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
송영은 평범한 아가씨였죠. 직장 동료인 멋진 남자와 달콤한 연애를 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어요. 하지만 평범했던 공원 산책은 송영을 16세기 조선으로 데려가 버렸어요. 그곳은 신화 속 괴물들이 살아 숨 쉬고, 마법 의식이 펼쳐지며, 하늘에는 진짜 용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죠.
낯선 조선의 현실 속에서 송영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이 조선은 교과서에서 배운 그 조선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송영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변형된 '비(非) 조선'의 역사를 파헤치며, 신비로운 용군(龍軍) 대장의 운명까지 함께 풀어내야만 할 거예요.
이 장대한 이야기는 한 젊은 여인의 운명을 그려내고 있어요. 그녀는 고려와 일본군 사이의 대결 속에서 작은 부품이 되고, 믿었던 이들의 복잡한 음모 속에서 갈등하죠. 하지만 강인한 정신을 지닌 자들은 결코 꺾이지 않아요. 용군 병사들의 심장 속에는 여전히 희망이 고동치고 있고, 그 대장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천천히 꽃피고 있답니다.
이 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16세기 한반도의 역사적 사건들을 부분적으로 각색한 것이지만, 등장인물, 사건, 언급된 사실들은 실제와 다릅니다. 실제 존재하는 인물들과의 모든 우연한 일치는 우연일 뿐입니다.
1580년, 쓰시마섬, 금속 용의 해.
원순 대사와 두 제자, 그리고 소규모 호위 병사로 이루어진 조선 사절단은 일본 사절단과 동시에 백호 사원에 도착했어요. 도요토미 장군과 그의 아들, 그리고 아시가루 보병들은 산 서쪽 비탈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원순 대사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그의 제자들도 즐겁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어요. 장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을 맞이했답니다.
일본 사절단이 먼저 산길을 오르고, 원순 대사와 그의 제자들이 그 뒤를 따랐어요.
"장군 아들의 갑옷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대사의 큰 제자는 장군 아들의 등을 보며 속삭였어요. "햇빛 아래선 좋은 표적이 될 것 같아."
작은 제자는 씩 웃으며 반박했죠. "그가 후미에서 전선으로 나올 일은 거의 없겠지."
"그럼 갑옷도 필요 없잖아?"
"내가 뭐라고 했느냐." 원순 대사는 제자들의 짓궂은 농담을 끊으며 말했어요. "경의를 표해라. 장군 아들이 너희들의 조롱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새 갑옷을 누구에게라도 자랑하려고 온 거겠지!" 큰 제자가 낄낄대자, 작은 제자도 웃음을 터뜨리며 산길 모퉁이에서 그의 옆구리를 툭 쳤어요. 그들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했고요.
백호 사원은 오래된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두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낡은 문지방에는 겉보기에 젊어 보이는 무녀의 딸, 란이 겸손하게 서서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죠. 그녀는 장군과 대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조용히 말했어요.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가 마쳤습니다."
장군과 대사가 연달아 사원 안으로 들어섰고, 대사의 제자들도 그 뒤를 따르며 계속 속삭였어요. 그들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길 잃은 바람과 함께 오래된 사원 벽과 지붕의 낡은 들보 아래로 사라져 먼지 덮인 거미줄에 걸렸답니다.
"이번엔 일본인들이 웬 장군님을 통째로 보내셨을까? 아들까지 끌고 오고 말이야!"
"우리 보고는 왜 오라 했을까, 이 바보야?"
"우리 중 한 명은 대사님의 후계자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수호자가 될 사람이야. 카메코 님 말씀을 우리가 가장 귀담아들어야 하잖아!"
"그건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게 아니야."
"넌 뭘 얼마나 안다고. 나보다 어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그들은 제단에 앉아있는 무녀 카메코에게 다가갔어요. 백발의 카메코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여우의 발톱 자국처럼 보이는 오래된 상처를 숨기고 있었죠. 예전에는 섬 주민들이 그녀를 키츠네라고 믿었어요. 카메코는 이십 년 넘게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쓰시마 숲에서 여우를 본 지도 더 오래되었으니, 소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설화와 뒤섞였답니다. 흰옷 무더기에 둘러싸인 카메코는 등줄기를 꼿꼿이 세운 채 조언을 구하러 온 이들을 물러선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어요. 한쪽 눈은 백태가 껴 있었고, 다른 한쪽 회색 눈으로는 오직 앞만을 보고 있었죠. 과연 그녀가 손님들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어요.
