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되지는 않지만
주일 오후에 자녀교육 강좌를 들었다.
1년이나 부탁드려서 열리게 된 세미나라기에 나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좀 부실한 강의였다. 그렇지만 ‘눈을 감고 내가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장소를 찾아보기’와 ‘엄마(부모님)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 나누기’는 교실에서 해봄직하단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답게(?) 아이들은 아침부터 생기가 다 빠진 모양으로 늘어져 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지금부터 눈을 감고 자기가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장소를 생각해보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이요!”
“놀이터요!”
“침대위요!”
여기저기 대답을 외쳐댄다. 어허허… 그냥 떠올려보라니까… 눈을 감고 그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고 하지만 이미 풀죽어 있던 아이들은 온데간데 없고 신나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장소를 떠들어댄다.
그런데 집 외에 다른 곳을 말하는 아이들을 보니 평소 언니와 자주 비교당하는 S와 엄마가 자주 집을 비우신다는 T가 눈에 띈다. 나도 가장 편한 장소를 떠올렸을 때 집이 아니었지만(가장 편안한 곳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학교 도서관 한쪽 구석이었다. 켜켜이 놓인 책장 사이사이로 바로 책을 뽑아 앉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보기엔 좁아보아도 제법 푹신하고 앉기 편하다.. 교과시간에 빼곡히 꽂힌 책들 사이 좁고 아늑한 공간 속에 몸을 기대 있으면 모든 긴장이 풀어지며 그렇게 평안하고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아이들은 가장 편한 장소가 어디라고 대답할까. 참고로 우리 남편은 두 번 생각도 않고 집이라는데 아이러니하게 그런 집돌이는 주말부부 생활을 6년 째 하고 있다.
너무 분위기가 붕 떠버릴까 얼른 수습하고 사회 수업, 그리고 국어 교과평가. 국어 교과평가 시간에 평가지를 걷고도 시간이 좀 남길래 첫 번째는 좀 흐지부지 지나갔지만 두 번째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아이들에게 부모님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역시 우리 K. 아이고, 또 진지하기는 글렀군. 어쨌든 생각할 시간을 주고 모둠을 만들어 한 사람 씩 돌아가면서 듣고 싶은 말을 얘기하면 다른 모둠원들이 함께 그 말을 외쳐주기로 했다. 활동이 잘 이루어지는 모둠도 있지만 원하는 말을 반대로 해버리거나 “학원 가지 마”, “학교 가지 마” 소리만 연신 터져 나오는 모둠도 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속 시원히 스트레스라도 풀어라.
모둠 활동을 마치고 몇 명을 지목해 듣고 싶은 말을 물어보았다. 평소 부모님에게 많이 눌러있을 아이나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내성적인 아이들을 일부러 지목했다.
외동딸이지만 바쁜 부모님 밑에 자라 말이 없고 내성적이면서도 늘 관심 고파하는 J가 듣고 싶은 말은 “너 정말 잘했어”다. “J야, 정말 잘했어”라고 해주니 아이의 굳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똑 부러지는 엄마 밑에서 완벽한 아들 노릇하느라 늘 긴장하는 G는 “수고했어”라는 말이 듣고 싶단다. 매일같이 학원 숙제에 허덕이는 H는 “학원 가지 마”란 말을 듣고 싶다길래 반 아이들과 아주 우렁차게 “H야, 학원 가지 마”라고 외쳐주었다. 감정표현이 잘 없고 표정이 어두운 편인 H 얼굴에 짓궂은 함박웃음이 떠오른다.
진지 반 장난 반으로 소란 속에 진행되긴 했지만 마치고 아이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다. 어른들처럼 수려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대부분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생각이 안 나서 아무 말이나 한 거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엉뚱이 M은 제외하고. 뭐, 한번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