는 불협화음이라는 잔인한 진실이 칼날처럼 아프게 와닿았어. 그 순간, 나는 그의 시선 속에 비친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지. 마치 찢어진 천 조각처럼.



마지막 균열


그 순간,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어. 지난 몇 년간, 아니 어쩌면 내 삶 전체에 걸쳐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지. 그것은 절규에 가까웠어. 나는 찻주전자 때문에 소리 지른 것이 아니었어. 그 찻주전자에 응축된 지난 세월 동안 내가 해왔던 수많은 양보들, 시들어가던 푸크시아색 호접란의 짧은 생명, 그리고 내 인생의 뒷좌석에 앉아 그저 흘러가는 무의미한 풍경만 바라봐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비통한 분노였어. 내 결혼이라는 기차의 그저 한 명의 승객으로 전락해 버린 나 자신에 대한 뼈아픈 비명이었지. 이 공간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 나 자신에 대한 절망적인 울분이었어.


준호는 나의 고함과 울분에 맞서 소리 지르지 않았어. 그는 늘 그랬듯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었지. 그의 침착함은 오히려 나의 분노를 더욱 고립시켰어. 내가 홀로 광야에서 외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니까.

"당신은 내가 당신의 '진정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고 말하지만, 지우, 당신은 한 번도 나에게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 그는 설거지통에 컵을 넣으며, 물이 흐르는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 차분하고 나지막하게 말했어.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었어. "당신은 내가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스스로 짐작하고, 그것을 위한 완벽한 공간을 내 집처럼 만들어주기를 바랐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당신 영혼의 건축가가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당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의 말은 마치 차갑고 정교하게 연마된 건축 도면처럼, 망설임 없이 나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꿰뚫었어. 그 순간, 나의 분노는 한순간에 멈추고 깊은 허탈감만이 남았지. 나는 준호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는 그저 우리 모두가 세상의 눈과 '마땅히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가설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 올린,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야. 완벽이라는 허황된 환상 속에 갇혀 서로에게 거짓된 기대를 하고 있던 우리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만든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거지.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려 하지 않은 채.


하지만 이 잔인한 진실은 우리를 치유하지 못했어. 오히려 우리의 '완벽한' 외면을 산산조각 냈을 뿐이야. 그날 이후, 우리는 같은 침대에 잠들지 않았어. 그는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 머물렀고, 나는 노트북 앞에서 밤을 지새웠지. 우리 결혼은 끝없이 서로의 그림자만을 좇는 '거울 미로'가 되어버렸어. 우리는 그 안에서 오직 우리가 서로에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모습의 반사된 환상만을 보았을 뿐, 진정한 우리 자신, 즉 실제의 사람들은 그 거울 속에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지. 나는 알았어. 우리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던 '고독'의 메아리가 이제 곧 우리를 뒤쫓아와 결국 붙잡게 될 거라는 것을. 그 고독은 차갑고 날카로운 파편처럼, 우리의 마음을 찔러대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길 준비를 하고 있었어. 이 차갑고 고요한 절망 속에서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향해 조금씩 더 깊이 가라앉고 있었지.


날개 잃은 말들**

준호와의 파열 이후, 나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홀로 표류하는 배처럼 일에 모든 것을 내던졌어. 일은 언제나 나의 견고한 피난처였고, 내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지. '좋은 아내'가 될 수 없다면, 나는 최소한 '최고의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어. 일 속으로 침잠하는 것이 곧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었으니까.


나는 내 모든 에너지와 잠재력을 쏟아부어,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인 거대 IT 기업을 위한 대작을 구상하기 시작했어.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파편화된 나를 다시금 붙잡아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지.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절박한 시도였어. 나의 말들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내면의 방해꾼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찻주전자 사건'이 일어난 밤부터 시작되었어. 그날 밤 이후, 나는 거짓말처럼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듯했어. 내 손가락은 여전히 건반 위에서 춤추듯 단어들을 입력했지만, 활자로 찍혀 나오는 그것들은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탕 봉지처럼 텅 비어 보였어.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기술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슬로건을 만들 수는 있었지. 그러나 과거 내 글 속에 숨 쉬던, 독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던 그 생생한 불꽃, 영혼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어. 말들이 날개를 잃은 듯, 지면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어.