도요토미 장군과 원순 대사는 무녀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 숙여 깊이 인사했어요. 장군의 아들과 대사의 제자들은 제단을 둘러싼 나무 기둥 두 번째 열 뒤편에 떨어져 서 있었죠. 작은 제자는 시간의 흐름 속에 회색빛으로 변한 사원 벽의 백호 그림을 살펴봤고, 큰 제자는 낡은 마룻바닥의 구멍을 샌들 끝으로 쑤셔댔어요.
"지난번에는 더 나이 들었던데." 갑자기 무녀가 목쉰 소리로 말하며 발음을 삼켰어요. 그녀가 누구에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노파는 고개를 어느 쪽으로도 돌리지 않았고, 손은 무릎에 얹고 있었으며, 떨리는 손가락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요.
"십 년 전에는 저의 장인, 아사노 님이 찾아뵙지 않았습니까." 도요토미 장군이 몸을 숙여 대답했어요.
"그때는 네 아들과 함께 있었지." 이번에는 카메코가 원순 대사에게 말했어요. 대사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다시 인사했어요.
"제 아들이 아니라 저의 큰 제자였어요, 카메코 님. 하지만 그도 오늘 저와 함께 왔습니다."
"그는 너와 함께 있지 않아." 노파는 목소리를 낮춰 반박했어요. "보니, 그는 너를 떠났어."
제자들은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대사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다만 그의 흔들리는 등만으로 무녀와의 대화가 원순 대사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답니다.
"네 아들은 남의 땅을 밟고 다니겠구나." 카메코는 이제 장군에게 몸을 돌려 말을 이어갔어요. "먹어도 배부름을 모를 거야."
도요토미 장군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옆에 서 있던 아시가루 병사들은 그의 턱 밑에서 꽉 조여드는 근육을 알아차렸죠. 대사의 제자들은 서로를 흘긋 보며 어깨를 으쓱했고, 작은 제자는 카메코 할머니의 삐걱거리는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모든 것은 시간이 판가름할 거야... 그리고 그 금속 용(龍)이 말이지."
원순 대사와 장군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움직이지 않는 무녀를 바라봤어요.
"금속 용은 수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카메코 님." 도요토미 장군이 상기시켰어요. 제단에서 멀찍이, 대사의 제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 있던 장군의 아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무녀의 딸이 그의 길을 가로막았어요.
카메코가 다가올 십 년의 예언을 발표하기 위해 손님들을 사원에 초대한 것이 벌써 일곱 번째였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누구도 감히 그녀의 말을 끊으려 하지 않았어요. 오늘 장군의 아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죠.
"전쟁이 다가오고 있어." 할머니는 힘겹게 신음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냈어요. "세상의 운명이 우리 아이들의 어깨에 지워질 거야. 힘든 시간이 될 게다. 심연(深淵)이 우릴 지켜보고 있어. 눈은 감겨 있지만, 곧 눈꺼풀을 들어 올릴 것이다."
장군은 성난 듯 한숨을 쉬었고, 원순 대사는 이 무거운 말을 겸허히 받아들였어요.
그 순간, 카메코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고, 갑자기 사원 안으로 몰아닥친 바람이 울부짖으며 대사의 제자들과 장군의 아들을 스쳐 지났고, 기둥을 따라 지붕 아래로 솟구쳐 올랐어요. 귀를 찢을 듯한 바람의 거센소리 속에서, 무녀의 손님들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었답니다.
"그리고 검은 심연에서 금속 용이 나타나 길을 선택하리니, 그의 선택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젠장!
마음속으로만 욕하기엔 부족했는지, 송영은 식탁 다리를 걷어찼고 이내 후회했어요. 노트북은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서 덜덜 떨렸고, 커피잔은 금방이라도 넘어져 끈적끈적한 라테가 망할 계산 결과들을 온통 뒤덮을 듯 위태롭게 흔들렸죠. 그녀는 커피잔을 붙잡으며 컴퓨터 모니터의 무심한 숫자들을 계속해서 욕했어요.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지 데이터를 다시 계산하고, 박 팀장에게 그가 모든 것을 정확하게 해냈다고 알려주는 것뿐이었어요. 내일 있을 시연회에서 그녀 부서의 발표 성공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었거든요. 이 시연회는 모든 연구소가 다음 해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중요한 자리였죠. 하지만 지금 영은 표의 숫자들을 보면서 어디서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제발, 모든 게 제대로 작동하기를! 그저 시스템 오류이기를! 영은 데이터를 세 번째로 처리하기 시작했어요. 컴퓨터는 잠시 멈칫하더니, 블랙홀의 강착 원반 변화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곡선 그래프 대신, 거미 다리처럼 보이는 여덟 개의 꺾인 선을 보여줬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였죠.
