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8
현-진과의 관계는 그의 음악처럼 가볍고 자유로웠다. 예측 불가능한 리듬과, 얽매이지 않는 선율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마음은 마치 텅 빈 강변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듯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깊은 평화로움에 잠기곤 했다. 그의 눈빛 속에는 평가나 비난의 그림자조차 없었고, 그의 손길은 나의 모든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감싸 안는 듯 따뜻했다. 하지만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는, 잊힌 줄 알았던 불안감의 씨앗이 서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차가운 물결이 서서히 일렁이는 듯. 나는 사랑이란 철저하게 고안된 '계약'과 같다고 배워왔다. 그 계약서의 조항에는 늘 나의 '양보'가 나의 '안전'을 담보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진과의 관계에는 그 어떤 계약도, 그 어떤 조항도, 심지어 미래에 대한 견고한 약속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순간의 충만함과 예측 불가능한 '즉흥성'만이 있을 뿐이었다(14장). 모든 것이 투명하고 날것 그대로였다. 그리고 바로 그 완벽한 자유로움이 나를 극심한 두려움에 빠뜨렸다. 미지의 영역을 유영하는 불안감은 마치 차가운 강물이 나의 발목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와, 심장까지 얼리는 듯했다. 자유는 때때로 상실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다가왔다.
보호 프로그램: 오래된 습관의 귀환과 내면의 속삭임
나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오래된 패턴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뇌가 비상 상황을 감지하고, 익숙한 '보호 프로그램'을 자동적으로 가동한 것처럼. 오래된 습관은 질긴 뿌리처럼 나의 존재를 휘감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는 준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완벽한 아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나의 모든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그의 기대에 나를 맞추려 애썼다. 이제 현-진을 잃고 싶지 않은 나의 무의식은, 그를 붙잡기 위해 새로운 가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전의 가면과는 다른,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었다. '이상적인 지우'가 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늘 즐겁고, 항상 유쾌하며, 결코 불평하지 않는 '가볍고 부담 없는' 존재. 나의 진정한 깊이와 복잡한 내면을 감추고, 그에게 언제나 환한 미소만을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나는 나를 다시 축소시키고 있었다. 나의 목소리를 다시 반음으로 낮추고, 나의 색깔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오랜 착각이었다.
어느 날, 현-진이 나의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내가 한창 집필 중인 회고록의 초고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이제는 페인트가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 옆에서,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가 읽는 동안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그의 입술은 때때로 나의 문장 위에서 멈칫했지만, 그 어떤 판단도 비판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해와 공감만이 그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삶에서 가장 아프고 어두웠던 페이지들을, 나의 가장 진솔한 치부를 보여주었다.
"이건 정말 강력한 글이야, 지우." 그가 읽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탄과 함께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자신만의 '음량'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보여주는 글이야. 정말… 큰 영감을 줘." 그는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이내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따뜻한 팔이 나의 어깨를 감싸고, 나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 깊은 포옹과 완벽한 받아들임 속에서, 잊었던 줄 알았던 거대한 두려움이 밀물처럼 나를 덮쳤다. 이 편안함, 이 완벽한 이해가 너무나도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그 오래된 '내부 편집자'의 목소리가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과거 아버지와 광호 팀장에게 나의 감정을 '부드럽게' 만들라고 요구했던 바로 그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는 너의 고통을 보고 있어, 지우. 너의 무너진 모습, 너의 약함을 다 알아버렸어. 너는 그에게 네 모든 치부를 드러내 보였어. 이제 그는 너의 이 '시끄러움'에 곧 지겨워할 거야. 그리고 다시 너에게 '작아지라'라고, '조용해지라'라고 요구할 거야. 결국 넌 버려질 거야. 모든 것은 변해." 그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실의 공포'를 건드렸다. 다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다시 한번 '바이올린 케이스'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암묵적인 예감.
친밀함의 시험대: 두 번째 바이올린 케이스의 문턱에서
나는 현-진의 품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쌌지만, 나의 마음속은 얼어붙는 듯했다. 마침 그의 손길이 닿았던 옆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 손에 쥐었다. 나의 몸은 마치 위협을 느낀 작은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나의 모든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나의 어깨는 굳게 닫혔고, 시선은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나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받아들임'이 나에게는 지금껏 겪었던 어떤 거절보다도 더 무서운 감정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만약 그가 나의 이런 불완전하고 복잡한 내면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는데, 그가 결국 나를 떠나버린다면… 그때의 고통은 아마 이전의 모든 상처들을 합친 것보다 더 깊을 것이다. 그것은 두 번째 '바이올린 케이스'가 영원히 닫히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나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영원한 침묵이 될 것이다.
