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을 빨리 떠나자.

by 필리소

줄리안은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이건, 뭔가.. 정말로 좀 이상한걸?’

줄리안은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며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변화를 새삼 깨닫고 있었다.

‘왜 집중하면 할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이해력이 점점 더 높아지는걸까?’


집중해서 한번 읽으면 외워진다. 마치 머릿속에 새겨진 것처럼 잊어버려지지 않는다. 이전에도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었다. 수학 문제 풀이는 물론이고 외우는것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예전에 하던 공부와는 차원이 달라. Geez… 어제 처음 개념을 배웠는데 적용 문제가 이렇게 빨리 풀린다고?”


문제를 푸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개념도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공부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문제를 보면 답을 유추해 내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이건 어쩐지... 내가 나 같지가 않아.'


줄리안은 펜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놀라운 변화가 낯설고도 신기했다. 그는 자신이 무섭도록 빨라진 문제 풀이 속도와 비판적 사고 능력에 어색함을 느꼈다. 마치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중학교때까지 Lancaster Academy에서 수업을 들을 때, 그는 항상 최우수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자신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었다.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는 정도. 노력 이상의 점수를 받았던 적은 없었던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온라인 고등학교 과정 준비를 시작한 이후, 줄리안은 그 어느때보다 공부에 매진을 했다. 2년 안에 반드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서 밤낮 없이 공부만 하는 지금. 그는 마치 새로운 능력을 얻은 것처럼 느껴졌다. 집중력이 극대화되고, 학습의 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런 비현실적인 능력이 어쩌다 생긴거지?’


혹시 환경의 변화 때문일까? 차고 위층의 작은 창고방에서 홀로 공부하는 시간이 그를 더 독립적이고 집중력 강한 사람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이 그의 정신력을 단련시킨 결과일지도 몰랐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침 10시만 되면 차고 윗방은 후끈거리게 더워졌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몇 분 동안 간단한 스트레칭과 가벼운 유산소 운동을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공부에 대한 의욕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과학자가, 운동은 뇌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키고 신경세포를 활성화하여 학습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 했었다고 하던데… 줄리안은 매일 하는 운동이 자신도 모르게 학습에 긍정적인 효과를 누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단순히 환경이나 습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줄리안은 16살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목표가 분명해지자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그곳으로 집중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돕는다고만 생각했다. 그 비오는 날 이후에 생긴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 도통 알 수조차 없는 줄리안 이었다.


줄리안은 다시 펜을 들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답을 찾아냈다.


'그래, 왜 내가 갑자기 천재가 된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지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죽도록 해보자.’ 줄리안은 오랜만에 느끼는 만족감에 희망과 자신감이 차올랐다.


줄리안은 창고방의 작은 책상 위에서 공부를 마친 뒤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 아래에서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할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과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쾅쾅—

쾅쾅쾅—


지난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겨우 잠들었던 줄리안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끄응… 누구세요?"


문을 열자마자 션이 커다란 상자들을 밀며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특유의 밝은 표정은 여전했다.


"줄리안, 최신형으로 사왔다. 이걸로 공부해서 네 소원대로 빨리 고등학교를 마치렴." 션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줄리안은 눈을 비비며 상자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무, 무슨.. 뭐예요? 그런데 이 큰 상자는 뭐예요?"

"아, 이건 랩탑이고 이 상자에 있는건 모니터야." 션이 웃으며 대답했다.

“모니터는 그레이스가 우겨서 산 거야. 랩탑 모니터만으로는 공부하기 불편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모니터를 두 개 연결할 수 있게 설치해 주러 왔다.”


션은 방 안을 둘러보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니, 아침부터 방이 왜 이렇게 더워? 에어컨 좀 켜라. 에어컨 어느쪽에 있니?"


줄리안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어컨이요? 아, 좀 덥죠? 창문이 커서 열어 놓으면 바람이 잘 들어와요. 지금은 좀 더운데 계속 있다 보면 별로 더운지도 모르실 거예요. 더운데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션은 줄리안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눈빛에는 걱정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는 방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더니 줄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더운 방에, 에어컨이... 없는 거니?"

"네, 뭐... 괜찮아요. 익숙해졌어요."


션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이 더운 방에서 어떻게 여름을 지낼지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선풍기도 없는거야?”


아무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줄리안을 보던 션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히터는? 설마 히터도 없이 겨울에 혼자 있었던 거니, 줄리안?"


줄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 한겨울에 히터도 없이 여기서 지냈던 거야? 줄리안, 왜 일찍 말을 하지 않았어!"


션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줄리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았어요... 전기담요가 있었으니까요..."


션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난 듯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전기담요 하나로 겨울을 버텼다고? 줄리안, 이런 건 네가 참아야 할 일이 아니야! 왜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냐고!"


