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의 커밍아웃
“네? 대학이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줄리안. 사실은 우리도 네가 이렇게 빨리 학교 과정을 마칠 줄은 몰랐단다. 16살에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니 네 상황에 이건 이것대로 문제로구나.”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허, 참.”
줄리안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17살이 되어야 군대 지원할 수 있다는 걸 아셨어요?”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몰라. 당연히 알고 있었지.”
션도 끼어들었다. “우리가 모를 리가 있겠니? 사실 네가 학교를 일찍 마쳐도 17살쯤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졸업해서 우리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리고 네가 군입대 나이 제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게 나는 더 놀랍다, 이놈아.”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줄리안.”
“줄리안,”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말대로 대학을 가자. 너 같은 수재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공부 접고 군대 가는 것도 나는 너무 아까워. 오히려 잘 됐어. SAT 점수도 있잖니!”
줄리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학이라니... 내가?’ 그는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그녀는 줄리안의 SAT 점수를 떠올렸다. 10학년 과정 수업을 들을 때 그레이스가 ‘혹시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니 시험 딱 한 번만 보자’ 면서 줄리안을 부추겼었다.
학습능력이 눈부시게 늘고 있었다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시험은 줄리안에게도 부담이었다. 그것도 ‘딱 한 번만‘ 보자는 그레이스 선생님의 말에 ’ 싫어요’ 할 수는 없었다. 기왕 보는 시험,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에 타이머를 맞춰놓고 하루에 한 번씩 SAT 시험 문제를 풀었다. 일주일간 매일 한 번씩 일곱 번을 푼 후에 본 정식 시험에서 줄리안은 수학에서 만점을 받았고, 영어에서는 단 한 문제만 틀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영어 문제는 도대체 왜 틀렸었던 거지?’
SAT 성적 얘기가 나오자 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문제 풀던 당시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아마 내가 문제를 잘 못 읽었을 거야..’
줄리안이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점수가 아까워서라도 대학 진학을 강력히 추진하고 싶었다.
“줄리안,” 그녀가 말했다. “네 SAT 점수 기억하지? 수학 만점에 영어에서 한 문제 틀렸던 거 말이야.”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근데 그게 왜요?”
그레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점수면 충분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 아이비리그는 EC (Extra Curricular) 크레딧이 없어서 어려울 수도 있지만, 네 고등학교 성적과 SAT 성적이면 공부능력도 EC로 쳐줄 거야. 암. 보딩까지 지원해 주는 학교들은 분명 있을 거야.”
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줄리안. 네 점수면 탑 스쿨들 쪽으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하지만...” 줄리안은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제가 대학에 갈 자격이 될까요? 그리고... 돈도 없고...”
그레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돈 걱정은 하지 마라, 줄리안. 우리가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추천서 문제도 해결할 거고, 장학금 지원도 알아볼 거야. 미국에서는 우등생이 돈 없어서 대학 못 다니는 일 따위는 없어.”
션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너라면 어디서든 잘 해낼 거야.”
줄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지만, 선생님들의 진심 어린 격려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작은 희망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말...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줄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줄리안! 너라면 충분히 가능해. “
줄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감도 싹트기 시작했다.
‘대학이라니... ’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이 대학이라는 단어와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주인 남자가 나를 찾아내면 어쩌지?’
그레이스는 줄리안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줄리안, 작은 사립학교를 가서 기숙사에 들어가자. 펜실베이니아를 떠나면 지금 사는 집 주소로 만들어진 운전면허증이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굳이 운전을 하지 않으면 돼. 네가 어딜 가더라도 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할 수 없어.”
션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 줄리안. 면허증 만들기 전에 여권을 우리 집 주소로 만들자. 신분증이 필요하면 여권을 대신 쓰면 돼.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서두르자.”
줄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확실함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감도 싹트기 시작했다.