"지우 씨, 괜찮아요?" 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다시 침묵의 껍질 속에 숨어들려는 것을 감지한 듯한 걱정이 서려 있었지만, 그 어떤 비난도, 어떤 강요도, 어떤 요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순수한 염려와 깊은 이해만이 담겨 있었다. 그 순수한 질문이 나의 단단한 방어막을 허물어뜨리는 듯했다.
나, 지우는 그에게 거짓말할 수 있었다. 피곤하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혹은 지금은 작업에 몰두해야 할 시간이라고. 그렇게 상황을 회피하고 다시 나의 오래된 패턴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토론토에 오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결정적인 약속을 떠올렸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12장). 나는 과거의 나처럼 나 자신을 포장하고 숨기는 대신, 나라는 존재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이 감정적 시험대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가득 토론토의 차가운 공기를 채웠다. 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고, 목소리는 불안하게 갈라졌다. "아니요." 그 한마디를 내뱉는 것은, 과거 서울의 거대 기업에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사직서를 내던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저… 지금 너무 무서워요. 당신이 제 모든 이야기를, 제가 얼마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지 다 보고 있다는 게 무섭고, 당신이라는 이 행복한 '회전목마'가 언젠가 멈추고, 제가 다시 홀로 남겨질까 봐 너무나 무서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는 고통이 너무 두려워요." 나는 내가 오랫동안 짊어져 왔던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나의 가장 깊은 두려움, 나의 가장 어둡고 추한 부분을 현-진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가면을 벗어던진 채 완전히 '벌거벗겨진' 상태로, 내 영혼의 모든 취약성을 드러내 보였다.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고, 나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현-진은 나의 고백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고,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강인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저 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나의 차가운 손을 감쌌다. 그의 눈동자는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듯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지 않았다(그것은 과거의 내가 항상 갈구했지만, 늘 상처만 남겼던 약속이었다). 대신, 그는 나의 가장 깊은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가장 진실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나의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지우 씨, 저는 '영원'을 약속할 수는 없어요. 그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 '진정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의 모든 솔직함과 연약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요. 그리고 회전목마는 늘 다음 바퀴가 있어요, 지우 씨. 삶은 끝없이 돌고 도는 회전목마와 같아요. 한 바퀴가 끝나면 또 다음 바퀴가 시작될 수 있죠. 당신이 원한다면, 다시 그다음 바퀴에 올라탈지 말지는 온전히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어요. 저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 겁니다."
그의 말은 나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어 박혔다. 그는 나의 '닻'이 아니었다. 나를 어느 한 곳에 묶어두고 안정시키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중력'이 되어주었다. 나를 지금 이 순간, 현재라는 시간 속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나는 깨달았다. 사랑이란, 어쩌면 그토록 두려워했던 '상실'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피할 수 없는 '대기'처럼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그리고 나, 지우는 난생처음으로 그 '상실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영혼은 드디어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두 번째 바이올린 케이스의 그림자는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나는 현-진의 리듬에 맞춰 나의 새로운 멜로디를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음악은 더 이상 반음으로 연주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은 마침내 가장 온전하고 충만한 음량으로, 세상에 울려 퍼질 것이다. 현-진의 손이 나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는 순간, 나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감각은 나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현진은 나의 치료사도, 나의 구원자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나의 가장 투명하고 정직한 '거울'이었다. 그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비추어주었지만, 결코 나를 바꾸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삶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통제와 완벽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살아왔는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그의 삶은 내게 일종의 충격 요법처럼 작용했다. 거친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견고했던 세계의 벽에 부딪히며 균열을 내는.