망할, 이런!
박 팀장은 저녁 여섯 시에 회의에서 돌아올 거예요. 지금 시계는 세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영이 점심을 거르면 모든 것을 다시 확인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부디 신들이 그녀를 도와주기를.
"윗 부서에서 신입이 온다던데." 윤아가 자기 자리에서 활기차게 말했어요.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옮기는 거래요." 태경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받아쳤어요. 그는 일 중독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사무실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어요. 박 팀장이 이번 달에만 두 번이나 그가 중국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것을 잡았으니까요. 태경은 상사에게 능숙하게 아첨을 하는 덕분에 매번 무사할 수 있었죠. 그는 능글맞고 운 좋은 녀석이었어요.
"송영 씨, 김래원 씨도 이거 아무것도 모르세요?"
"어?"
윤아는 의자를 움직여 통로로 나왔고, 세 개의 빈 책상 건너편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친구의 등을 찾았어요.
"선배는 신입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M-87 부서에서 온대요. 똑똑하긴 한데, 적응을 잘 못 했다고 들었어요."
"못 들었어." 영은 손을 휘저으며 대꾸했어요. "미안해, 윤아. 나 지금..."
새로운 검사에서도 또다시 이상한 결과가 나왔어요. 영은 화가 나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고, 노트북과 쌓여 있던 수첩들, 그리고 빈 커피잔들이 쿵 소리를 내며 흔들렸어요. 태경은 깜짝 놀라 으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죠.
"송영 씨! 팀장님께 보고서가 맞다고 말해요, 어차피 다시 확인하지도 않을 거예요. 시연회 끝나고 처리해요."
"안 돼." 영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시연회 끝나면 모든 발표가 M-87로 넘어갈 텐데, 제대로 된 자료 대신 엉터리 자료를 보내고 싶지 않아."
"음, 약혼자가 처리해 주겠죠." 태경이 비꼬듯 말했어요. 영은 그들의 책상 사이 칸막이 너머로 그를 노려보며 침을 뱉을 뻔했어요.
"그는 내 약혼자가 아니야." 영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어요.
"음,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면 약혼자도 되지 못할걸." 태경은 아무 생각 없이 동의했어요. 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죠. "네 머리는 이제 머리 모양이 아니라 둥지 같아. 너무 초조해하지 마, 송영 씨. 보고서는 네 것도 아니잖아. 그냥 던져 버리고 좋아하는 선배랑 데이트나 가. 뭐 하러 괜히 걱정해."
영의 마음속 약한 목소리는 동료의 말에 동의하고, 남의 실수는 내버려 둔 채, 래원과의 특별한 데이트를 위해 떠나라고 속삭였어요. 그녀는 새로운 구두까지 신었고, 그 두 시간 동안 발뒤꿈치가 피가 나도록 짓눌렸지만, 래원과의 데이트를 꿈꾸며 설렜죠. 결국, 박 팀장은 영이 실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데모 전날 그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칭찬하지 않을 거라는 목소리가 그녀를 설득했어요. 선배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하지만 내일, 그녀는 일반 회의실에서 발표를 지켜보며 연구소 경영진의 평결을 기다리게 될 것이고, 실수가 계속되는 계산에 영향을 미칠까 봐 초조해하며 걱정할 거예요…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치 구미호처럼 자신의 간을 뜯어먹는 심정이 될 거예요.
자신을 저주하면서도, 래원이 자신보다 더 인내심 있고 다정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영은 계산으로 돌아갔어요. 래원은 1층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창가에 앉아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트레이를 앞에 두고 있었죠. 카페는 이미 영업을 마치고 어슴푸레한 조명이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어요.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 완벽한 분위기였죠. 래원은 이날 저녁을 더 로맨틱한 장소에서 보낼 것을 약속했기에, 영은 첫 데이트 때보다 세 배나 더 긴장하고 있었답니다.
