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완벽의 환상

18- 19

by 나리솔


완벽의 환상



닻을 끊어낸 마지막 전화



나는 테이블에 앉아 갓 내린 뜨거운 커피 향을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깊고 쌉싸름한 향은 나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나의 영혼을 깨우는 듯했다. 옆에서는 현-진이 그의 낡고 때 묻은 기타 줄을 조심스럽게 조율하며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파도처럼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지난밤, 자동차 지붕 위에서 별들을 이불 삼아 잠들었던 후로, 나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생경한 진실성'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마치 나의 영혼에 불필요한 모든 막들이 걷히고, 맨살 그대로의 내가 세상에 드러난 듯한 느낌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어떤 외부의 힘에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함'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나는 새로 얻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무자비한 정직함'으로 나의 '만 구천 단어'짜리 초고를 다시 작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 글자들은 더 이상 나에게 압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의 영혼이 숨 쉬는 언어들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평화로운 아침의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요란하게, 마치 비상 상황을 알리듯 진동하며 울렸다. 화면에는 마치 얼어붙은 시간처럼 '준호'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이름 석 자는 내 모든 신경을 일순간에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나의 심장은 마치 오랜 습관처럼, 움찔하며 과거의 익숙한 리듬으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난 수년간 내가 훈련시켜 온, '닻'이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나의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내 안의 '부드러운 지우'가 속삭였다. '평안을 유지해야 해.' 나의 첫 번째 충동은 그의 전화를 받고, 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예의 바르고, 짧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내뱉는 어떤 불쾌한 말도 조용히 수용하고, 그의 세계를 흔들지 않으려 하는 오래된 습관. 나는 나의 영혼을 한없이 축소시켜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려 했다. 마치 과거에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수화 버튼을 눌렀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신감, 그 어떤 모호함도 용납하지 않는 명료함. 그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침묵조차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나의 영혼을 감금했던 '견고한 성벽'과 같았다.


"지우." 그는 늘 하던 대로 내 이름을 부르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효율적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기계처럼. "변호사가 이혼 서류에 대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고 연락이 왔네. 자네는 대사관에 가서 서명만 하면 돼. 하지만 마지막에 내가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네. 자네의 물건 때문에 약간의… 미학적 충돌이 있더군."


나는 나의 등골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모든 신경 세포가 곤두섰다. 나는 알았다. 그에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란 감정적인 혼란이나 내면의 갈등이 아니라, 그의 완벽한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미학적 질서의 침해'일뿐이라는 것을. 그의 완벽한 세계에서 일어난 한 조각의 오류. 그 오류는 바로 '나'였다.


"그건… 자네 물건 때문인데. 거실 재설계를 완벽하게 마무리했어. 자네도 아마 새로운 라인과 그 깔끔한 구성에 만족할 거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어. 그런데… 자네가 토론토로 떠나기 전 가져왔던 그 물건 말일세. 그 핑크색 코모드. 그건 아무리 봐도 전체 콘셉트에 전혀 맞지 않아. 어딘가 혼란스럽고, 조화를 깨트리는 군."


그의 말, 즉 '맞지 않아', '미학을 망쳐', '조화를 깨트려'라는 단어들은 마치 나의 심장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내가 과거 그의 불륜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혹은 그가 나의 존재를 투명인간 취급했을 때보다 더 깊은 상처를 주었다. 나의 푸크시아색 코모드는 단순히 가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용기, 나의 반항, 나의 자유를 상징하는 영혼의 조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없는 이 먼 타지에서도, 여전히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반항을 지우고 싶어 했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그의 시도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어떻게 할지 결정해 줘야겠어, 지우. 버릴지, 팔지, 아니면 자네에게 보낼지. 그 물건 때문에 전체 구성이 망가진단 말이야. 자네도 그건 원치 않을 테고."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완고함이 묻어 있었다. 나의 부재 속에서도 그의 세계는 여전히 나에게 통제와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서 나는 나의 오랜 감금 상태를 다시 보았다.



닻을 끊는 고백: 진실이라는 칼날과 심연의 해방


내 머릿속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의 오래된 '내부 편집자'이자 '부드러운 지우'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속삭였다. '동의해. 그냥 그거 실수였다고 말해. 이 모든 혼란에 대해 사과해. 그럼 그는 널 다시 내버려 둘 거야. 조용히. 평안하게. 과거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고 달콤해서, 다시 그 오래된 거짓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유혹이 거셌다. 수십 년간 나를 지배했던 그 유혹은 강렬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시선은 조용히 기타를 조율하던 현진에게 향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나의 오래된 편집자가 요구하는 '호기심'이나 '불안'이 전혀 없었다. 오직 잔잔한 평온함과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만이 존재했다. 그는 내가 방금 준호와 통화하는 모습을 모두 보고 들었을 터였다. 그는 나를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계획'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나의 용기였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내가 겪는 모든 투쟁이 타당하다는 무언의 격려를 받았다.