줄리안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게 말했다.

"말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요... 그냥 제가 견디면 되는 일이니까..."


션은 줄리안을 방치한 주인 남자의 행동을 듣고 폭발 직전이었다.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겠다. 이건 아동 학대야! 히터도 에어컨도 없는 창고에 애를 가둬놓다니, 이 나쁜자식, 제정신이야?!"


하지만 션의 격앙된 반응에도 줄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에이.. 선생님도, 참. 가두긴 누가 가뒀다고 그러세요. 기억 안나세요? 이 집에는 제가 제발로 왔잖아요. 그리고 또 신고는 무슨.. 오히려 잘됐어요, 선생님. 주인 아저씨가 저를 너무 싫어해서 본채에서 못살게 한 덕분에 저만의 아지트가 생긴 거잖아요?"


줄리안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전기는 들어오니까 밤에 공부하는 데 문제없고, 인터넷도 빵빵 터져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그 꼰대 얼굴 안 봐도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뭐라고?

션은 줄리안의 반응에 놀랐다. 전부터도 느껴왔지만 줄리안의 태도에서는 중학생에게 느낄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줄리안에게서 여유로움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이 아이를 단단하게 만든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


아, 모르겠다. 문제는 줄리안이 이런 환경에 놓여져 있다는거다.

“줄리안. 주인 남자와 마주치지 않는게 지금 중요해? 넌 지금껏 학대받고 있던 거라고!" 션이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격앙된 감정 대신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줄리안은 손을 휘저으며 션의 말을 잘랐다.

"에이, 선생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 이정도로는 끄떡없어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꼰대가 저한테 신경 끄는 게 저한테는 훨씬 이득이에요. 아예 얼굴 마주칠 일이 없다니깐요? 이제 제 공부 계획에 딴지 걸 사람도 없어요."


션은 줄리안의 말을 들으며 그의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느꼈다. 예전의 줄리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위축되거나 슬퍼했을 텐데, 지금의 그는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션은 이런 변화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걱정해야 할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일을 문제삼지는 않으마.”

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 힘들면 언제든지 그레이스와 나에게 말해야 해. 넌 혼자가 아니니까."


줄리안은 씩 웃으며 션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이정도면 잘 헤쳐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만약 정말로 힘들면... 그때는 선생님들을 괴롭혀 드릴게요!"

줄리안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각오하세요!"

션은 줄리안의 능글맞은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그는 줄리안의 강인함과 적응력에 감탄했다.


'이 녀석, 나를 아주 갖고 놀아? 흠.. 잠깐, 요즘들어 키가 좀 컸나? 나와 얼추 비슷한것도 같고.. 속도 많이 단단해진듯 하구나.’


하지만 션은 여전히 줄리안이 걱정되었다. 그는 줄리안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여전히 어린 아이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다."

션은 줄리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연락해야 해. 알겠지?"


줄리안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저는 기필코 16살에 졸업을 할거니까요!" 그

리고 그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깜짝 놀라게 해드릴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션은 줄리안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션은 큰 박스에서 모니터를 꺼내 랩탑에 연결하며 연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했다. 모니터와 스피커를 설치하던 그의 손은 익숙하고 침착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줄리안의 상황에 대한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줄리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션의 뒤에서 낮게 말했다.


"선생님... 주인 아저씨는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어요. 제가... 주인 아저씨를 속였어요. 그래서 주인 아저씨가 제가 뭘 하는지 몰라야 해요. 그래서 이 창고 방이 저는 좋아요. 에어컨 따위는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션은 그 말을 듣고 손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네 진로를... 말하지 않았다고? 아니, 속였다고? 왜 그랬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걱정과 의문이 담겨 있었다.

줄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등학교만 마치면 사라질 거예요. 군대 갈 거예요. 그 남자는 제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야 해요."


션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줄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왜 네가 어디 가는지를 숨겨야 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혼란과 동시에 줄리안을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줄리안은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냥 그래야 해요."

그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피곤함과 체념이 담겨 있었다.

션은 한숨을 내쉬며 줄리안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구나, 줄리안. 말을 해보렴."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마음을 열고 싶었지만, 줄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션은 그런 줄리안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뭔가 말 못할 사정이 또 생겼구나.'


그는 줄리안의 태도에서 어딘가 단단해진 무언가를 느꼈다. 예전의 줄리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더 불안해하거나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줄리안은 마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션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했다. 말을 하지 않는 줄리안을 다그치는 대신, 그는 아이가 준비가 되어 자신과 그레이스에게 마음을 열 날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알겠어" 션이 조용히 말했다.

"네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다시 모니터 설치 작업으로 돌아갔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 거지?'