그녀는 문가에 멈춰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기둥의 굽은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어요. 밝은 블라우스(이것 봐, 옷깃에 커피 얼룩이?!)에 살짝 구겨진 바지… 하지만 대체로, 영은 끔찍한 보고서 때문에 두 시간을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사람치고는 단정해 보였어요. 그래도 그녀는 찾던 것을 찾아냈고(늘 이런 부주의함이라니!), 멋진 그래프를 얻어냈죠.
그녀는 살짝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래원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향했어요.
"선배." 영은 조용히 불렀어요.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림자가 그의 뺨에 드리워져 래원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진지해 보였고, 마치 날카롭게 굳고 수척해진 듯 평소와 달리 차갑게 느껴졌어요.
"오, 송영 씨! 괜찮아요?"
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에 앉았어요.
"미안해요, 늦어졌어요. 제가 거기…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배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송영 씨." 선배는 미소를 지었고, 얼굴이 붉어졌어요. 영은 당황해서 의자에서 녹아내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어요. 이거 정말 중요한 데이트잖아, 그렇지? 래원이 일주일 내내 오늘 저녁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저…" 영은 선배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푸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분명 긴장한 거예요. 영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년 동안 빠르게 진행된 그들의 관계에서 이런 데이트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말이죠.
"가요, 송영 씨." 그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특별한 곳으로 데려다주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영은 테이블 다리에 걸려 비틀거렸지만, 선배가 적절한 순간에 팔을 받쳐주어 넘어지지 않았어요. 그녀가 이 저녁을 꾸며낸 것이 아닐까요? 선배는 정말 그녀에게 그 중요한 질문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요!
김래원은 서울의 명문 연구소에서 부산의 우주 연구소로 전근 왔고, 곧바로 스타가 되었어요. 그의 부서에 그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었고, 블랙홀의 행동에 대한 그의 발표는 M87의 다른 모든 동료들을 질투하게 만들었다고들 했죠. 경영진은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왜 더 일찍 오지 않았는지, 서울이 왜 그런 인재를 부산에서 숨겨왔는지 분개했어요. 영은 김래원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한다는 점이 좋았고, 점심시간에 그녀가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조심스럽게 웃어주는 모습도 좋았어요. 래원이 만난 지 한 달 만에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송영은 참지 못하고 M87 사무실에 초콜릿과 서투른 사랑 고백을 들고 찾아갔을 거예요.
"자네 팀은 강착 원반의 섬광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있지?" 래원이 문을 잡아주자 영은 선배 앞을 지나 저녁의 시원한 공기 속으로 나섰다가, 한 발을 다른 발에 문지르며 멈춰 섰어요. "어떻게 생각해?"
"네?"
선배는 미소를 지으며 연구소 내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가자고 영에게 손짓했어요.
"블랙홀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송영 씨?" 래원이 갑자기 물었어요.
"저는…" 영은 마른 입술을 핥았어요. 그가 세상의 오래된 주제를 그녀와 논하고 싶은 걸까요? "제 생각엔 블랙홀 안에서는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그냥 환상이에요, 선배."
영은 말을 멈추고 래원을 바라봤어요. 엄마는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죠. 그것은 사회생활에 좋지 않다고요. 하지만 공원 구역의 그림자 속에서 영은 선배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아닌,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늘 보던 건강하지 못한 빛을 발견했어요. 자신의 일에 헌신적이고, 거의 광적으로 블랙홀을 연구하는 래원은 이 점에서 영과 비슷했고, 그래서 그녀는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어요.
선배는 정류장으로 다가가며 영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그녀는 만일을 대비해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혹시라도 호기심 많은 동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연구소 전체에 소문을 퍼뜨릴까 봐요.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래원의 손을 부끄럽게 잡았어요.
"아직도 윤아 씨와 태경 씨가 무슨 말을 할지 걱정돼요?" 래원이 웃으며 말했어요. 영이 어깨를 으쓱하자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자신의 따뜻한 손안에 감쌌어요. 그의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찢어진 흉터는 걱정으로 촉촉해진 피부를 익숙하게 긁었어요.
"조금요. 그들은, 선배도 아시다시피, 지나치게 예민하거든요."
래원이 조용히 웃었어요.
"영 씨가 예민하죠."