—
줄리안은 한 달간의 과정 끝에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줄리안은 운전면허증을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 달간의 주행 연습과 필기시험 끝에 얻은 결과물이었지만,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면허증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디로 팔려가게 될지 모르지만, 운전이 필요한 곳에 팔리게 되려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결과 지난 한 달 동안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몸도 점점 쇠약해지는 기분이었다.
면허증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오랜만에 일찍 침대에 누웠다. 생각이 많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졌나 보다.
툭, 데구르르
투둑, 데구르르
”야, 일어나 “
톡. 톡.
”성호야. 일어나 봐 “
줄리안은 꿈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 성호야.. 성호야..’
하.. 성호라니. 언제쩍에 들어본 이름인지.
꿈에서라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꿈.
“성호, 성호야..”
꿈.. 꿈? 어??
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꿈이, 아닌가?
눈앞에 흰색 털실 뭉치가 둥둥 떠다니면서 눈을 맞추고 있었다.
‘털실 뭉치가 말을 해?’
“아, 이 자식 많이 컸네!”
“으악!!”
줄리안은 비몽사몽 간에도 말하는 털실뭉치를 보자 놀라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으아아악! 이거 뭐야!! 저리 가!”
휘휘 내젓는 줄리안의 손 끝을 보며 도깨비는 상처받은 눈으로 처량하게 줄리안을 바라봤다.
“저리.. 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호곡, 뿌앵~!”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말투다.
‘뭐지, 이 익숙함은?’
그러나 공중에 둥둥 떠있다가 방금 침대 위로 내려온 이 이상한 털뭉치에 대한 경계는 풀지 않았다.
“저, 저리 안 가?”
“후 씨잉. 성호, 너, 정말 너무해!”
‘성호? 내 어릴 때 이름을 알아?‘
그 이름을 듣고 더욱 겁에 질려 발로 걷어차려는 줄리안 앞에서 털뭉치는 소년으로 변했다.
“나야, 성호야.”
줄리안은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안다. 이 얼굴을 안다.
“너, 호.. 혹시, 설마! 치.. 친, 구?”
씩
“짜식, 이제야 알아보네. 호이짜!”
어릴 적 보육원 시절 줄리안은 외톨이였다.
그 보육원에는 유독 아기 때부터 보육원에 들어온 고아 아이들이 많았었다. 그곳에 다섯 살이 넘어서 들어온 자신은 외톨이였다. 유독 작고 마른 아이였던 자신은 덩치 큰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 생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을 찾아왔었다, 아빠가 다녀가고 나면 형들의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었다. 옷도 찢기고, 아빠가 주고 간 용돈도 뺏기고,
자격지심.
그 아이들에게는 아마도 그런 게 있었을 거다.
별것도 아닌 키 작은 아이. 친구도 없이 혼자 외톨이인 아이. 그런데 아빠라는 사람이 찾아오는 아이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는 아이.
그래서 심통을 부렸겠지.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핀잔을 주고 가끔은 여럿이서 때리기도 하고 신발도 빼앗기기도 했지만 줄리안은, 아니, 어린 성호는 참아냈었다.
자신은 그곳에 오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아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집에 갈 거였기 때문에. 그깟 따돌림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비 오는 날 자신을 괴롭히던 패거리들이 횡단보도 앞에서 넘어져 있는 어떤 남자아이를 놀리고 있는 걸 봤다.
비를 맞고 있던 아이가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덩치가 컸던 보육원 대장 형이 남자아이의 등을 발로 꾹꾹 누르며 구정물 속으로 주저앉히며 웃고 있었다.
“야, 야, 얘 좀 봐라. 아까는 저기서부터 날아오듯이 빨리 달려오지 않았어? 봤지, 너도 봤잖아!”
“엉, 맞아. 나도 봤어, 형. 근데 형 발에 걸려 넘어지고는 왜 안 일어나지?”