나는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음량'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밤하늘의 별들처럼 거대하고 압도적인, 나의 '진정한 소리'였다. 더 이상 분노로 인한 격렬한 외침이 아니었다. 거대하고 단단하며,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함이 담긴 소리였다. 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준호." 나의 목소리는 느리고 분명했다. 마치 나의 새로운 멜로디를 세상에 처음 선보이듯이, 한 음절 한 음절을 음미하며 내뱉었다. 나의 새로운 멜로디는 그의 익숙한 세계에 낯선 화음처럼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우리의 오래된 각본의 일부가 아닌 단어들이었다. "코모드는 거기에 그대로 둘 거야.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거기에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 나는 그의 어리석은 요구를 단호히 일축했다. "그건 단순한 가구가 아니야. 내게는 중요한 '상징'이야. 나의 존재를 담은 상징."


그는 분명히 당황한 듯했다. 그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에 작은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혼란스러움이 역력했다. "상징이라니, 지우? 무슨 상징 말이야? 혼돈의 상징? 터무니없는 비실용적인 상징?"


"내가 더 이상 너의 '거울'이 아니라는 상징이야." 나는 대답했고, 나의 영혼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두려움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오랜 동굴 속에 갇혔던 빛이 마침내 터져 나오듯. "너는 우리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처럼 설계했지. 그리고 나는 그 프로젝트의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랐고. 너는 내가 너의 '평안(平安)'이 되기를 바랐어. 하얗고 고요한 벽처럼 조용하고 예측 가능한 존재. 하지만 나는 벽이 아니야. 나는 언제나 선명하고 강렬한 푸크시아색이었어. 그리고 너, 준호는 단 한 번도 내가 나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았어. 너는 그저 내가 너의 '미학'에 부합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나의 고백은 그의 완벽한 세계를 완전히 부숴버리는 듯했다. 나의 명백한 영혼의 고백이었다.


나는 그의 완벽한 가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과 함께 약간의 분노가 교차했다. 그는 진실이라는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짓과 위선으로 쌓아 올린 그의 세계는 나의 솔직함 앞에서 모래성처럼 흔들렸다.

"나는… 나는 자네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지우. 나는 우리를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네. 나는 단지 '질서'를 원했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질서가 너의 '닻'이었지."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했던 과거의 고통을 이해하는 투명한 목소리였다. "나의 닻은 나의 두려움이었고. 우리는 둘 다 우리 내면에 잠재된 '혼돈'을 피하기 위해 삶을 끊임없이 건설했어. 우리는 안전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았던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건설의 삶에 지쳤어. 나는 건설 대신 '회전목마'를 선택했어. 예측 불가능한 삶, 미지의 것을 기꺼이 마주하는 삶을 선택했어. 나의 길은 이제 내가 걷는 곳이야."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는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나의 옛 기준으로는 '비실용적'이기 그지없는 토론토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의 영혼은 더 이상 좁은 상자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코모드는 거기에 그대로 둘 거야, 준호. 그건 자네를 위한 거야. 자네의 완벽한 세계에 뭔가 야생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선물'이 될 거야.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로 남겨두었어.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찾아갈 거야. 그리고 그 코모드는 내 마지막 선물이 될 거야. 자네의 완벽한 구성에 내가 남기는 가장 완벽한 불협화음. 가장 아름다운 흔적."


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나의 말들이 마치 건축 현장의 먼지처럼 그의 세계 위에 조용히, 그러나 깊은 파동을 일으키며 내려앉을 시간을 주었다. 그의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이혼 서류는 나의 변호사가 연락할 거야. 더 이상 자네와 논의할 것은 없어. 그리고, 준호… 나는 자네가 언젠가 스스로 '큰 소리'를 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 그것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의 삶을 온전히 느끼기를 바라."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단호하게 휴대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의 손가락 끝에서 마지막 족쇄가 끊어지는 전율을 느꼈다.