아마도요. 송영은 첫 데이트 때처럼 자신감 없는 기분이었고, 그 남자가 나타나면서 쏟아진 사랑과 관심의 파도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래원은 그녀가 평생 지속될 것을 꿈꾸게 한 첫 번째 남자였고, 이 새로운, 욕심 많은 영의 모습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죠.
그들은 남쪽으로 가는 버스에 탔어요. 송영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어요. 래원이 손을 잡고 있는 내내, 그녀는 다가올 대화에 불안해 떨고 있었죠.
"괜찮아요…?" 래원이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영은 짧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어요.
"네. 네. 시연회 때문에 걱정돼서요."
래원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모든 것이 잘 될 거예요. 영 씨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으니, 이제 연구소의 미래는 영 씨에게 달려 있지 않아요."
"왜요?" 영은 말을 더듬었어요. "진심이에요?"
"물론이죠.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하면 돼요, 영 씨.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지 말아요."
이 점에서 그들은 극명하게 달랐어요. 영은 자신만을 위해 두려워할 줄 몰랐지만, 래원은 자신의 행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으며 살았으니까요. 아마도 고아로 자란 삶이 그에게 이렇게 가르쳤을 것이라고 영은 여러 번 생각했어요. 래원은 어떤 중요하고 현명한 이의 이름을 딴 수도원의 고아원에서 자랐고,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 없이 성장했기에 스스로 길을 찾아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는 법을 배웠어요. 영의 어머니는 그것이 그의 삶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질이라고 말씀하셨죠. 영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래원을 자신이 정해놓은 길에서 끌어내 세상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은 연민이 솟아났어요. 그녀는 첫 만남 이후 반년 동안 이 충동을 억눌러 왔어요.
"영 씨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네?"
"네. 블랙홀 저편의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뒤집혀 있죠…"
그들은 공원 앞 정류장에서 내렸어요. 공원은 산업 단지를 둘러싸는 소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었고, 어두운 시간에는 혼자 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고들 말했어요. 하지만 선배는 영을 가로등이 밝히는 포장도로를 따라 걷게 했어요. 주변에서는 기분 좋은 저녁 소음과 이순신 장군 동상 뒤를 지나는 고속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어요.
영은 부처상만큼 큰 청동 조각상의 그림자 아래에서 멈춰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어요.
"이 기념비가 그렇게 좋아요?" 래원이 미소를 지었어요. 영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고, 사진은 흔들렸어요.
"그는 국가지 영웅이잖아요, 선배.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죠."
래원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영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조선 역사에는 꾸며낸 제독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웅들이 많았어요."
영은 선배에게 고개를 돌렸고, 다시 사진을 찍을 기회를 놓쳤어요.
"그가… 아, 농담이었군요. 그만해요, 선배. 이순신은 진짜 영웅이고, 선배는 늘 그의 존재를 부정하죠. 그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분수대를 돌고, 가지런히 심어진 화단들을 가로질러 공원으로 들어섰어요. 그곳에서는 키 작은 단풍나무들이 보리수나무로 바뀌고 있었죠. 영은 갑작스러운 바람에 몸을 움츠렸고, 선배는 그녀의 등을 잡아주었어요. 그러더니 자신의 재킷을 건네주었죠. 송영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재킷을 어깨에 걸치며, 문득 떠오르던 의심을 떨쳐냈어요. 감정 표현에 당황할 만큼 오랫동안 만나온 사이인데, 그렇지 않나요, 영?
래원은 불규칙하게 심긴 보리수와 소나무 사이를 걷다가, 길모퉁이에서 머뭇거리는 영을 향해 돌아섰어요.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이 그의 반짝이는 눈에 비쳤어요.
"네 아버지 말로는, 네 집안에 일본인이 있었다던데?" 선배가 갑자기 물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영은 듣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는 질문을 부드럽게 던지고, 침착하게 대답했으며, 항상 아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태경과는 달리 절대 말을 끊지 않았죠.
지금은 질문이 교묘하게 들렸고,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떨렸어요. 영이 그것을 알아차렸을까요? 아니요, 저녁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던 그녀는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질문을 앞둔 설렘, 고조되는 긴장감, 그리고 공기 자체가 전율하는 듯 손끝이 찌릿거리는 느낌은 그녀를 대답할 준비가 되게 만들었답니다.
나중에 이 운명적인 날을 회상하며, 영은 선배의 넌지시 하는 말들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이유를 끝내 알 수 없었어요. 그녀의 눈에 그는 극도로 매력적이었죠. 세심한 배려, 듣기 좋은 목소리, 좋은 태도, 그리고 사랑스러운 미소까지.