둘이 맞장구를 치고 있자 함께 서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넘어져 있는 아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울어?? 푸하하. 야, 얘 운다. 넘어졌다고 울어? “
넘어지 아이는 구정물에 흰 바지가 얼룩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더구나 저 덩치 큰 대장 놈이 아이의 등을 발로 계속 누르고 있잖아!
어린 성호는 그간 저 패거리들이 자신에게 한 못됀짓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게 되자 우산을 내동댕이 치고 뛰어갔다.
”뭐 하는 짓들이야! 여럿이서 한 사람에게 이렇게 못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수녀님이 그러셨잖아 아! “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어린 성호는 그냥.. 도와주고 싶었다.
아마도, 자신이 맞고 있을 때 보육원 아이들 중 아무도 자신을 위해 나서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섭섭하고 억울한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흰 바지를 입은, 아니다.. 위아래 흰 옷을 입고 있는 저 남자 애는 처음 보는 아이였다. 아마 우리 보육원에 있는 아이가 아닐 거다.
그럼 부모님이 있을 텐데.. 왜 혼자 이렇게 맞고 있을까?
성호는 무작정 패거리들에게 덤벼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덩치 큰 형을 밀쳐내고 흰 옷 입은 남자애 앞을 가로막았다.
“다리 치워, 형! 여기 이렇게 이렇게 누르고 있으니까 이 친구가 못 일어나는 거라고!”
“친구? 친구우?”
“야, 네가 친구가 어디 있어? 이거 웃긴 놈이네. 네가 뭐라고 나서?”
“한 달째 아빠가 안 왔다며? 너도 이제 네 아빠한테 버려진 거야. 괜히 까불지 말고 저쪽에 찌그러져나 있어!”
패거리들은 다들 한 마디씩 내뱉으며 성호에게 비켜서라고 겁박을 주었다.
‘씨이.. 아빠가 날 버렸을 리가 없어!‘
아빠 얘기에 화가 난 성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해서 연락이 없는 아빠가 궁금해서, 어쩌면 아빠가 다시 안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을 괴롭혀서…
“으아아아악!! 너희는 나쁜 놈들이야!! “
퍽!
딱 한대였다.
지금껏 맞고, 당해온 시간들이 있으니 억울하기도 했겠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는데 대장 형 턱을 강타했나 보다.
제대로.. 때렸나 보다.
”악! “
턱을 쥐고 비 오는 길바닥을 뒹굴며 아프다고 몸부림을 치는 대장 형을 쳐다만 봤다.
겁? 안 났다.
미안했냐고? 절대!
패거리들은 바닥에서 뒹구는 대장을 보살피느라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어린 성호는 구정물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을 아이를 찾으러 몸을 돌렸다.
어?
없다.
아이는 그새 도망을 갔나 보다.
치..
가버렸네.
성호는 아프다고 죽는소리를 하는 대장 형과 패거리들을 그냥 두고 비를 맞으며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원장 수녀님이 부른다는 말에 원장실로 불려 갔다.
”그래. 너도 참을 만큼 참았다… 이거니? “
”네? “
성호는 알 수 없는 원장의 말에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맞고만 있다 보니 성질이 나서 보육원 밖에서 애를 팬 거야? 요놈 이거 순진하고 얌전한 줄 알았더니만 계획도 짤 줄 아는 영악한 놈이었네..”
“…”
“우리 보육원에서 턱뼈가 부러질 만큼 심하게 폭력을 쓴 원생은 없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자.. 잘못했어요, 원장님. 그렇지만 형이랑 그 애들이 길거리에서 어떤 아이를 괴롭히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자, 핑계는 이제 그만. 솔직한 반성문 100장 쓸 때까지 다락방에서 지내는 거다, 성호야. 그리고 부엌에서 감자를 까야할 거야. 오늘 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구급차가 왔었거든. 병원비도 만만치가 않아.”
“아.. 병원비. 병원비는 아빠가 오시면 말씀드려 볼게요 원장님.”
