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점심시간이었다. 그레이스는 줄리안을 만나기 위해 중학교 서쪽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줄리안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의 단호한 태도와 성숙한 말투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카페테리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학생들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한쪽 구석, 가장 조용한 자리에서 혼자 앉아 있는 줄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트레이 위의 식사를 천천히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모습에 잠시 멈춰 섰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는 줄리안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불렀다. “잘 지내니? 별일은 없고?”
줄리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네, 선생님.” 그는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더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자꾸 시간을 놓쳐요.”
그의 말에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그의 트레이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고등학교 수학책이잖니?” 그녀가 물었다.
줄리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그는 조용히 말했다. “…GED를 보려고요.”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열네 살짜리 소년이 고등학교 과정을 독학하며 GED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절실한 아이에게 어른인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공부는 잘되고 있니?”
복잡한 마음을 다스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종합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공부가 잘 될리가 없지 않은가.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공부가 아니라 공부 할 환경에 대해 궁금한 것이다.
‘그 남자가 괴롭히지는 않니?’
줄리안은 어쩐지 그레이스 선생님의 질문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주인집 아저씨가 또 괴롭히고 있는건 아닌지.. 궁금 하신게다.
그 날 이후..
그러니까 주인집 남자에게 대들고 집을 나와 죽으려고 했던 그 날. 그 이상한 사람들을 만난 그 날.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 집으로 갔던 그날.
그 이상한 날 이후 줄리안은 자신 안에 이상한 변화가 있게되었음을 감지했다.
설명은 못하겠다.
그냥. 자신에게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첫번째로는, 그레이스 선생님과 션 선생님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한다는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알수 있는지 설명은 못하겠다.
그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정말 너무 오랜만에 느껴본 진심이어서.. 줄리안은 염치 없게도 선생님들 집에서 몸의 상처가 없어질때까지 신세를 진것이다.
선생님들의 보살핌으로 몸이 점점 나아가면서 마음의 상처도 조금은 치유가 되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위탁집 남자의 속내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이상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역시나.
위탁가정으로 돌아갔을때 다시 만난 주인집 남자는 한달 전 자신을 위협했던 무서운 아저씨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 남자가 하는 말의 속내가 뻔히 읽혔다.
남자를 다시 만나자 그의 허세와 계산과 거짓말이 보였다.
남자의 헛점이 보이자 그는 줄리안에게 더이상 무서운 어른이 아니었다.
얄팍한 심성의 그저 그런 하(low)남자였을 뿐이다.
동시에 한국에서 온 삼촌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라진 일련의 모든 일들이 더이상 얽힌 실타래 같은 복잡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 사기를 당한거였어.’
‘왜 나한테 그랬지?’ 라는 질문은 지금 필요한 질문이 아니었다.
나중에 다 밝힐 것이다.
줄리안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내면의 변화에 아직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열네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머릿속에서 갑자기 정리가 되더니 담담해 졌다. 어른이 된것 같은 느낌이다. 분명 하다.
어른이 된것같다.
공부만 해도 그렇다.
사실, 이 전에도 중학교 학생으로 배워야 할 공부가 어려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 입으로 말 하긴 좀 그렇지만 ..’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도 배워본적 없는 고등 수학이나 물리를 공부해서 빠른 시간 안에 시험을 보려고 하니 처음에는 막막했었다.
‘.. 이건 내가 배운적이 없어서 모르는것 뿐이지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해 낼수 있는 일이야.’
자신의 학습 능력에 대해서도 객관화를 할 수 있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어리버리하게 당하며 밤마다 울기만 했었는데..
‘분명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어. 그런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도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능력치가 어른 수준으로 높아진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이 능력치가 얼마나 높아진건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시험을 보려면 도움이 필요한데..’
줄리안은 그레이스 선생님의 질문에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생님, 사실은 공부가 잘 안 돼요.”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부할 자료가 별로 없어서 능률이 안 올라요.”
그레이스는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에 가슴이 아파왔다.
“저…”
줄리안이 잠시 말을 멈췄다.