비실용적인 진실: 불안과 탐색의 심연
그의 스튜디오는 내가 지내던 조용하고 정돈된, 혹은 내가 애써 정돈하려 했던 나의 작은 스튜디오보다 훨씬 더 '혼돈' 그 자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낡은 기타 케이스는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건반 위에는 뚜껑이 열린 채 말라버린 물감 튜브들과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미완성된 악보들이 바닥과 벽에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미묘한 오래된 먼지 냄새와 커피 향, 그리고 어렴풋한 락 스피릿이 뒤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먹다 남긴 수프 캔들이 쌓여 있는 것도 보였다. 그의 삶은 그 어떤 미학적 질서도, 기능적 효율성도 따르지 않는, 그야말로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박물관 같았다.
그는 세상의 '실용적'이라는 기준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살아갔다. 그는 최신형 신시사이저가 가지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마지막 남은 돈을 끌어다 살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실용적'인지 아닌지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즉흥적으로 며칠씩 도시를 떠나 외곽의 작은 바에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예측 불가능했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자유롭게, 그러나 뿌리 깊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삶은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는 준호와 만날 때마다 그의 완벽한 세계를 함께 '설계'하고, 모든 것을 '질서' 속에 두려고 애썼다. 그의 기준에 맞춰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단하고 포장했다. 하지만 현-진과 함께하면서 나는 그에게는 애초에 '삶의 프로젝트'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삶에는 '계획' 대신 '흐름'이 있었고, '통제' 대신 '맡김'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괜찮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의 삶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의 경직된 영혼은 그 흐름 앞에서 조금씩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내면은 또다시 이 혼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나의 오랜 습관인 '분석'이라는 도구를 들고 그의 삶을 해부하려 들었다. 어떻게 그는 재정 계획도 없이, 5년 계획도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의 오래된 '서울식' 두뇌는 끊임없이 명령했다. '그의 시스템에서 오류를 찾아내, 지우.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 안전하지 못하게 될 거야. 너의 모든 불안이 현실이 될 거야.' 내 안의 '안전 제일주의' 본능이 경보를 울렸다. 그 알람 소리는 나의 평온을 갉아먹는 좀 같았다. 그의 삶은 나에게 무척 매혹적이었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의 자유가 너무나 부러웠지만, 나는 그의 삶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마치 나의 모든 안전장치들이 언제 작동할지 모른 채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통제의 반영: 깨어진 환상 속의 질문
어느 날, 결국 나는 이 분석의 욕구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스튜디오가 아닌, 그의 혼돈의 스튜디오에 앉아. 나의 오랜 습관인 '학구적인 진지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른 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불안감과 통제 욕구가 뒤섞여 있었다. "현-진, 너는 두렵지 않아? 너는 매일을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살아. 너의 삶은 마치 거대한 즉흥 연주 같아. 어떻게 그렇게 계획 없이 살 수 있어?" 나의 목소리에는 그를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과 동시에, 나를 안전한 영역에 두고 싶은 통제 욕구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쓰고 있던 기타를 조용히 내려놓더니, 나의 물음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늘 그랬듯 나의 경직된 마음을 이완시켰고, 그의 눈빛은 나의 가장 깊은 불안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지우 씨는요? 지우 씨도 두렵지 않나요? 당신은 십 년 앞을 내다보고 치밀하게 계획했잖아요. 그 완벽한 계획들이 당신이 지금 이 토론토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막아줬나요? 당신의 완벽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지켜줬나요?"
그의 질문은 마치 정확히 겨눈 화살처럼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나의 오랜 환상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나의 완벽한 '통제'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날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져 버린 '안전의 환상'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나의 이십 년 넘는 삶이 철저히 계획되고 통제된 삶이었지만, 결국 나는 길을 잃은 채 토론토의 낯선 스튜디오 바닥에 앉아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계획과 통제가 무의미했다는 잔인한 진실이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삶을 분석하고 통제하려 들었다. 그를 통해 과거의 내 삶을 정당화하려 애썼던 것이다. 만약 그의 '계획 없는' 삶이 결국 실패로 귀결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봐, 나의 통제가 옳았어! 계획 없이 사는 삶은 위험한 거야!' 나는 그의 실패를 통해 나 자신의 과거를 위로받고 싶었다.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추악한 나의 심리였다. 내 안에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나약한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현-진의 거울은 나 자신의 추악함마저도 여실히 비추어 주었다.