어린 성호의 말에 원장은 성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 성호야. 음.. 너희 아빠는 이제 오시지 않아.”
“네? 그, 그게 무슨..”
“여기 있는 아이들처럼 너도 이제 혼자서 살아야 하는 거란다.”
“…네?”
정확한 얘기는 줄리안이 된 지금까지도 잘 모른다.
그날 원장 수녀님이 담담하게 말해준 얘기가 줄리안이 알고 있는 전부다.
아빠가 배를 타고 큰 바다에 일을 하러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얘기. 이제 더 이상 성호를 찾아 올 사람은 없으니 18세가 될 때까지 이 보육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몇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지만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또 내일과 같을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성호는 부엌에서 감자를 까고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식당 아줌마가 음식을 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입에 넣어줬기 때문에 성호는 항상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저녁까지 별로 할 일이 없던 어느 날이었다,
툭. 또르르
“안녕?”
웬 남자아이가 놀이터 그네에 앉아있는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사탕?
한 번도 본 적 없던, 알이 엄청 큰 사탕을 손에 쥐고 있던 아이는 줄리안 앞으로 사탕을 툭 던졌다.
”너 먹어. 이거 부자 애들만 먹는 수입용 박하사탕이야. 아무 데서나 구하는 사탕 아니야. “
”고.. 마워. “
성호는 흰 옷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사탕을 건네받고 까서 입에 넣었다.
맛.. 있다.
박하맛이 나긴 했지만 쌉쌀한 박하맛이 아니라 딸기맛이 더 많이 나는, 끝에만 알싸한 박하향이 남는.. 너무 맛있는 사탕이었다.
”맘에 들어? “
”응. 정말 맛있다. 고마워. 근데 이거 나 왜 줘? “
”고맙긴, 내가 고맙지. “
”어? “
”지난번에 비 오는 날.. 횡단보도 앞에서 나를 위해 싸워줬잖아. 나 그때 정말 곤란했었거든. “
아..
그때 그 남자애구나.
갑자기 사라져서 도망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사라져 버려서 미안했어. 그런데 내가 비를 처음 맞아봐서 몸이 젖었을 때는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직 못 배웠을 때라..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
”아, 하하.. 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다, 내가 별 말을 다하네. 별일 아니야. 이제는 다 괜찮아. 그나저나 너 찾느라고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너 보육원에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
성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자 흰 옷을 입은 남자애는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실수했지..? 미안. “
”아니야. 이젠 괜찮아. 아빠가 돌아가셨으니까 나도 이제 여기서 오래 있을 거 같아. 나 보육원 아이 맞아. “
미안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성호는 자신도 불편해졌다.
”난 성호야. 넌 이름이 뭐야? “
”성호? 아, 넌 성호구나. “
”응. 넌 이름이 뭐야? “
”난.. 음.. 친.. 구. “
”뭐? 이름이 뭐냐니깐? “
”친구! 난 친구야. 그때 네가 그랬잖아. 친구..라고“
이상한 아이다. 아니, 쟤네 부모님이 이상한가?
누가 친구라는 이름을 이름으로 지어주겠는가?
어쨌든 이상해…
그날 이후 성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찾아와서 이것저것 다른 맛의 박하사탕을 주고 갔다. 부잣집 아이들만 먹는 거라서 그런지 정말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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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친구.. 너.. 정말 그때 그 ‘친구‘ 맞아? 근데 아까 그 털뭉치는 뭐야? 그것도.. 너야? “
흐잇짜!
줄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털뭉치로 변해서 둥둥 떠다니며 줄리안의 방을 구경했다.
아직도 꿈인지 꿈 밖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줄리안은 털뭉치를 계속해서 경계했다.
”너, 뭐야! 뭐냐고!! 그리고 친구는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줄리안의 호통에 털뭉치가 갑자기 홱 뒤를 돌아봤다.