“지난번에 말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응, 말해봐.”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줄리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시험 준비하려면 과외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험 문제지들과 교재 살 돈도 없고… 과외비도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지만, 그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니, 간절함을 연기했다. 그레이스 선생님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선생님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야 했다.
나쁜 마음이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은가? 선생님은 내가 잘 자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고, 지금의 나는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데.
“선생님, 저는 최대한 빨리 시험을 통과해서 어떻게든 돈을 벌거예요.”
줄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 저 좀 도와주실수 있을까요? 꼭 갚을게요, 선생님.”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 어린 소년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녀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오늘 그녀에게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션과 내가 지난 며칠 동안 네 진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
줄리안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이라면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주시려고 했을테지만 줄리안은 그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감사는 무슨.”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 학교에서 하는 일이 대학 상담인 거 알잖니? 진로에 대해서는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단다.”
줄리안은 잠시 그녀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대학까지 내가 도와줄게.”
그 순간 줄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학? 양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대학 진학과 농장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대학이라니… 줄리안은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학… 이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이스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래, 대학.” 그녀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쓸쓸함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선생님, 저 대학 못 가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학비 때문이니?”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 빨리 일을 해야 해서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빨리 마치고 군대를 갈 거예요.”
그의 말에 그레이스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열네 살 소년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줄리안은 정말 벼랑 끝에 서 있구나.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
그레이스는 놀란 듯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 군대요.”
그레이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군대가 너의 계획이었구나. 그녀는 줄리안이 며칠 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이미 이런 결정을 내렸던 걸까?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군대를 가기로 결정했구나.’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줄리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대는 네 생각이니? 원래 군인이 되려고 했었어?”
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원래 꿈은 농장 경영이었어요.”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농장 경영?”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잘하는 걸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일을 하고 싶으면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토마스 농장이 정말 좋았어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고, 그레이스는 그가 말을 이어가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도 농장 경영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려고 했었죠.”
줄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레이스는 줄리안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길에는 위로와 격려가 담겨 있었다.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줄리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무슨..?
궁금했지만, 그레이스의 따뜻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단순히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던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이 이제는 가족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진로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져주고, 전화기도 두 말 없이 사주었던 선생님들이 너무 고마웠다. 둘은 조용한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레이스는 줄리안을 앉히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줄리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네 성적을 자랑스러워하셨다고 했니?”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슬픔과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안 그래도 네 성적을 열람해봤어.”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부를 정말 잘했더라구나.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만 하셨더라고.”
줄리안은 살짝 미소 지었지만, 아버지를 떠올리자 이내 다시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레이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하지만 GED 시험은 중학교 갓 마친 학생이 쉽게 패스할 수 있는 만만한 시험이 아니야.”
줄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험을 보려면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단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 노력을 해서 결국 GED 시험을 보겠다면 너를 도와주겠지만, 그 전에 선생님은 너에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줄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방법… 이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응.” 그녀가 말했다.
“네 성적을 열람해보고 교장 선생님과 면담도 하고 왔어.”
줄리안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잠시 멈추더니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너… 아이큐가 158이더라.”
순간 줄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아이큐 테스트 점수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양어머니가 살아계실때 디아나 이모님에게 늘 자랑처럼 줄리안의 아이큐 점수를 말 하곤 하셨었다.
“줄리안. 너 정말 가능성 있는 아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줄리안,”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레이스는 줄리안과 함께 조용한 빈 교실을 찾아서 앉았다.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지만 동시에 결연해 보였다. 줄리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감도 느껴졌다.
“줄리안,”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너에 대해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어.”
줄리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교장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그레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너 같은 학생을 놓칠 수 없다고. 네 성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시고는, 네가 하버드 같은 대학에도 갈 수 있을 인재라고 하셨단다.”
줄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버드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너에게 고등학교 학비를 전액 면제해 주기로 하셨어.”