내가 써야 할 글은 '자유와 혁신'이라는 거창한 비전을 팔아야 했어. 하지만 내가 과연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나 자신조차도 준호와의 관계, 그리고 나를 옥죄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내 안의 소리는 이렇게 외쳤어. '스스로가 갇혀 있는 자가 어떻게 자유를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물음은 마치 나의 펜 끝을 무디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처럼 번져갔지.


결국 나는 며칠 밤낮을 고민한 끝에 초안을 완성했고, 늘 엄격하지만 언제나 나의 편이었던 팀장 광호에게 조심스럽게 건네. 나는 그의 반응에 내 존재의 위안을 찾으려 했어.


얼마 후, 그는 나를 자기 방으로 불렀어. 그는 내 앞에 내가 쓴 초고를 말없이 내려놓았어. 평소 그의 얼굴에는 늘 여유로운 유머가 깃들어 있었지만, 그날 그의 표정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나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어.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무거운 불안감을 안겨주었지.


"지우야." 그는 한숨처럼 내 이름을 불렀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유쾌함 대신 묵직한 망설임이 섞여 있었어. "이거, 잘 썼어. 기술적으로는 완벽해. 하지만… 이건 마치… 죽은 글 같아." 그의 마지막 말은 나의 심장을 칼로 꿰뚫는 듯했어. 내가 밤낮으로 매달렸던 그 글이, 생명 없는 시체와 같다고?




이중생활의 대가


광호 팀장은 고개를 들었고, 나는 그의 눈빛에서 화가 아닌 깊은 피로감을 읽을 수 있었어. 그것은 나와 닮은, 지친 영혼의 그림자였지. "예전에는 지우 네가 쓴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어. 그들을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설레게 했지. 그런데 이 글은… 그냥 물건을 팔아. 글이 아니라 그냥 데이터 조각 같아. 네가 어디 있니, 지우야? 이 글 안에 네가 존재하긴 하니?"


나는 당황해서 변명하려 애썼어. "팀장님, 제가 요즘 좀 힘들어서요. 수면 부족도 심하고, 스트레스도…."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어.


"네가 팔고 있는 꿈을 네 스스로가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 꿈을 팔 수 있겠니? 지우야, 너는 지금 이중생활을 하고 있어.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잖아. 사람들은 너의 SNS에 올라오는 완벽한 네 삶을 보며 '좋아요'를 누르지만, 정작 네가 여기 회사에 가져오는 건 네가 될 수 있는 모습의 '그림자'일뿐이야. 빛이 바래고, 형태만 남은 그림자 말이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마지막 견고한 요새마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준호와의 관계가 무너져 가는 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나에게는 '경력'이라는 든든한 방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어. 그것만은 나의 것이었고, 나의 능력으로 쟁취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 발밑의 모든 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듯한, 아득한 공허감이 나를 집어삼켰어.


나는 텅 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어. 이제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어. 더 이상 사랑받는 아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성공적인 작가도 아니었지. 한때는 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나를 지켜주던 굳건한 방패였던 나의 '말들'이 나를 배신하고 등을 돌려버린 것 같았어. 그것들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 말들이 더 이상 날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공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거야. 내 안의 공기는 두려움과 거짓이라는 독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나의 영혼이 숨 쉴 수 없었던 거지. 그날, 나는 마침내 깨달았어. 나, 지우 스스로가 내가 이야기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내 삶의 이야기 자체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여인을 바라보며,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였는지를 처절하게 되묻기 시작했어.


공허함의 대가


광호 팀장과의 그 대화가 끝나고 회사 문을 나섰을 때, 밤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날카로웠어. 내 안의 마지막 기댈 곳이었던 자부심마저 산산조각 난 채, 나는 텅 빈 아파트로 발걸음을 옮겼지. 그곳은 한때 '우리'의 공간이라 불렸던 곳이지만, 빈티지 찻주전자 사건이 터진 날 밤, 이미 '우리'라는 의미를 잃어버렸어. 그리고 준호가 자신의 작업실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는 나를 둘러싼 '황금 새장'으로 그 의미가 굳어져 버렸지. 높은 천고와 통유리창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화려한 공간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안식처가 아니라, 내 영혼을 짓누르는 차갑고 답답한 감옥처럼 느껴졌어.


