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님, 너...

by 필리소

[Lancaster Academy]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교장의 집무실은 언제나처럼 서류 더미와 책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묘하게 정돈된 느낌을 주었다. 그의 꼼꼼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들어오세요."

교장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들떠 있음이 느껴졌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젊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교장 선생님, 임시 이사회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사님들께서 회의실에 속속 도착하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교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했지만, 속으로는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늘 이사회는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었다.


오늘 임시 이사회의 주요 안건은 바로 2주 전에 갑자기 학교에 들어온 거액의 기부금 사용처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액수는 실로 엄청났다.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 ‘Clairvoyant’ 에서 연락이와 학교에 거액의 기부를 제안해 왔을 때, 교장은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스팸이나 사기 전화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Clairvoyant는 상장을 하지 않은 private 기업이지만 전세계에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독특한 기업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기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회사가 가진 어마어마한 자금력 때문인지 IPO에는 관심도 없는,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기업이다.


언론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룹이, 이 시골에 있는 작은 학교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연락을 해왔겠는가.. 싶어서 처음에는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제안은 진심이었다.


즉각 입금 가능한 기부금 300만 달러 외에도, 매년 100만 달러의 정기 기부금을 약속했다. Lancaster Academy 개교 이래 단일 기부금으로는 가장 많은 액수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이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이런 행운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임기 기간에는 쉽게 오지 않을 행운이다.


학교에 부임해 온 지 2년 만에 이런 엄청난 기부금을 유치하게 되었으니, 내년에 있을 4년차 재신임 투표는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했기에 교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을 미덥지 않아 했던 몇몇의 이사진들에게 이번 기부금으로 그의 경영 능력과 리더십의 탁월함을 마음껏 어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장은 서둘러 임시 이사회를 소집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이사진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어필할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는 학교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자신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다질 수 있을 것이었다. 교장은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힘찼다.


—회의실


그런데 이사들이 이상한 말을 한다.


“하하하… 교장 선생님, 안그래도 기부금에 관한 희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 역시 신임 교장 선생님의 능력이 돋보이는군요. 젊은 분으로 모신 보람이 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그 거액이면 체육관 보수 공사에 큰 도움이 될 테지요? 우리 학생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겠어요."


‘체육관 보수 공사?’

교장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사실 그 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기부금은 기부자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습니다. 특정 상황이 있는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해 달라는 부탁이었죠. 체육관 공사 비용은 지난번 회의때 결정한 대로 다른 자금으로 충당할 예정입니다."


이사 중 한 명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장 선생님?"


교장은 깊은 숨을 들이쉬고 설명을 이어갔다.

"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그는 뉴욕에 본사를 둔 기업에서 이 기부금의 용도를 특정했다는 사실을 이사회에 전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와 생활 보조비, 그리고 현장학습 비용으로 사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공사 보조비나 건물 증축 비용은 지난번 저희가 의논했던 대로 별도로 책정해 놓은 기금에서 충당이 가능합니다. 그 계획은 변함없이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사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한 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 기금을 다 모으려면 내후년은 되어야 할 텐데요!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있는데 왜 공사를 미루자는 겁니까?"


다른 이사도 가세했다.

"맞습니다. 체육관 보수 공사도 결국 학생들을 위한 일 아닙니까? 즉시 시행할 수 있는 자금이 있는데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또 다른 이사가 말을 이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학교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생활비까지 부담하게 되었습니까? 현장 학습 프로그램만 해도 그렇습니다. 의무 현장 학습 비용은 이미 학교에서 전액 부담하고 있었잖아요. 이제 그 학생들의 비의무 현장 학습비용까지 학교에서 부담하기 시작한다면, 어느 학부모가 흔쾌히 비용을 지불하겠습니까? 제가 학부모라도 불만이 생길 것 같아요. 이는 형평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이사들의 의견은 끓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학교는 사립학교 아닙니까. 애초에 재학생들 중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얼마나 된다고 이 큰 펀드를 묵혀두자는 겁니까? 기부자께서 하신 말씀은 의례 통상적인 당부라고 들어야 합니다. 융통성 있게요!”