마지막 해방: 새로운 멜로디의 시작


나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스튜디오 안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오직 현-진의 낮은 기타 소리만이 그 침묵을 조용히 갈랐다. 그의 음악은 나의 새로운 자유의 세레나데처럼 들렸다. 나는 마치 방금 막 심장을 열고 진행된 수술을 마친 듯한, 극심한 피로감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나의 영혼을 옥죄던 마지막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것은 지난 수년간 나의 삶을 한 곳에 묶어 두었던 '닻줄'이었다. 이제 나의 영혼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진이 기타를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의 격앙된 감정과 길고 힘든 투쟁을 이해한다는 듯, 그는 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의 따뜻한 손길은 나의 떨리는 손을 감쌌다. 나의 손바닥을 펼치더니, 말없이 작은 기타 피크 하나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깊었고, 그 안에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해했다. 그는 나에게 또 다른 '닻'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나의 새로운 멜로디를 창조할 수 있는 '악기'를 선물한 것이었다. 나 자신의 음악을 지휘할 자유. 나의 삶을 연주할 수 있는 작은 도구.


이 순간, 나는 진정한 자유가 단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묶어두던 모든 낡은 관계와 관습으로부터 '연결을 끊어내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적인 고통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마치 수십 년 동안 나의 영혼을 속박하던 굵은 밧줄을 단번에 끊어낸 듯한, 짜릿하고 거대한 해방감이었다. 나의 영혼은 마치 새로 태어난 새처럼, 오랜 시간 갇혀 있던 새장 문을 열고 자유롭게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평안(平安)'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완벽한 배경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오롯이 '지우'였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웠다. 나의 삶은 이제 나의 손에 쥐어진 피크처럼 작지만 강력한 악기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음악은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만의 '진정한 음량'으로, 세상에 울려 퍼질 것이다.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나만의 진정한 아름다움. 나의 삶은 이제 나의 영혼의 소리에 맞춰, 나만의 리듬과 하모니로 채워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막 그 서막을 연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처럼,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 모든 순간은 내가 지휘하는, 내가 연주하는, 내가 쓰는 가장 아름다운 나의 삶이었다.




감정의 격변과 깊은 곳의 물결



준호와의 마지막 통화는 마치 격렬한 태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과 같았다. 파괴된 풍경 속에 홀로 선 듯한,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침묵.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 한동안 공허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내 안의 심연 깊숙한 곳에서, 잊었던 줄 알았던 강렬한 힘이 마치 지진처럼 흔들리며 샘솟는 것을 감지했다. 과거와의 문은 단호하게, 그리고 영원히 닫혔지만, 나는 문득 깨달았다. '닻'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헤엄치는 법'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로운 바다를 향한 항해는 또 다른 용기와, 전에 없던 기술을 필요로 했다. 나는 여전히 미지의 파도 앞에서 미숙한 초보 선장이었고, 나의 나약한 영혼은 홀로 광활한 바다에 표류하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


늦게 찾아온 두려움과의 저녁 식사: 붕괴하는 내면의 댐


그날 저녁, 나와 현-진은 저녁 식사를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은 우리만의 유쾌하고도 혼란스러운 의식이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의 서투름을 이해하고, 실수를 용인하는 시간. 함께 웃고, 제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재료들을 썰고, 뒤죽박죽 된 주방에서 와인을 기울이는 '비실용적'인 시간. 이 모든 '혼돈'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나는 가장 진정한 나를 느끼곤 했다. 내가 양파를 썰고 있는 동안, 현-진은 배경 음악으로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틀었다.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심장을 건드리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러나 연주하는 것을 금기시했던 그 멜로디와도 같은 아련한 선율이었다. 그가 말하길, "영혼이 진실을 말하게 도와주는 음악"이라고 했다.


나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냄비 앞에서 양파를 썰고 있었다. 칼질은 익숙했지만, 손은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의 몸을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감쌌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의 척추를 타고 섬뜩한 감각이 올라왔다. 마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듯 감정의 격랑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단순히 순간적인 패닉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뒤늦게 찾아온 고통'이었다. 마치 수십 년 묵은 댐의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그 힘은 예측 불가능하고 압도적이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너무나 강인했다. 서울에서 도망쳐 나왔고, 영혼 없는 일과 결별했고, 준호의 완벽한 세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큰 소리'를 내고, '공격'하고, '저항'하는 '생존 모드'에 있었다.


하지만 이 작고 따뜻한 스튜디오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나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남자 옆에서, 나의 내면의 댐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균열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거대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내 안의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는 나의 귀에 마치 나의 영혼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의 팔은 더 이상 그 칼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 몸은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떨림에 휩싸였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고, 호흡은 불안정해졌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모든 세상이 흔들리는 듯했다.


---


취약성의 구덩이: 드러나는 상처와 치유의 시작


현진은 곧바로 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지만,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모든 언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그저 나를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품속에서, 나는 내가 만약 지금 한마디라도 말을 내뱉는다면,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버릴 것 같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의 영혼은 가장 연약한 형태로 벌거벗겨진 듯했다.