카오스의 미학: 잠재력의 발견
현진은 나의 삶에 깊이 들어온 '비실용성의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그는 삶이 비단 깔끔한 선들과 엄격한 예산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우며,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하나의 멜로디였다. 그의 스튜디오의 혼돈 속에서 나는 질서 정연하게 배열된 노트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생생한 삶의 소리를 들었다. 흩어진 악보들 속에서 새로운 화음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내가 바이올린을 '부드럽게' 연주하기를 원했고, 준호는 나의 찻주전자가 그의 '미학'에 부합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모두 '혼돈'을 두려워했다. 혼돈은 그들에게 예측 불가능한 실패이자 고통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혼돈을 실패의 동의어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나의 완벽주의는 사실 혼돈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치열한 방어기제였다. 나의 삶은 혼돈을 피하기 위한 거대한 갑옷을 입고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항상 혼돈이 나약함의 증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해야만 제가 안전하고 강하다고 믿었어요." 나는 나지막이, 나의 가장 깊은 비밀을 고백하듯 중얼거렸다. 나의 목소리는 나의 심장을 뚫고 나오는 진실의 가루 같았다.
현진은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팔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따뜻했고, 흔들림 없었다. 그는 나의 어깨너머로 그의 스튜디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악보들과 기타 케이스, 그리고 여기저기 놓인 미완성된 그림들을 가리켰다. 그의 눈빛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지우 씨, 혼돈은 나약함이 아니에요. 오히려 혼돈은… 잠재력이에요. 세상의 모든 위대한 예술, 모든 최고의 노래는 바로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새로운 질서는 언제나 혼돈의 품 안에서, 어쩌면 무질서해 보이는 그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자라나는 법이죠." 그의 말은 나의 심장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지는 강력한 진동과 같았다.
나는 비로소 내 안의 불완전함 속에서 자유롭게 숨 쉬는 것을 허락했다. 나의 모든 혼란, 나의 모든 미완성된 부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실패'나 '결점'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열정, 나의 색깔, 나의 '음량'은 이제 더 이상 고쳐야 할 '오류'가 아니라, 내가 온전히 실현해야 할 '잠재력'이었다. 나의 삶은 거대한 혼돈의 캔버스 위에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의 풍경이었다. 그는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나의 삶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허락'을 건넸을 뿐이었다. 나는 현-진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예측 불가능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고, 생명력 넘쳤다.
나의 존재, 나의 멜로디: 재정의된 자유
현진의 따뜻한 포옹 속에서, 나는 나의 온 존재가 깊은 안도감과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지우라면 불안해하며 이 모든 순간을 '분석'하고 '계획'했을 테지만, 나는 이제 그저 그 온기 속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느꼈다. 내 안의 오랜 방어막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을 감지했다. 나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롭게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스튜디오 벽에 걸린, 그가 그린 듯한 추상화 속에서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를 보았다. 혼란스러운 선과 색채 속에서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색깔. 이제 나는 안다. 나의 삶 역시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나의 이야기는 질서 정연한 건축 도면이 아니라,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운 멜로디가 피어나는 즉흥적인 음악이 될 것이다.
나는 이 혼돈 속에서 나의 가장 큰 힘을 발견했다. 나의 불완전함 속에서 나의 고유한 미학을 찾았다. 나의 '시끄러운' 목소리 속에서 나의 진실을 들었다. 나의 '비실용적인' 선택 속에서 나의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현-진은 나에게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허락'을 주었다. 그는 내가 나만의 숲을 짓도록 격려했다. 그 숲은 완벽하게 조경된 정원이 아니라, 뿌리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예측 불가능한 생명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가장 야생적인 숲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숲의 주인이자,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한 조각의 생명이었다.
나의 삶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의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 아니었다. 이제 나, 지우는 나의 삶에 바치는 새로운 장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존재하고, 창조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나만의 리듬으로 가득 찬 삶. 나의 모든 감각은 깨어났고, 나의 영혼은 완전히 정렬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확신했다. 나의 말들이, 나의 진정한 목소리가, 마침내 자유롭게 하늘을 향해, 우주를 향해 힘껏 날아오를 것이라는 것을. 나의 영혼은 푸른 하늘을 향해 힘껏 날갯짓을 시작했다. 나는 나만의 숲을 걸으며, 나만의 노래를 부르고, 나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출 것이다. 이것은 완벽한 삶이 아닐지라도, 가장 나다운 삶이 될 것이리라. 나의 삶은 더 이상 타인의 그림자가 아닌, 나의 가장 찬란한 빛으로 빛날 것이다. 현-진의 품에서 나는 나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마침내 화해했다.