결혼 생활의 위기와 커리어의 몰락이 동시에 나를 덮쳤을 때, 나는 마치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온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경험했어.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필사적으로 연기해 온 '사랑받는 아내'와 '성공적인 카피라이터'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 나는 단 한순간에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 줄 그 어떤 타이틀도, 그 어떤 역할도 남아 있지 않은 껍데기뿐인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 배우처럼, 더 이상 따를 대본도, 연기할 시나리오도 없이 텅 빈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했어. 이전에는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가, 막상 찾아오자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막연한 불안감으로 나를 짓눌렀어. 나는 내 존재의 지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거대한 진동 속에 서 있었어.



거울 조각 맞추기


완벽하게 설계된 거실, 마치 잡지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모든 가구가 제자리에 숨 쉬듯 정돈되어 있는 그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가장 이질적이고 불필요한 존재임을 느꼈어.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는 대리석 식탁이나 완벽하게 각 잡힌 흰색 소파에 손을 얹어 보았지만,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곳은 내가 꿈꾸던 '집'이 아니라, 그저 잘 전시된 '공간'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이 모든 사물은 내가 아닌 준호의 미적 이상, 준호의 완벽주의를 반영하는 차가운 거울 조각들이었을 뿐이야. 그 조각들에 비친 나는 수없이 분열되고 왜곡되어, 본래의 형상을 잃어가고 있었어. 나는 심지어 내가 '지우'로서 존재한다는 감각조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어. 거울 조각들처럼 산산조각 난 내 존재의 파편들이 산란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지.


나는 집안의 모든 전자기기의 전원을 끄고 절대적인 침묵 속에 앉았어. 시계를 초침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한 그 공간 속에서,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나 자신을 내던졌어. 아름다운 멜로디의 음악도, 시끄럽지만 몰입감을 주던 텔레비전도, 그리고 내 손 안에서 끊임없이 세상의 소음을 송출하던 휴대전화조차 잠재웠지. 예전 같았으면 이 침묵이 나를 집어삼킬 듯한 불안감으로 다가왔을 테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 이 침묵을 마주해야만 했어. 과거에는 속도로, 바쁨으로 필사적으로 заглуша (억누르고 외면했던) 그 깊은 침묵을 말이야. 그 침묵은 이제 더 이상 도망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지. 그리고 그 깊고 넓은 침묵 속에서, 나는 마침내 그토록 회피했던 '공허함의 메아리'를 들었어.


그것은 단순히 외로움과는 다른 것이었어. 더 깊고, 더 뿌리 깊은 존재론적 자각이었지. 내가 만약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완벽한 회색빛 벽과 흰색 소파, 그리고 모든 것이 정돈된 공간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나의 존재는 이 공간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잔인한 진실이었어. 나의 말들, 나의 열정, 내가 가진 색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지워져 버린 것만 같았지. 나의 삶은 타인의 취향과 기대에 맞게 꾸며진 무대였고, 나는 그저 무대 위에 올려진 한 조각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그 절망감은 숨이 막힐 듯했다. 거울에 비친 내가 아닌, 오직 나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어. 나는 완벽하게 존재했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부재하는 공허함을 경험했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


그날 밤, 나는 오래된 낡은 노트를 꺼냈어.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옅은 베이지색 표지, 누렇게 바랜 종이의 꿉꿉한 냄새가 났어. 어릴 적 꿈과 비밀을 적어두었던, 그리고 내가 나중에 토론토까지 가져가게 될 그 소중한 노트 말이야. 나는 망설임 없이 펜을 들고, 굳은 손으로 첫 페이지에 한 문장을 써 내려갔어. 그것은 광고 문구도 아니었고, 그 누구에게도 보낼 나의 절박한 변명도 아니었지. 그저 솔직하고 정직한, 나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온 단 하나의 질문이었어.


'지우는 누구인가? 만약 그녀가 준호의 아내도 아니고, 성공한 카피라이터도 아니라면, 과연 지우는 누구인가?'