회의실은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교장은 이사들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교장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부금 액수의 단위가 크다보니 당면해 있는 체육관 건축 문제를 이 돈으로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번 회의때는 이사들 자신의 도네이션으로 기금 30%를 메꾸자고 해놓고는…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오니 이제와서는 자신들의 돈은 싹 빼고 이 돈으로 체육관을 짓자고?. 이기적인 인사들 같으니. 끙.. 이일을 어쩌지?.’

이사들은 기필코 이 기금으로 하루 빨리 체육관 증축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사회의 분위기는 점점 더 날카로와지고 있었다. 교장은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은 이미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교장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 기부금은 단순한 자금이 아닙니다. 기부자께서 분명히 특정 조항을 명시하셨습니다. 이 돈은 학비 보조금과 학생 지원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다른 용도로 섞는 것은 계약 위반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지만, 이사들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특히 몇몇 이사들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교장은 자신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이일을 어쩌나..’


“으흠.. 크흠..콜록”

그때였다. 회의실 한쪽에서 묵직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이사회 회장이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지긋한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고 권위적이었다.


"여러분," 회장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무게감이 있었다.

"모두들 진정들 하세요. 우리 젊은 새 교장 선생님께서 학교를 위해 이렇게 큰 기부금을 끌어 오셨습니다. 축하를 해드리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의견이 분분해서야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방 안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모두가 회장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각 이사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저에게 절충안이 하나 있습니다만."

회장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던졌다.

'절충안'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불만과 반발로 가득했던 이사들의 표정에도 약간의 호기심과 기대감이 스며들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회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손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기부자의 요청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교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학교 운영에 있어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안 드릴 내용은, 기부자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입니다."


그의 말은 마치 오래된 연극의 클라이맥스처럼 천천히, 그러나 강렬하게 이어졌다. 이사들은 물론 교장까지도 그의 입술에서 나올 다음 문장을 기다리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실은 이제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이 회장에게 고정되었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절충안이라..."

교장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체육관 공사가 시급한 건 모두들 알고 있는 사안 이지요?" 이사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300만 달러라는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 교장 선생님, 기부자가 사용 용도에 대해 특정했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혹시 기부자님께서 사용 기간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교장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사용 기간에 대한 제한은 따로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사회장님, 이건...”


이사회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교장의 말을 끓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 교장선생님의 생각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간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면 부득이하게 그 돈을 지금 바로 사용 하는것보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선 그 돈을 학교 투자 펀드에 잠시…넣어 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이 펀드는 원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자를 발생시킬 테니까요. 그렇게 2년 동안 이자를 쌓아둔 뒤, 그 수익으로 학생 후원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체육관 공사도 같은 해에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신, 융자를 받으려고 했던 금액은 펀드에서 ‘일시적으로’ 충당하여 장기적인 은행 이자로 나갈 지출을 줄이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융자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지 않을테니 학교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단순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으며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한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이사회장님은 문제 해결에 탁월하십니다."

"제 생각에도 아주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봅니다. 투표로 결정하지요

또 다른 이사가 동의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좋은 투표안 입니다.”

다른 이사 역시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표가 시작 되었다.

교장은 자리 앉에서 이사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결코 물러설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교장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방법이 맞는건가?’


그리고 투표 결과는…

만장일치.


결국, 이사회장이 내어 놓은 절충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교장은 이사회를 진정 시킬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결국 이사회의 절충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는 회의실을 나서며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부자가 요구했던 조건을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2년간 기금을 투자해 불린 뒤 두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실행하겠다는 계획일 뿐이었다. 이는 기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학교의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묘수라고 그는 믿었다.

무엇보다..

‘재신임 투표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어.’


물론, 그레이스 선생이 언급했던 줄리안이라는 학생의 딱한 사정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학교는 봉사 단체가 아니야. 더구나 사립학교 아닌가. 모든 어려운 학생들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는 학교 운영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무엇보다 이번 결정으로 이사회가 요구했던 체육관 보수 공사 비용을 당장 기부금에서 충당하라는 압박을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었던 점은 큰 성과였다.


‘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거야.’

교장은 속으로 자신을 칭찬하며 회의실 복도를 걸었다. 그는 이번 결정을 통해 학교 재정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기부자의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전화기를 들어 그레이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레이스 선생님? 안녕하세요, 교장 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줄리안 학생에 관한 문제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좀 다른 상황이 생겨서 말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레이스 선생의 목소리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곧 진지한 톤으로 바뀌었다.