"아빠가 자네한테 잔소리를 늘어놓으셨군, 안 그래?" 선배는 어깨를 으쓱했고,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약간 위로 솟아올랐어요. 영은 얼굴에 퍼진 당황스러움을 억지로 감추려 애썼죠.
송영은 그를 부모님께 소개했고, 부모님은 래원을 마치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따뜻하고 반갑게 맞이했어요. 모든 것이 행복한 결말로 향하고 있는데, 그녀가 어떻게 그때 재앙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빠는 부산 출신이고, 그의 조상들은 15세기 동래에 살았었어요." 영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선배에게 다가갔고, 그는 키 큰 소나무 그늘에 멈춰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영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죠. "아빠는 오래된 가문인데, 그의 가계에는 일본인이 있었다고 해요. 임진왜란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 가족은요?" 래원이 물었고, 그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낮게 깔렸어요. 영은 그의 손가락 온기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의 팔을 가로지르는 작은 거친 흉터가 떨리는 피부를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것을 느꼈어요. 그녀는 선배를 따라 걸었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죠.
"엄마도요…" 영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고, 래원은 그녀를 지탱하며 손가락을 더 꽉 잡았어요. "왜… 왜 묻는 거예요, 선배?"
래원이 영에게로 돌아섰어요.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가계가 중요하니까요." 그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영은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갔고, 빽빽한 소나무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백호(白虎) 자리, 즉 서방 칠 수(西方七宿) 별자리를 보았어요.
"오늘 밤 아름답네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지만, 선배는 갑자기 멈춰 섰어요.
"내 가족도 긴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는 거의 노래하듯이 말하며, 영의 목소리에 담긴 감추지 않은 기대감을 듣지 못한 듯했어요. "아버지는 몰랐고, 어머니는… 뭐랄까." 래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멈춘 뒤에 덧붙였어요. "그녀는 히데요시의 수많은 조선인 첩 중 한 명이었다고 해요."
선배는 전에는 가족을 몰랐다고 말했어요. 이번에 그는 영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신뢰한 나머지, 어린 시절의 아주 작은 기억까지도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걸까요… 이 '승리'에 고무된 영은 자신의 심장이 몇 번인가 건너뛰는 것을 느꼈어요.
"일-일본 장수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공원의 고요함 속에서 쟁쟁하게 울리며 주변 나무들의 울창한 잎사귀 속에 묻혀버렸어요. "16세기에 조선을 침략했던 그 장수 말이에요?"
선배는 전에도 중세 전쟁 시대에 직접 살았던 것처럼 먼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 그의 말은 영에게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이런 강렬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설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죠.
"역사를 아는군요, 후배!" 래원이 감탄하며 말했어요. 그리고 예기치 않게 엄격한 어조로 덧붙였어요. "다이묘는 그들에게 평화적인 문제 해결책을 제안했었죠."
영은 그 순간 얼어붙었고, 잠시 대화에서 벗어났어요. 먼저 부모님에 대한 진실, 그리고 이것… 그는 그녀를 한 번도 '후배'라고 부른 적이 없었어요. 그녀가 그를 선배라고 부를 때마다 웃었고, 그가 자신보다 부산 우주 연구소에서 더 오래 일했으니 그녀가 선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었죠.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오늘 저녁 전까지는요.
"별로… 모르는데요." 영은 더듬거리며 힘겹게 대답했어요. 이제 그가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면, 이 저녁은 그녀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우주에 매력을 느낄 줄 알았는데, 부모님 교육이 이 세계에서도 큰 역할을 하는군요." 선배는 조용히 말했어요. "하지만 당신 아버지가 일본인들이 조선에 고추를 들여왔다고 저를 거의 설득시켰어요."
그는 영을 절벽으로 이끌었고, 그곳에 오르면 부산 전체와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어요. 그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따라 올라오라고 했어요. 송영은 마지막 생각마저 잊었고, 머릿속에는 "드디어!"라는 말만 종처럼 울려 퍼졌어요. 마치 반년이 아니라 평생을 기다린 것처럼요.
"엄마랑 다투지 않은 건 잘했네. 그랬으면 엄마가 자네를 박물관으로 끌고 갔을 텐데… 나한테 도시를 보여주고 싶은 거야?"