션은 줄리안을 돕고 싶었지만, 아이의 자존심과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니터 설치를 마친 션은 잠시 멈춰 서서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줄리안"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지금 뭘 하든 간에, 넌 혼자가 아니야. 네 곁에 내가 있고, 그레이스 선생님도 있어."


줄리안은 잠시 션을 바라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알아요, 선생님."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려는 기색이 엿보였다.


[말 못할 사정이 생긴 그날 밤]


그날 밤. 줄리안은 날이 너무 더워 창고 방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얇은 겉옷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몸을 스치자 그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벤치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숲속에서 들리는 여름 벌레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런두런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리안은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남자 아이… 그러니… 꽃… 독성… 몰래…”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의 목소리는 주인 남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처음 듣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데크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이제 와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줄리안은 없는 척하며 벤치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완전히 잠에서 깬 그는 밤의 고요 속에서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는지 새삼 놀랐다.


“…그러니까 부모 없는 애들이 딱 좋지. 18세 전에는 정부에서 돈도 나오니 쓸모가 있단 말이지. 그러니 18세 지나면 넘길게. 그 후로는 정부에서도 추적하지 않을 거야. 고아 애 하나쯤 없어져도 알 사람이 없어. 키도 크고 힘도 세서 쓸모가 많을걸세. 써먹다가 없어진들, 죽어버린들 누가 알겠나.”


줄리안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멀리서 낮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는 그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매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생각했다.

'이 집에는 나 말고도 엠마랑 조엘이 있어... 하지만 키가 크고 힘이 세서 쓸모가 많다는 건 분명 나를 말하는 거야.'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꼈다. 이곳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했다.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는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

'그것도 되도록 빨리.'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그는 벤치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도망칠 방법들을 떠올렸다. 주인 남자의 감시를 피하면서 이 집을 몰래 떠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하지? 줄리안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줄리안은 그날 밤 몰래 들었던 주인 남자와 낯선 남자의 대화를 션과 그레이스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말하면 선생님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야. 션 아저씨는 분명 주인 남자랑 싸우려고 할 거고, 그레이스 선생님도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겠지. 하지만 그러면... 선생님들이 위험해질 거야.’


특히, 그날 밤 주인 남자와 대화를 나눈 낯선 남자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줄리안은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냉소와 비열함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그의 태도는 주인 남자보다 더 악랄하게 느껴졌다.


[그냥 쓸모 있는 애들 골라서 써먹다가 없애버리면 된다] 는 식의 말투는 줄리안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줄리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주인 남자의 감시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8세가 되기 전에, 인신매매당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해.' 그는 결심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해.'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줄리안은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또 지웠다. 그는 주인 남자가 자신을 찾지 못할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션과 그레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두 선생님이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기에 줄리안은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내가 이겨내야 해. 내가 살아남아야 해.'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줄리안은 더욱 조용히, 그리고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세밀하게 준비하며,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션은 한숨을 내쉬며 그레이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그레이스, 오늘 줄리안에게 랩탑을 갖다 줬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그레이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션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니? 무슨 일이 있었어?"


션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했다.

"줄리안이... 주인 남자에게 고등학교를 안 간다고 거짓말했대. 그 남자야 줄리안이 뭘 하던지 별 상관도 없어 할텐데 굳이 고등학교를 안간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 물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더라고. 줄리안이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여."


그레이스의 얼굴에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줄리안이 어디론가 가버리녀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왜 우리한테까지 말을 안 하는 거지?"


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는걸거야. 우리가 도울 수 있는데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줄리안이 우리를 못 믿는 건 아닐까?"

션의 얼굴에 서운함이 스쳐 지나갔다.

"못 믿는다고? 그래...? 그럼... 섭섭한데."

소파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 그레이스는 줄리안이 그 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는 사실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안 돼, 안 돼!!"

그녀가 소리쳤다.

션이 놀라 물었다.

"왜? 뭐가 안 돼?"


그레이스의 말이 빨라졌다.

"션, 줄리안이 온라인 학교에 등록하는 일을 주인 남자에게 숨길 수가 없어. 줄리안의 집 주소가 그 집으로 되어 있잖아. 학교에 관한 모든 서류가 그 집으로 갈 거야. 어떻게 주인 남자가 모를 수 있겠어!"


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낭패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레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자.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해."


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줄리안에게 뭔가 불안한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우리도 못 믿을 만큼 불안하다면 우리가 도와줘야 해. 뭔지 모르지만 우리가 줄리안을 그냥 믿어주자. 그리고 줄리안이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자."


그날 밤 늦게까지 그레이스와 션은 랩탑을 들고 식탁에 앉아 이곳저곳을 검색해가며 끝없는 대화를 나눴다. 줄리안을 돕기 위해 그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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