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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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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솔

붉은 부츠


창밖엔 햇살 조각들이 팔랑거렸지. 장난꾸러기 바람이 나무들을 흔들어 벽 위로 드리운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기묘한 모양을 바꾸고 있었어. 하은이는 창틀에 올라앉아 작은 창문을 열고 봄의 싱그러운 숨결에 얼굴을 내맡겼지. 개혁이니 뭐니 해도 계절은 자신만의 변치 않는 생명력으로 묵묵히 흘러가는 법이니까.


… 공장에선 또다시 구조조정이 있었고, 작업장은 거의 멈춰 섰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 사장님은 눈을 피하며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은이에게, 아니 정식 직함으로는 안하은 과장에게 출장비 없이 다녀와 줄 것을 부탁했어. "비행기 표는 물론 줄게, 하지만 그 이상은… 알지? 정말 가진 게 없어. 본사에 가서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좀 알아봐 줘."


하은이는 즉시 승낙했어. 이렇게 돈 없고 경력이 불안정한 때, 하다못해 지방의 큰 도시라도 나갈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누가 알겠어.


본사에는 하은이만의 특별한 '연줄'이 있었지. 재정팀의 선우 부장님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직무상 범죄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은이가 그의 사무실에 나타날 때마다 그는 깜짝 놀라 의자라도 넘어뜨릴 듯이 벌떡 일어서곤 했어. 그렇게 어색하고도 행복하게 시골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녀만을 기다렸고, 다음 만남까지 오직 그녀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 같았지.


하은이는 속으로 잘 알고 있었어. 이 온순하고 나이 든 아저씨는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너무 지루하고 예측 가능하며, 상사의 어떤 지시에도 무조건 열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그녀는 왜 자신이 이 보잘것없는 숭배자를 애써 멀리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도 없었어. 그냥, 그가 흥미롭지 않았을 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선우 부장님은 의자가 넘어질 뻔할 정도로 벌떡 일어서서는, 그녀에게 달려와 "차나 커피 드릴까요?" 하고 부산하게 굴었어. 이웃 사무실로 주전자를 가지러 나간 틈을 타, 하은이는 창틀에 올라앉아 4월의 신선한 숨결을 방 안으로 들이켰지. 그때 방문이 바람에 활짝 열리며 그녀의 치마가 펄럭였고, 문간에 선 선우 부장님은 충격에 휩싸인 채 굳어버렸어. 글쎄, 노인이라고 해도 열 살 정도 더 많을 뿐인데, 그는 마치 북극광을 보거나 일식이라도 강림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


하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려 치마의 주름을 매만졌고, 화제를 돌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어. 물론 중요한 업무 이야기였지, 끊임없는 개혁 속에서 폐지될지, 아니면 살아남을지 모를 본사의 이런저런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작은 해프닝 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녹아내리며, 벽에 비친 햇살 조각들처럼 장난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어. 봄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원치 않아도 생기가 돋아나는 계절이니까.


아, 얼마나 멋진 새 날인가!

눈부신 가장자리들,

다이아몬드 브로치 같아!


검은 까마귀가 글라이더처럼

부드럽게 햇살 위를 미끄러지고,

날갯짓 한 번에 산 위로 솟아올라

곧장 태양을 향해!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햇빛을 스치듯 다시 지구로 미끄러져 내려오네.

말해줄래, 어떤 힘이 새를

뜨거운 햇살 속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게 하는지?

오, 날씨 정말 최고!

피부로 느껴, 스물다섯,

그러니 여름이 다시 올 거야!


… 정보를 캐내고, 이 부서 저 부서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차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건과일도 바삭거리며 먹고… 하은이는 선우 부장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돌아왔어. 이제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까. 그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지. 그는 가는 내내 별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였어. 이런 날에는 삶의 모든 것을 뒤집고, 뭔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싶어 진다고, 세상 끝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다고!


하은이는 웃으면서 대답했어. "그럼 딱 저희 공장이죠. 거기야말로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온갖 어리석은 짓들로 가득하거든요…"


그들이 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어.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차를 권했고, 그는 소년처럼 수줍게, 마치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끄덕였지.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감쌌어.


그 후의 모든 일은 두 사람 모두 희미하게 기억했어. "아, 내 호텔, 너는 호텔, 내가 침대에 앉으면 너는 움직이고, 속눈썹 커튼으로 나를 가려주네…"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어. 선우 부장님은 너무나 열광적으로 미숙하고 서툴렀기에, 곧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하은이의 몫이 되었지. 비록 그녀의 심장도 덫에 걸린 어린 방울새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지만. 선우 부장님의 감동적인 서투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색하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어떤 고백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온몸으로 그의 키스에 반응하며 떨어질 수 없었어. 그는 강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지.


둘은 오랫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마당에 무슨 말을 하겠어! 선우 부장님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옷을 입기 시작했고, 조용히 중얼거렸어. "가야 해요. 이미 늦었어요." 하은이는 시트에 몸을 감은 채 그에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키스했고, 그는 문밖으로 쏜살같이 나갔지.


하은이는 방을 서성였어. 샤워실에 들어갔지만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아무런 결과도 초래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무언가가 되돌릴 수 없이 움직여버린 거야. 마치 거대한 빙산이 떨어져 나와 하얀 배처럼 미지의 먼 곳으로 유유히 떠내려가는 것만 같았어.