—아, 네, 교장 선생님. 줄리안 학생 문제라면... 이미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이 결정 된 내용이 아니었던가요?


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줄리안의 상황은 분명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학교의 이사회와 척을 지면서까지 그를 지원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 아닌가.. 그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줄리안 학생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더 고민해 본 결과, 우선 현재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지원 방안을 최대한 활용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기부금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때 더 폭넓은 지원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2년 후, 요? 그럼... 지금 당장은 특별한 지원이 어렵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레이스 선생님께서 이렇게 좋은 학생을 추천해 주셨는데..죄송합니다. 지금 당장은 예산상의 한계가 있습니다." 교장이 말을 돌렸다.

"하지만 줄리안 학생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 선에서도 적극적으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확답을 드릴수가 없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정말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줄리안 학생의 학비라도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그레이스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학생을 향한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교장은 잠시 침묵했다.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전화기를 다른쪽으로 바꿔 들면서 말을 꺼냈다.

"이거 실망시켜드려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레이스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학생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줄리안 학생 후원에 관한 얘기는 없던 것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은 이사회에서…"


그레이스는 깜짝 놀랐다.

—네? 이사회에서 줄리안 후원에 반대를 했다고요?

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예, 사실 이사회를 마치고 식사 중에 줄리안 학생의 학비를 학교에서 지원하겠다는 이야기를 이사회장에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회장께서 극구 반대하시더군요."


—왜요?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레이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교장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줄리안 학생이 위탁 가정 문제로 법정까지 갔던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일이 이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사들 중 일부는 줄리안 학생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판단하고, 그것이 학교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레이스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 그건 많은 오해가 있었던 문제입니다! 그리고 줄리안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그런 이유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학교가 외면해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필요하면 제가 자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가 다시 강하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 학생 한 명 후원하는 일에 이사회의 동의가 꼭 필요한 일인가요? 원래부터 학교에는 후원금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교장 선생님의 결정만으로도 충분히 줄리안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교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것 참... 곤란하네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그레이스 선생님. 학교에는 필요 기반 장학금(need-based scholarship) 제도가 있습니다. 사실 제 재량으로 처리했으면 아무도 모르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요."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가 괜히 입이 방정이었습니다. 원래 안건이 아니었던 줄리안 이야기를 왜 굳이 이사회 자리에서 꺼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한 얘기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전화기 너머로 굽히지 않는 그레이스의 격앙된 목소리에 교장은 자신도 어쩔수 없었다는 입장을 계속 피력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사회에서 줄리안 학생에 대한 후원을 반대한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독단적으로 학비를 지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아쉬움과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그레이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교장 선생님,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줄리안 같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요?"


교장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깐깐한 이사회원들과의 긴 회의에 지쳐있던 교장은 점점 그레이스의 고집스러움에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교장에게 다시 간곡히 요청했지만, 교장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줄리안의 부모님이 생전에 이 학교에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내놓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뻔히 아는 이사회가 줄리안을 외면하는 모습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겠다는 건가?’

그녀는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생각했다. 줄리안의 부모님이 학교의 도서관 건립 기금을 전액 지원했던 일, 그리고 매년 학교 운영비로 거액을 기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학교라는 곳이 이렇게 냉정한 곳이었나? 기부금이 필요할 때는 환영하다가, 정작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에는 등을 돌려버리는 건가?"

그레이스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을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이미 교장은 이사회의 반대를 이유로 줄리안을 도울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상태였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줄리안의 상황을 생각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는 단순히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이 아니었다. 뛰어난 학업 성적과 재능을 가진 아이였고, 그 가능성은 누구보다도 밝았다. 하지만 학교와 이사회의 냉담한 태도는 그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교장과의 전화를 끓고 복도를 걸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줄리안을 포기할 수는 없어. 학교가 돕지 않는다면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불타오르는 정의감과 책임감이 있었다. 그녀는 줄리안의 부모님이 남긴 유산과 그들이 학교에 기여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줄리안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교장실로 찾아가 봐야겠다.‘


그러나 …

“줄리안..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그레이스는 이사회와 대립하기 싫어하는 교장의 마음을 돌이킬수가 없었다.


줄리안은 그레이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이 다시 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그레이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렇군요, 선생님."