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어. 그 질문 아래에는 텅 비고, 거대하며, 마치 나를 집어삼킬 듯한 두려운 공허함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지.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었어. 내가 그동안 나라고 믿었던 모든 타이틀, 모든 역할, 모든 가면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자, 나는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해체되어 버린 듯한 감각에 휩싸였어. 나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빈자리에서, 나는 막막하고 차가운 우주 속에 홀로 던져진 먼지 한 톨 같았어.


나는 그제야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어.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아버지의 '너는 너무 나약하고 물러터졌어'라는 무심한 한 마디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아버리던 그 순간부터. 내 손 안의 바이올린 활이 더 이상 음을 연주하지 못했던 그 작은 사건이, 내 인생의 거대한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날 이후, 나의 삶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 자신을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니었어. 나는 사랑과 존재를 허락받기 위해 '타인이 기대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지. 남들에게는 더없이 착한 딸, 항상 칭찬받는 똑똑한 학생, 회사에서는 유능하고 인정받는 직장인, 그리고 완벽한 아내… 나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속으로는 아무런 진짜 가치도 없는 가짜 동전처럼, 누군가의 값비싼 지갑 속에서 진품인 척 존재해 왔던 거야. 진짜 나의 목소리는 닫힌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처럼,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어. 그 깨달음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아팠지만, 동시에 거대한 진실의 파도처럼 나를 휩쓸며, 내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었지.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사기를 쳤던 거야.




유일한 출구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어. 이 미로 같은 삶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출구를 찾아야만 했지. 나는 명확하게 깨달았어. 준호는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라기보다는,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 가득한 시스템의 일부였을 뿐이었으니까. 나의 경력 또한 나를 구원할 수 없었어.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혹은 잃어가고 있는 '영혼'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내게는 이미 줄 수 있는 영혼의 한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나는 더 이상 이 절망적인 전쟁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어. 패배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타인이 만들어준, 그리고 타인이 끊임없이 기대하는 삶을 위해 싸웠을 뿐이었으니까. 내가 흘린 땀방울과 눈물은 결국 타인의 꿈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지, 나 스스로의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 이 깨달음은 나의 모든 것을 찢어 놓는 동시에, 내가 갇혀 있던 미로의 벽에 유일한 빛줄기를 비추는 작은 균열이 되었어.


토론토라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그리고 비논리적으로 내 머릿속에 떠올랐어. 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명이었지만, 그 이름 석 자가 주는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도 알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을 느꼈지. 내게 토론토는 그 어떤 감정적인 의미도, 어떤 추억도 없는 완전히 낯선 도시였어. 어떠한 편견도, 어떠한 기대도 없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 그래서 더 끌렸던 것 같아. 그곳은 완벽한 '백지상태의 캔버스'였어. 나의 '완벽했던',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과거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나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곳.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제로(zero) 상태에서 나 자신을,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어. 타인의 시선과 기대,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게 씌웠던 수많은 가면 없이, 오직 나만의 색깔로, 나만의 존재로 말이야.


나는 휴대폰 저장 공간 구석에 박혀 있던, 예전에 알던 지인이 원격 근무를 제안했던 낡은 이메일을 찾아냈어. 몇 년 전 받은 것이었지만, 그 메일 속 제안은 지금의 나에게는 생명줄과 같았지. 떨리는 손으로 짧고 단호한 답장을 보냈어. 그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가 가진 모든 저축을 모았고, 항공권 한 장을 끊었어. 태평양을 건너는 편도 항공권.


이 모든 행위는 결코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어. 그것은 극도의 절망 속에서 간신히 찾아낸, 유일하게 '건설적인' 행동이었지. 나의 삶은 마치 숨 쉴 수 없는 꽉 막힌 방과 같았어. 그리고 이 떠남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얼어붙을 듯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을 여는 절박한 행위였어. 미지의 세계로의 첫 발걸음은 두려웠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었어. 내가 곧 시작하게 될 '내 영혼의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나를 이끌었으니까. 나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우'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색깔을 가졌는지, 나의 진정한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이 모든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을 위해. 어둠 속에서 겨우 움튼 작은 빛을 향해,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나의 영혼은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떨리지만 강렬한 첫 숨을 내쉬었다.