줄리안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정말이야.” 그레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며칠 전에 학교로써는 큰 일이 하나 있었다는구나. 갑자기 학교에 전에 없던 큰 후원금이 들어왔대. 뉴욕에 본사를 둔 어느 회사에서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는 부모가 없고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을 위해 장학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대. 물론 그 회사는 거액의 기금을 기부했고.”
줄리안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그 장학금으로,”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네 고등학교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대.” 그녀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내가 이 소식을 듣고 점심시간 되자마자 달려온 이유가 바로 이거야.”
줄리안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가슴은 쿵쿵 뛰었고, 손은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4년간 전액 학비 면제에 생활비까지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레이스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정말 나에게 기적이란 게 일어난 걸까?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도와주시는 걸까?’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기회가 너무 꿈같아서 현실인지 믿기 어려웠다.
“줄리안,” 그레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이 정도 도움이면 해볼 만하지 않겠니?”
줄리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꿈같아서, 혹시라도 이 모든 게 날아가 버릴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그럼… 생활비 후원금으로 교복과 현장학습 비용도 낼 수 있을까요?”
Lancaster Academy는 학생들의 의무 현장 학습 비용을 전액 지원한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에게 의무 현장 학습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학교에서 지원하는 비용은 필수적인 프로그램에 한정된다. 반면, 자율 현장 학습이나 선택적인 프로그램들은 학생 개인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가끔 수학여행 개념으로 3~5일간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자율 현장 학습으로 분류되며, 모든 학생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경험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율 프로그램들은 학비 외에도 추가적인 비용 부담을 요구한다. 필드 트립 비용, 교복비, 현장학습비, 그리고 학교가 주최하는 기부금 행사 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정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립학교는 중산층 가정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줄리안은 이 아카데미에 7년 동안 다니며 부모님이 학교에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양부모는 줄리안이 혹시라도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백인 가정 비율이 95%를 넘는 동네에서, 영어를 잘하지 못하던 어린 줄리안이 언어적인 이유로 기가 죽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줄리안의 어머니는 학부모회 회장을 맡으며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줄리안이 학교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한, 양부모는 Lower School 빌딩 증축 당시 거액을 기부해 건물 1층 로비 디자인 비용 전액을 책임졌다. 지금도 그 로비 입구에는 양부모의 성을 따서 명명된 **[Thomas Hall]**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줄리안은 매번 로비를 지날 때마다 그 이름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 이름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헌신을 쏟았는지를 상기시키는 상징이었다. 그랬는데.. 이제 자신은 학비와 현장학습비마저 걱정을 해야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레이스는 현장 학습 비용에 대해 걱정을 하는 줄리안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장학금으로 네 학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 지원을 설계할 수 있을꺼야.”
줄리안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안도의 기색이 스쳤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의 반응을 보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걱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며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션과 내가 네 곁에서 도울게. GED 시험 대신, 이 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가자. 네 성적이라면 월반도 가능할 거야. 그렇게 하면 1년 일찍 졸업할 수도 있어.”
줄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이 얽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말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레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줄리안.”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
줄리안은 그레이스 선생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학교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캠퍼스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죽지 마. 조금만 더 버텨봐.”
그레이스 선생님의 집 작은 방에서 줄리안은 암막 커튼을 치고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은 채 치열하게 고민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목소리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속삭였다.
결국 줄리안은 결심했다. 죽을 힘을 다해 버텨보기로. 그는 스스로에게 기한을 정했다. 스무 살까지, 앞으로 6년 동안만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노력해보다가 스무 살이 되어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줄리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캠퍼스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잔디와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런데… 정말 하늘이 나를 알아준 걸까?’
그는 오늘 들었던 소식을 떠올렸다. 예상치 못했던 고등학교 4년간의 장학금과 생활 보조비 지원 소식은 그의 마음속 어두운 먹구름 사이로 작은 빛줄기처럼 비쳐들었다.
줄리안은 믿기 어려웠다. ‘정말 나에게도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나를 도와주시는 걸까?’
줄리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학교를 마칠 수 있다고?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정말로 세상이 자신에게 ‘죽지말고 버텨봐’ 라고 말 하는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