줄리안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학금 얘기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선생님. 원래 GED 시험 보려고 계획했었잖아요. 저, 죽도록 열심히 해서 16살에는 꼭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을 통과할게요."


줄리안은 억지로 밝게 말을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체념과 슬픔은 숨길 수 없었다. 줄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가, 다시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교장 선생님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전해주세요. 어차피 저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잖아요. 4년이나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어요. 사실 장학금 얘기 들었을 때 정말 마음이 들떴었는데... 그런데 진짜 괜찮아요. 원래 계획대로 시험을 볼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레이스는 아무 말 없이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들렸지만, 그녀는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줄리안의 눈빛은 어른스럽게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괜찮을 리가 있겠니..’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른들이 미안하다, 줄리안.’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얼굴에서 평범한 열네 살 아이의 순수함 대신, 너무 일찍 세상의 냉혹함을 배운 아이의 상처를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또래 아이들처럼 웃고 떠드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말투와 태도는 마치 자신이 이미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보호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숨어 있었다.


줄리안의 결심은 단단해 보였지만, 그레이스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상처와 외로움이 더 커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줄리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건 정말 대단해. 하지만 기억해줘,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내가 항상 네 편이라는 걸 잊지 마."


줄리안은 잠시 고개를 숙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레이스 선생님의 진심이 온 몸으로 전달이 된다. 자신에게 정말로 특별한 감각이 생긴 것이다.

그레이스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 동안 눈 앞에 있지도 않은 교장의 속내도 어떤건지 또한 빤히 읽혔다.

‘부임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입지가 없는 교장. 부모님이 살아계셨을때 아버지도 이사회 임원 이셨지.’

이사회원들은 이 지역의 유지들이 대부분이다. 몇몇은 Lancaster Academy 의 졸업생이기도 하고 3대째 이 학교 졸업생이 있는 집안도 꽤 된다. 그만큼 학교안에서 행사할수 있는 파워가 크다.


‘드센 이사들의 눈에 나지 않으려고 용을 썼겠구나.’


교육자의 윤리까지 나몰라라 하는 교장을 상대로 자신을 위해 싸워준 그레이스와 션 선생님의 마음에 울컥하는 감정이 몰아쳤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줄리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레이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우리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줄리안을 돕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레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서 맴돌던 마지막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줄리안. 온라인 고등학교를 가는 거야. 네가 말한 대로 죽도록 공부해서 빨리 졸업 크레딧을 모두 이수하는 거지. 그리고 16살에 졸업하자."


줄리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온라인... 고등학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 요즘엔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면서 정식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졌어. 네가 원한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어. 네가 GED 시험을 준비하는 대신, 정식 고등학교 과정을 빠르게 이수하는 방법이야."


줄리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온라인 고등학교라는 말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제안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제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줄리안.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의지와 노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그리고 션과 내가 너를 도와줄 거야. 네가 필요한 정보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할게."


줄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른으로 쑥 자란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그레이스 선생님의 말에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아무리 자신이 요즘 이상하게 학습 능력이 높아졌다고 해도 배운적도 없는 지식이 그냥 생기는건 아니었다. 그냥 배움이 빨라진것이다. 어쨌든 배우면 적용이 무섭게 빨라졌다. 그러니 일단 배워야 하지 않겠나. 모르는 영역을 혼자 공부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선생님. 한번 해볼게요."

그레이스는 그의 결단에 안도하며 말했다.

"좋아, 줄리안. 우리가 함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하자."


그날 이후, 션과 그레이스는 줄리안을 위해 온라인 고등학교 프로그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립 온라인 학교부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사립 온라인 학교까지 다양한 옵션을 검토했다. 특히 학생들이 자신의 속도에 맞춰 학습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비용 부담이 적은 옵션들을 중심으로 살폈다.


줄리안도 새로운 목표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6살에 졸업하고 나면, 내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거야. 빨리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가자."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교과서를 펼쳤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줄리안에게 만만하지 않았다.

“줄리안!! 당장 나와서 짐 챙겨서 방을 옮겨라! 앞으로는 차고 윗방에서 지내야 한다!”