래원은 대답이 없었고, 영은 입술을 깨물었어요. 남자친구의 의도를 방해해서는 안 돼요. 지금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선배는 전망대까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고, 영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가파른 돌계단을 어색하게 오르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땀투성이가 된 영 앞에 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녀는 이제 고향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텔레비전 타워의 저녁 조명, 항구의 불빛, 영도 지역 주택의 밝은 노란색 창문들이 반짝였죠.
"이 풍경엔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선배는요? 래원 선배?"
그는 순식간에 변했어요. 아니면 영을 여기까지 이끄는 동안 변했지만,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죠. 이제 그는… 뭔가 달라 보였어요. 진지하고, 그녀가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나와 함께 가요, 송영 씨."
알고 보니 그들의 길은 부산의 전경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영은 선배가 내민 손을 불안하게 잡고, 발치에서 정상까지 소나무 숲의 어둠 속으로 묵묵히 그를 따라갔어요. 래원은 더 이상 영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오만하고 차갑게 앞서 걸어갔고, 오늘 저녁 그녀가 그의 눈에서 본 그 빛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실제였고, 몸에 떨림을 불러일으켰는데, 결코 기분 좋은 떨림이 아니었죠.
"김래원 씨?" 영의 목소리는 첫음절에서 이미 잦아들었고, 선배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숲 속 깊은 곳으로 끌고 가는 동안 그녀는 숨을 헐떡였어요.
"송영 씨, 용띠로 태어났죠?"
그 질문은 이날 저녁을 감싸고 있던 정적을 완전히 찢어놓았고, 그 정적은 풍선처럼 터져 버렸어요.
"네?" 영은 놀라서 내뱉었어요. 잠시 후 머뭇거렸지만, 부적절한 말투에 대한 사과도 생략했어요. "제 말은, 네. 그런데요?"
영은 이 저녁이 매력을 잃어가듯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송영 씨, 제가 뭘 보여줄게요." 선배는 가시 돋친 키 큰 노간주나무 덤불 앞에서 멈춰 섰어요. 영은 멈추려고 했지만 발을 헛디뎠고—젠장, 이 구두!—래원에게 앞으로 넘어졌어요.
갑자기 추워졌어요. 선배가 그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영은 급히 숨을 내쉬며, 폐 속의 공기가 수증기로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덤불 잎들이 고르지 않은 푸른빛 속에서 반짝였어요. 마치 다른 쪽에 길이 있고, 그들 옆을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드물게 지나가는 것처럼요.
"선배?" 영이 속삭였어요. "여기 있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들의 산책이 숲의 그 부분, 즉 사람들이 사라지고,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들이 안갯속의 도시나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같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불합리한 소문이 떠도는 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걱정 말아요, 송영 씨. 제가 옆에 있을게요."
래원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영에게 아무것도 좋은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확신했어요.
"우리는 블랙홀에 대해 이야기했잖아요, 후배." 래원이 말했어요. "그중 하나를 보고 싶어요?"
그는 영의 팔꿈치를 잡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요. 비록 그녀가 이미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다른 손으로는 덤불숲을 밀어내고 있었지만요. 영의 얼굴에 얼음 같은 바람이 들이닥쳤고, 신비로운 빛이 발아래로 쏟아졌지만, 그곳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허공에 안으로 말려드는 공허의 소용돌이였어요. 빽빽이 서 있는 나무줄기들은 번쩍이며 빛났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죠.
영은 눈 깜짝하지 않고 소용돌이를 응시하며 제자리에 굳어 있었어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이 그 중심부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어요.
"송영 씨는, " 선배는 조용히 말을 시작했어요. "블랙홀 저편에서는 온 세상이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죠. 확인해보고 싶지 않아요?"
영은 텅 빈 눈으로 래원을 돌아봤어요.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어요. 그녀는 늘 예의 바르고 침착했던 선배의 갑작스러운 단단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다시 한번 애썼죠. 그의 재킷은 영의 발밑으로 떨어졌어요.
"싫어요." 영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눈물 사이로 쉬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싫어, 놓아줘요, 선배. 놓으라고요!"
"먼저 날 도와줘요, 송영 씨." 김래원은 고집스럽게 말했어요. "영 씨는 나의 마지막 희망이에요."
그러더니 그는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고, 영을 함께 끌고 들어갔어요.
태경과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태양계의 블랙홀은 지구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지식이 영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