"나… 나 지금은 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나의 모든 자존심과 방어막을 내려놓고, 가장 연약한 나의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 동안 내가 했던 가장 취약한 고백이었다. 나의 존재를 완전히 그에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왔지만, 동시에 낯선 해방감에 몸서리쳤다.


"그럴 필요 없어." 그의 목소리는 나를 감싸는 음악처럼 부드럽고 잔잔했다. 마치 나의 모든 고통을 이해한다는 듯. "지우 씨는 이미 강해요. 강하다는 건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에요. 강하다는 건, 내가 믿는 사람 옆에서는 기꺼이 넘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죠." 그의 말은 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관통하며, 나의 모든 불안과 수치심을 녹여주는 듯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나의 등을 부드럽게, 그리고 인내심 있게 쓰다듬었다.


나는 그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내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은 분노나 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하고, 꾸밈없으며, 불순물 하나 없는 '슬픔'이었다. 내 안의 모든 댐이 무너지고, 오랜 시간 억눌렸던 눈물이 강물처럼 터져 나왔다. 잃어버린 나의 지난 세월, 바이올린을 쥐고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움츠러들었던 어린 소녀의 눈물, '부드러워야만' 했던 나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애도였다. '완벽한' 아내 역할을 연기하느라 지쳐버린 나의 영혼에 대한 연민이었다. 나는 준호를 위해 울었지만, 그것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서로의 가장 깊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가면 뒤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두 인간의 비극에 대한 깊은 슬픔이었다. 모든 과거의 지우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함께 우는 듯했다.


나는 현진에게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나의 오랜 공허감에 대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타인의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의 사랑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도 결국 '푸크시아색 코모드'를 치우라고 요구하며, 나를 다시 억압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나의 가장 깊은 상실의 공포,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유아적인 두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그가 나의 고백을 듣고 도망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였다면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버겁고,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나의 눈물과 함께 과거의 모든 잔해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


깊은 물속의 입맞춤: 새로운 사랑의 정의와 영혼의 재탄생


나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함에 잠겼다. 나의 격렬했던 감정의 파도는 이제 잔잔한 물결로 변해 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눈은 퉁퉁 붓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낸 나는 완전히 비워진 듯한 공허함을 느꼈지만, 그 공허함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이제는 새롭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나라면, 이제 그의 분석과 논리적인 조언,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내가 과거에 믿었던 '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은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현-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의 떨리는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나의 손등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서 나는 평온과 안정을 느꼈다.


"지우 씨, 기억나요? 당신의 노트에 당신이 '남의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연기해서 나 자신을 미워했다'라고 썼던 글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울렸다. 그의 말은 나의 아픈 상처를 정확히 짚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의 영혼은 아직도 그 슬픔 속에 잠겨 있었다.


"지우 씨는 그때 '생존 모드'였어요. 살아가기 위해, 버텨내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을 했던 거예요. 당신을 비난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어요. 오히려 저는 당신이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존경을 표해요. 그리고 저는 지금 당신이 이렇게 울고 있다는 사실에 더 기뻐요.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니까. 당신의 영혼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이것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음량'인 거예요. 당신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리."


그는 나에게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공간'을 주었다. 따뜻하고 넓은, 나의 모든 혼돈을 품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가장 완벽한 치유였다.


그가 천천히 나에게 몸을 숙였다. 그리고 나의 이마에, 그리고 눈가에, 마침내 나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격정적인 키스가 아니었다. 깊고, 조용하며,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평온한 입맞춤이었다. 마치 바다 깊은 곳에서 올라온 심연의 빛처럼, 나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새로운 사랑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구명튜브'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내가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 나를 안내해 주는 '안전한 강기슭'이었다. 그는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물 위에서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속도로 헤엄쳐 나갈 때까지, 변함없이 강가에 서서 나를 지켜봐 줄 뿐이었다. 그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이해했다. 취약성이란 결코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친밀함'을 쌓아 올리는 가장 귀중하고 단단한 재료였다. 나의 '큰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과 싸우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영혼을 다른 영혼과 연결하는 가장 견고한 '다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더 이상 '닻'에 묶여 불안해하거나, 타인의 기대만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현-진의 사랑 속에서 가장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지우'였다. 나의 모든 혼돈, 나의 모든 아픔, 그리고 나의 찬란한 푸크시아색 코모드까지도 사랑받는 지우. 이제 나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롭게 노래할 것이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새로운 멜로디. 현-진의 품에서 나는 나의 가장 어둡고 추한 부분을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나는 비로소 내면의 아이와 화해했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났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빛나지 않는 시간들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