뿌리가 멈춘 곳


나는 그 차가운 아침을 마치 삼 년 전이 아닌, 방금 전 일어난 일처럼 오롯이 기억한다. 캐나다 토론토의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영혼마저 얼리는 듯했고, 혀끝에 감도는 쓰디쓴 탄 맛의 커피는 내 안의 공허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어. 그 호텔방 창밖으로는 회색빛 건물의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 그 순간, 내 안의 심장이 차가운 진실과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어. 아, 나는 더 이상 '집'이 없구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집'은 아니었어. 서울 아파트의 현관 비밀번호도, 닳아버린 현관 키도, 침실 구석에 놓인 낡고 해진 소파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를 '지우'로서 존재하게 해 주던, 내 영혼의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어야 할 그 '소속감'이라는 감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지. 한때 내가 남편 준호와의 관계에, 나의 성공적인 커리어에, 그리고 내가 구축했다고 믿었던 그 견고한 삶에 연결 지어 생각했던 모든 절대적인 '집'이라는 개념은, 이제는 마치 한 줌의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 뒤였다. 낯선 도시의 차가운 호텔방에서, 나는 내 영혼이 깊이 박혀 있던 대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듯한, 깊은 불안감과 함께 아득한 상실감을 느꼈어. 뿌리 뽑힌 나무처럼 존재의 근간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은 채, 다만 허공에 부유하는 한 조각의 섬처럼 외로이 떠 있었다. 그 자유는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이었다.




고요한 무전 침묵


나는 낯선 호텔방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어. 눈앞의 노트북은 과거에는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던 가장 날카로운 도구이자,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굳건한 방패였지. 그러나 이제 그 흰 화면은 아무것도 투영하지 못한 채 텅 비어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단 한 줄의 글자조차 채워 넣을 수 없었어. 손가락은 건반 위에서 맴돌았지만, 어떤 문장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어. 나의 편집자인 광호 팀장은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서울에서 날아오는 독촉장과 연이어 쌓여가는 청구서들이 나의 불안을 시시각각 부추겼지만, 나는 마치 세상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무전 침묵' 상태에 빠져 버렸어. 마치 나를 현실 세계와 잇던 모든 전선이 송두리째 잘려나간 듯한 먹먹한 단절감. 나는 고립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어. 그 귀청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나는 비로소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회피했던 진실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어. 나는 지난 수년간, 아니 어쩌면 내 삶 전체를 통틀어, 다른 누군가가 닦아놓은 단단한 기반 위에 '나만의' 성을 쌓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는 것을. 나는 준호에게 '편안한 아내'가 되기 위해, 회사에서는 '완벽한 직원'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진정한 욕망과 내 안의 깊은 소용돌이를 억누르고, 나 자신을 조율하고, 타인의 기대에 나를 맞추려 애썼지. 나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나의 색깔과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항상 '주변과의 조화'라는 이름 아래 나 자신을 희생하고 지워나갔다. 나의 자아는 껍데기만 남은 채 허망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


내 영혼은 마치 화분 속에 너무 오래 갇혀 뿌리가 서로 뒤엉켜버린 식물 같았어. 뿌리가 더 이상 뻗어 나갈 공간이 없어, 스스로를 옥죄고 질식시키는 답답한 상태. 그 뿌리들은 더 이상 흙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 없었고, 나의 내면 또한 더 이상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겉으로는 탐스럽게 피어난 꽃처럼 보였을지라도, 속으로는 이미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이 깨달음은 둔탁하지만 끈질긴 고통을 동반했어. 마치 영혼의 깊은 곳에 박힌 굳은살처럼, 아프지만 떨쳐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나에게 물었다. '이것이 진정 네가 원하는 삶이었니? 너는 진정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니?'



음악 수업에서의 교훈, 그리고 미지로의 초대


그 고통은 나를 다시 여덟 살의 어린아이로, 닳고 닳은 타임머신을 타고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려 보냈어. 바이올린 활을 든 작은 손으로, 힘껏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온 마음으로 음악과 하나 되고 있을 때였지. 내가 활을 움직이는 순간마다, 낡은 나무 악기에서 울려 퍼지던 투박하지만 열정적인 선율은, 어린 나의 심장 박동과 섞여 온 세상을 채우는 듯했어. 그 순수한 환희의 순간, 아버지는 나의 연주를 듣고 나를 불렀지. 그의 무심한 한 마디가 갓 피어난 작은 나의 꽃봉오리를 짓밟았다. "아가, 너무 시끄럽구나. 조금 더 부드럽게 해라. 조용히 해."