”성호야, 놀라지 마. 원래의 나는 도깨비야. 그리고 그때의 나도, 지금 이것도 내 모습이야. “
도.. 깨비?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
”믿지 못하겠지? 미안해. 그때는 네가 그렇게 떠나 버릴 줄 몰랐어. 천천히 너와 놀면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네가 그렇게 금방 입양을 가버릴 줄 내가 알았나. “
뭐?
”흠.. 무슨 말을 해줘야 네가 날 믿겠냐만은.. 이건 어때? “
또르륵… 톡.
바스락.
도깨비는 털실뭉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줄리안의 방바닥에 굴렸다.
‘사탕?‘
어, 이건!
“먹어봐. 네가 기억하는 맛 일 거야. 너 딸기 박하사탕 좋아했잖아.”
정말이다.
친구.. 너였구나.
줄리안은 사탕을 입에 넣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털실뭉치 도깨비를 쳐다만 봤다.
일찍 잠자리를 청했지만 도깨비의 등장으로 그날 밤 줄리안은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놀라움이 갑절로 늘어났다.
지금껏 그 많은 얘기들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만큼 도깨비의 이야기보따리에는 줄리안이 알 수 없었던 시간들 속의 스토리들이 있었다.
줄리안의 입양이 갑자기 정해진 걸 모르고 보육원에 와서 줄리안을 찾았던 그날, 줄리안은 양부모님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었단다.
도깨비가 바람과 구름을 타고 공항으로 날아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줄리안을 놓쳤었단다.
”성호야, 아, 이제는 줄리안이지? 줄리안. 사실 네가 나를 도와줬던 그날 난 어쩌면 소멸해 버릴 수도 있었어. “
“뭐??”
도깨비는 오래전 일을 아련한 마음으로 떠올렸다.
“…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수습 도깨비 꼬리표를 떼고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을 개시한 날이었지. 그날따라 비가 왔었어. 발을 빨리 움직이면 땅에 발이 닫기 전에 미끄러지듯이 물을 피해 움직일 수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신이 나서 날듯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장소에서 그 어린놈 패거리들의 눈에 띈 거야. 우리 도깨비들은 인간들 눈에 띄면 안 되는 규칙이 있어. 물론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나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어. 힘이 없어지면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까지 패닉에 빠져버렸었지... 그때 네가 나타나서 나를 구해 준거야. 나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줬지.”
도깨비는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그때 맞고 있던 너만 두고 그렇게 사라져서 미안하다 ‘며 앞으로 두고두고 갚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미국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내가 여기 사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아~ 그거? 도깨비의 근성에 대해 모르면 말을 말아라.”
도깨비는 씩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는 줄리안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면서 계속 보육원을 기웃거렸단다. 그러기를 몇 달, 몇 년. 어떤 날에는 공간 뒤에 숨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원장 수녀님 책상에서 입양 간 아이들 서류를 훔쳐보기도 했었다고 했다. 결국 줄리안이 간 곳이 펜실베이니아 나는걸 알게는 되었지만 줄리안을 찾아갈 길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도깨비는 이상한 남자가 와서 성호(줄리안)를 찾으며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성호 (줄리안)의 삼촌이라고 하면서 수녀님 하나를 돈으로 매수해서 성호(줄리안)가 보육원에서 살던 시절의 얘기를 모두 얻어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도깨비는 보육원이 아니라 그 삼촌이라는 남자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남자는 항상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고, 가끔은 되지도 않는 영어로 끙끙거리며 통화를 했다고 한다.
도깨비가 삼촌을 따라다닌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삼촌은 갑자기 비행기 표를 끊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깨비는 두 번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삼촌이라는 남자의 짐 가방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 럼? 너 삼촌이 한국에서 왔을 때부터 랭캐스터에 있었던 거야??”
“.. 우웅. 뿌앵..”
도깨비는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그 시절 어릴 때 내던 이상한 소리를 아직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