내 심장은 마치 거친 폭풍우 속의 파도처럼 불규칙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불안의 리듬을 연주했다. 나는 현-진이 그의 낡고 때 묻은 배낭을 낡은 자동차의 트렁크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며 깊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의 행동은 내가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질서와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었다. 마치 광대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나의 삶을 맡기는 듯한 아찔함. 그와의 여행은 나의 모든 통제 본능을 끝없이 자극했다. 우리는 토론토 시내의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고, 나의 시야에서 건물들이 점점 작아질수록, 나는 십 분마다 휴대폰을 꺼내 구글 맵스 앱을 확인하려는 충동과 싸워야 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예측 불가능한 모든 것이 나의 내면을 흔들어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나의 삶 전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이었다.
내면의 공포 감사- 그림자 속으로의 침잠과 회귀
우리는 온타리오 호수를 향해 북쪽으로 계속 달렸다. 한낮에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푸른 들판과 울창한 숲을 보며 그나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때로는 현-진의 즉흥적이고도 재치 넘치는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흐르는 차가운 해류처럼, 나의 평온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왔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자, 나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불안은 물리적인 존재감을 띠고 나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차창 밖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오직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나는 기억했다. 준호는 항상 여행을 떠나기 전 빈틈없이 짜인 일정과 완벽하게 예약된 5성급 호텔을 요구했었다. 서울에서는 단 한 번도 고속도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뇌는 지난 수년간의 통제 훈련으로 완벽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삶의 길은 언제나 평탄하고 예측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현-진과의 여행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뇌는 이제 경고를 외쳤다. '지우, 위험해! 준비되지 않았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질 거야!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어!'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나의 모든 신경을 잠식해 들어왔다.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가 이미 깊은 어둠 속, 인적이 드문 한적한 도로를 헤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쉬이 이익…' 하는 한숨 같은 소리와 함께 엔진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딸깍!' 하는 단호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헤드라이트도, 대시보드의 계기판도. 우리는 관성으로 자갈 섞인 갓길을 미끄러지듯 달리다, 이내 완전한 어둠과 침묵 속에 멈춰 섰다. 차가 멈춘 순간, 나는 마치 세상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듯한, 아득한 단절감을 느꼈다. 내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주변을 감싼 그 침묵은 그 어떤 시끄러운 소음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내가 토론토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꼈던,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무전 침묵'과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침묵 속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삶을, 나의 가장 깊은 상처를 믿고 맡긴 한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나의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존재였다. 그의 자유로움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희미한 기대는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내 안의 오래된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감정적 붕괴: 분노와 원망의 폭발, 그리고 벌거벗겨진 영혼
나의 오래된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마치 상처받은 짐승이 비명을 지르듯, 과거의 나,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준호의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사용했던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독가스처럼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단어를 고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것은 순수한 패닉과 비난으로 가득 찬 고함이었다. 그것은 내가 과거, 준호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사용했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통제권을 잃었을 때 나를 지배하던 지독한 불안감의 언어.
"이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최소한 오일 정도는 확인했어야 할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아무도 없는 숲 속이라고! 이게 스폰티뉴어스(spontaneous) 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거라고, 현-진! 너는 항상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 우리가 여기서 꼼짝없이 갇히면 어쩔 거야? 휴대폰 배터리라도 다 닳으면? 그때는 어떡할 건데?! 너는 그저 세상이 네 음악에 맞춰 움직여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를 덮치는 눈물은 단순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깊은 분노와 좌절감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고장 난 자동차 때문이 아니었다. 나의 새로운,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자유'라는 싹이 다시 한번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의해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절규였다. 나는 준호의 '통제'를 용서할 수 있었지만, 현-진의 '통제 부재'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예측 불가능한 태도는 나의 가장 깊은 '상실의 공포'를 건드렸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두려움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동일시되고 있었다.
현진은 내가 격렬하게 쏟아내는 비난의 폭풍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의 말을, 나의 분노를, 나의 모든 상처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평온했다. 내가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침묵하자, 그는 조용히 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제 그가 나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더 최악으로, 자신의 잘못을 빌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예상했다(그것이 과거의 남자들이 보여주었던 전형적인 반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나의 예측은 또다시 빗나갔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민주가 떠나기 전 우리에게 챙겨준 두툼한 담요를 꺼냈다. 밤공기 속에 퍼지는 담요의 부드러운 향기는 나의 날카로움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그리고 조용히 나의 차 문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비난도, 그 어떤 불평도,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오직 잔잔한 평화만이 머물고 있었다.