시계를 보니 아직 시내를 좀 더 거닐 시간이 있었지. 기차는 어차피 놓쳤으니, 호텔을 하루 더 연장하고 내일 저녁 기차를 타야 할 것 같았어.


봄 햇살의 떠들썩함과 뜻밖의 이른 온기에 촉촉이 젖은 시끄러운 저녁 도시를 하은이는 걷고 있었어. 말썽 부린 여학생처럼 가볍고 구름 한 점 없는 기분이었지. 왠지 모르게 배가 고팠고, 어쩌면 와인 한 잔이나 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마시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구두를 파는 협동조합 가판대였어. 지난 한 해 동안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는데,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옷도 가방도 만들더니, 어라, 심지어 부츠까지 파는 거야! 하은이는 진열장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높은 굽의 빨간 부츠를 찾아달라고 했어. 작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 부츠를 신어보니 아주 마음에 들었지.


다행히 지갑 속 돈은 충분했고, 기분 좋은 표정의 점원에게서 커다란 상자를 받아 들고 하은이는 다시 호텔로 향했어. 아주 즐거운 산책이었지! 지금 같은 시대에 그녀가 산 부츠를 본다면 온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야!


방에 도착해서 코트를 벗어던지고, 하은이는 양쪽 부츠를 다 신어보고 굽 소리를 내며 걸어보려고 했어. 즐거운 기대감에 차서, 여전히 행복한 기분으로 부츠를 꺼내 흰 종이를 치웠지. 자, 오른쪽 부츠는 좋고… 이제 왼쪽 부츠를 꺼내는데… 어라? 이것도 오른쪽 부츠잖아! 그녀는 한쪽 발에 신는 부츠 두 켤레를 산 셈이었어! 하은이는 박장대소하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지. 정말 어리숙한 바보 같으니라고, 누가 마지막 돈으로 이렇게 물건을 산대?


내일은 가서 바꿔야겠지. 그렇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로 그녀는 잠이 들었어.


다음 날 아침, 하은이는 일찍 본사에 들르기로 했어. 멋진 핑계가 있었지. 출장 보고를 해야 했으니까. 비록 사장님이 일당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비행기 표는 지불했으니 형식적으로라도 출장 정산을 해야 했어.


봄의 몽롱함 속에서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어. 얼굴에서 살짝 미끄러져 내려온 미소는 그녀의 눈 속에 깊이 자리 잡았지. '어때? 정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잖아?'


그때, 맞은편에서 선우 부장님이 걸어왔어. 아니, 이젠 그냥 선우 씨였지. 하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그를 향해 행복하게 활짝 웃었어.


그는 하은이의 두 손을 덥석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어. 혼란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횡설수설 말을 꺼냈지.


"안 과장님, 저에게 오지 마세요. 누가 우리를 볼 수 있어요… 어젯밤 제가 좀 지나쳤던 것 같아요, 이 바보 같은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알아요, 집에 가는 길에 얼마나 창피하고 괴로웠는지, 모든 개들이 저를 향해 짖으며 제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오랫동안 집 주위를 서성이다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겨우 아내에게 변명하고 들어갔어요. 제가 어떻게, 하은 씨, 이렇게 어리석게…."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 삶의 한 조각을 섬세하게 포착한 듯, 깊은 여운을 남기는 짧은 산문이네. 주인공 하은이의 내면과 외부의 현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감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우리의 모습도 겹쳐 보이는 것 같아.

이 이야기는 불안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욕망과 그로 인한 실망, 그리고 삶의 현실적인 무게에 대해 말하고 있어.


하은이는 공장의 구조조정과 경력의 불확실성이라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출장을 떠나. 그곳에서 자신에게 마음을 품은 나이 든 남자, 선우 부장님과의 짧고 격정적인 순간을 맞이하지. 이 순간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봄날 같은 설렘과 희망을 선사해. 마치 얼어붙었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이었을 거야.


하지만 이 설렘은 오래가지 못해. 선우 부장님의 현실적인 두려움과 후회, 그리고 사회적 시선에 대한 걱정은 그들의 찰나의 연결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아. 하은이는 그의 연약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순수했던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끼지.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순식간에 사라진 환상과 마주한 씁쓸한 인정이 묻어나는 것 같아.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붉은 부츠는 이러한 감정선의 중요한 은유야. 어둡고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하은이가 충동적으로 구매한 붉은 부츠는, 어쩌면 **삶에 대한 열정, 새로운 시작, 혹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고 싶은 그녀의 내밀한 욕망**을 상징했을지도 몰라. 벅찬 기대감으로 상자를 열었을 때, 두 켤레 모두 오른쪽 부츠라는 사실을 깨닫고 터져 나오는 웃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슬픔과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 불완전함, 어쩌면 그녀와 선우 씨의 관계 또한 그 부츠처럼 온전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해.


결국 이 이야기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되는 개인의 욕망과 희망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

순간의 강렬한 감정 뒤에 찾아오는 현실적인 고뇌와 선택

삶의 아이러니와 그 속에서 찾아오는 슬프지만은 않은 깨달음.



나리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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