여덟 살의 나는 '부드러움'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몰랐지만,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열정적이고 강렬한 면모를 숨겨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어. 내 안의 목소리를 죽이고, 나 자신을 억압해야만 부모의 사랑과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지. 그 이후로 나의 바이올린은 굳게 닫힌 케이스 안에서 침묵했고, 내 안의 진정한 소리 또한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 깊은 뿌리 박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되었고, 나는 그 끈에 묶인 채 꼭두각시처럼 살아왔던 거야. 바이올린 활이 더 이상 음을 연주하지 못했던 그 작은 사건이,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거대한 지도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아픔에 신음했다.


그 순간의 자각은 나의 새로운 나침반이 되었어. 나는 더 이상 '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은 타인의 기대와 욕망으로 만들어진 곰팡이 핀 낡은 버전의 나 자신을 버리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내 안에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썩어가는 토대를 허물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그 시작점으로 내가 선택한 곳이 바로 토론토였다. 나의 과거가 닿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는 완벽한 '백지상태의 캔버스'와 같은 도시. 이곳은 나의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느껴졌어. 그 누구의 편견도, 그 누구의 기대도 없는 곳에서, 나는 이제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어. 나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던 직업이라는 허울조차 기꺼이 내려놓았지. 이제 더 이상 광고 문구 속에 내 영혼을 팔아넘길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낡은 등산 가방을 꺼내 그 안에 단 세 가지 물건만을 조심스럽게 넣었어. 마치 내가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주는 세상의 첫 선물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첫째는 **낡은 노트.** 누렇게 바랜 종이,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옅은 베이지색 표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썼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지 않던 유일한 공간. 이제 이 노트는 나의 영혼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해 나가는 진실의 기록이 될 것이었다. 그 노트 속의 모든 글자는 나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이정표가 될 것이었으니까.


둘째는 **오래된 시집 한 권.** 한 번도 끝까지 읽어본 적 없는,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잊고 지내던 시집. 잊힌 내 안의 시인, 과거의 내가 억눌렀던 모든 '색깔'과 '감정'들을 다시 찾아내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시집 속에 숨겨진 단어들은, 나의 영혼이 다시 언어를 통해 숨 쉴 수 있도록 도와줄 작은 숨구멍이 될 것이었다.


셋째는 **어릴 적 해변에서 주웠던 매끄러운 작은 돌.** 수없이 파도에 씻겨 매끄러워진 그 돌은 차갑지만 단단한 촉감으로 내 손 안에서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세상이 너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너는 이미 너 자신이었단다.' 그 돌은 나의 본연의 자아, 세상의 기준에 굴하지 않던 가장 순수했던 나의 흔적이었다. 이 돌을 만질 때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를 되뇌며 잃어버린 나의 파편들을 주워 담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의 미래는 안개가 자욱한 미지의 숲과 같았다.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과 기대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그 어른 '지우'가 아닌, 과거의 어디쯤인가에 갇혀 있을,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그 '어린아이 지우'를 찾아 떠난다는 것. 비어버린 아파트의 차가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의 손 안에서 묵직하게 '찰칵' 하고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 그 소리는 고작 열쇠가 잠기는 물리적인 소리였지만, 나의 영혼에게는 그 어떤 외침보다도 크고 진실한 '네'라는 응답처럼 들렸다.


나, 지우가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었던 가장 솔직하고 용기 있는 선언이었다. 이제 나는 떠난다. 나의 영혼의 고향을 찾아서. 모든 뿌리가 다시 시작될, 미지의 땅을 향하여. 어둠 속에서 겨우 움튼 작은 빛을 향해, 나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나의 영혼은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처럼, 떨리지만 강렬한 첫 숨을 내쉬며 웅크렸던 몸을 펴기 시작했다. 나의 고고학적 발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발굴의 끝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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