"지우 씨, 나와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깊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듯, 나의 요동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지우 씨 말이 맞아요. 내가 무책임했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고장 난 쇠붙이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지우 씨의 소중하고 '시끄러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야. 그 에너지는 저기 하늘의 별을 보는 데 쓰는 게 더 좋을 거예요." 그의 말은 내가 오랜 시간 낭비했던 나의 감정들을 다시금 내 안으로 돌려놓는 듯했다.
사과하지 않는 별들: 오래된 빛과의 작별과 새로운 발견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혹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 저항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의 모든 에너지가 분노와 좌절감으로 소진된 뒤였다. 나는 천천히 차 밖으로 나왔다. 뼈를 저미는 듯 차가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맑고 깨끗한 공기가 나의 폐부 가득 스며들었다. 현-진은 낡은 자동차 지붕 위에 담요를 펼쳤고, 우리는 그 위에 나란히 누웠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생처음이었다. 도시의 빛 공해라는 필터 없이 바라보는 하늘. 별들은 너무나 '시끄러웠다'. 그들은 마치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처럼, 야생적이고, 엉성하고, 비미니멀리즘적인 빛을 뿜어내며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수 놓인 수많은 불꽃처럼. 그 별들은 그 어떤 변명도, 어떤 사과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장엄함.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나의 모든 두려움과 통제 욕구는 한없이 작아지고 하찮게 느껴졌다.
"저 별들을 봐요." 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나에게 따뜻한 위로와 지혜를 전했다. "당신이 지금 보는 빛은 모두 과거의 빛이에요. 저 별들 중 일부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빛은 수백만 년을 날아와 우리에게 닿는 거죠. 저것이 바로 그들의 '음량'이에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소리."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그 시선은 나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비추는 등대처럼 느껴졌다. "지우 씨의 고통, 지우 씨의 오랜 두려움, 지우 씨의 통제 욕구… 그 모든 것들 역시 지우 씨 과거의 빛이에요. 과거의 강력한 에너지. 아직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는. 그리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우 씨가 그 과거의 빛의 규칙에 따라 지금 이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과거의 빛이 현재를 가두어서는 안 되죠."
그의 말은 마치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과 같았다. 그는 내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혹은 나의 두려움을 부정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의 두려움이, 나의 오랜 고통이, 나의 통제 욕구가 '과거의 빛'일뿐이라고 설명했다. 그 빛을 인정하되, 그 빛에 갇히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현재의 내가 선택하고, 지금의 내가 만들어나갈 빛이 필요하다고. 오래된 빛을 보낼 준비를 하라고.
나는 더 이상 그와 싸우지 않았다. 고장 난 차와도, 이 막막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도 싸우지 않았다. 나의 모든 저항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를 안았다. 우리가 이곳에 꼼짝없이 갇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받아들임 속에서는 어떤 패배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에는 모든 것을 내어놓았을 때 찾아오는 지독한 자유가 있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자유. 나의 영혼은 비로소 무한한 우주 속에서 나의 가장 작은 존재감을 발견하고 있었다.
우리는 낡은 자동차 지붕 위, 두툼한 담요를 덮고 서로에게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우리를 감쌌지만, 우리는 서로의 온기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평화를 느꼈다. 나는 내가 서울의 가장 럭셔리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잤을 때보다 훨씬 더 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나의 몸과 영혼은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찾은 듯했다.
새벽이 찾아오자, 지평선 너머로 희미한 여명이 밝아왔다. 현진은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보았다. 첫 번째 시도. 실패. 두 번째 시도. 실패. 나의 심장은 또다시 불안하게 요동쳤지만, 이번에는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에서, 엔진이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차는 거짓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카오스가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준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삶은 계획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삶은 그저 '현재에 충실한 존재'를 요구한다는 것을. 그리고 계획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준비된 마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던 '통제의 두려움'이라는 과거의 빛은, 그 순간 마침내 소리 없이 꺼졌다. 나의 영혼은 이제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별들이 빛나는 것처럼, 나 자신으로 빛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삶은 이제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