줄리안이 내세운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건방진 협상안을 받아들인 주인은 그를 집 밖 차고 건물 위에 있는 작은 창고방으로 내쫓았다. 창고방은 오래된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고, 벽에는 습기로 인해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거미줄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차고 위 방 안 거의 비어 있었고, 낡은 매트리스 하나와 작은 책상만이 놓여 있었다. 줄리안은 방을 둘러보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주인은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로 줄리안에게 다가와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냄새는 줄리안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주인은 손가락으로 줄리안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니 요구대로 널 건드리지 않으마" 그는 낮고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너도 내 눈에 띄지 말거라. 밥도 알아서 해먹으렴. 밥 먹는 시간에도 내 눈에 띄지 말거라. 나 없는 시간에 돌아다녀. 우리가 자주 마주치지 않아야 문제가 없지 않겠니?"


줄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올라왔지만 줄리안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주인은 그의 반응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다 너 하기 나름이란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 손가락으로 줄리안의 가슴을 찌르고는 뒤돌아섰다.

"조용히 살아. 알겠어?"

줄리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괜찮아, 내가 더 강해질 거야.’


이 전보다 훌쩍 성장을 했다지만 줄리안의 의 마음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감이 점점 쌓여만 갔다.

그날 밤, 줄리안은 창고방의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제대로된 이불도 없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주인의 말과 행동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앞으로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줄리안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이건 그냥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줄리안은 이를 악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나 자신을 증명할 거야. 조금만 더 견디자.’

그의 눈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듯한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처음, 차고 위층의 작은 창고방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줄리안은 자신이 주인 남자에게 건넸던 치기 어린 '협상'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립된 공간으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방은 물과 전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히터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랭캐스터의 겨울은 혹독했다. 창고방은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있을 뿐, 제대로 된 단열이 되어 있지 않아 마치 냉장고와 다를 바 없었다. 줄리안은 밤마다 작은 전기담요 하나에 의지해 몸을 웅크린 채 겨울을 버텨야 했다.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 그는 가끔씩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말을 아꼈더라면 지금 이런 비참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 환경에도 적응해갔다. 추위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줄리안 에게는 그것보다 더 무거운 현실들을 직면해야 했다. 의지할 곳 없이 혼자라는 현실을 깨닫을때마다 긍정의 마인드로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도 이게 최악은 아니야. 적어도 혼자 있을 수는 있잖아.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아.’

입양 오기 전 한국 보육원에서 당한 왕따의 끔찍한 기억은 아직도 종종 줄리안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비록 차고 건물 윗방의 겨울이 혹독하긴 하지만 마음이 괴롭지 않았기 때문에 참을수 있다. 줄리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오자, 상황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힘들게 했다. 에어컨이 없는 차고 위층의 창고방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햇빛이 하루 종일 지붕 위로 내리쬐면 방 안의 온도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치솟았다. 낮에는 방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고문처럼 느껴졌고, 밤에도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선풍기 하나 없이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잠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줄리안은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미 삶의 여러 고난을 겪으며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학기가 끝나고, 어느새 중학교 졸업식 날이 찾아왔다. 졸업식에서 줄리안은 다른 학생들처럼 가족의 축하나 따뜻한 응원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홀로 졸업장을 손에 쥐며 조용히 결심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야.’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줄리안은 여름방학 동안 곧바로 온라인 고등학교 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GED 시험 대신 정식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온라인 프로그램에 등록하기로 마음먹었다.


"16살에는 꼭 졸업할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줄리안은 생각 할수록 그레이스 선생님이 제안한 온라인 고등학교가 자신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점, 스스로 학습 시간을 조율할 수 있는 점 모두 그에게는 큰 장점이었다.


줄리안의 여름방학은 다른 아이들의 방학과는 많이 달랐다. 가족들과 해외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휴식을 취하는 대신, 줄리안은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에 몰두했다. 창고방의 더위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셔츠와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조차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독기서린 의지가 아니다. 공부가.. 정말 할만했다.

'공부가.. 이렇게 쉬운거였어?'

아직 가을 학기 온라인 고등학교 정규 수업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예습을 하겠다고 그레이스 선생님에게 받은 책으로 혼자 독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읽기만 해도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해가 되었다.

"정말 이게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네..."

삶은 여전히 험난했지만 정작 지금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공부는 전혀 어렵지가 않았다.

"이렇게 나 혼자서도 빨리 늘을수 있다면, Lancaster Academy에 다니지 않게 된게 오히려 잘 된거 아니야? 오호.."

뭐가뭔지,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지만.

..개꿀이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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