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살림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의사”인 추혜인 작가가 쓴 에세이이다. 작가가 의사가 된 계기, 진료실에서 있었던 일, 왕진을 다니며 겪은 일, 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면서 든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지식 차이로 인한 서열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신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평등한 관계의 병원을 꿈꾸던 작가는 은평구에 살림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고 그곳의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가정의학과 의사로 살면서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수요일에는 왕진을 다닌다.
책에는 페미니스트이며 비혼인 작가가 여의사로 살아가며 겪는 이야기도 실려있지만 나는 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가정의로서의 그녀의 모습에 눈이 더 갔다.
『사망선언을 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누구도 나를 힐난하지 않아도 그 순간 내가 나의 최선을 계속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중략) P 244
『나만이 아니었다. 전국의 의료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모여 공부하고 교류하는 연수회에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강의가 열렸다. 조용하고 묵직한 분위기에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너무 심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강의는 신파조가 아니었다.』(중략) P 244
『수없이 많은 죽음 앞에서 치료의 실패를 정리하지 못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탓하고 구석에 몰아넣었던 스스로를 겨우 꺼내놓은 울음, 오래전 환자와 가족들 앞에서는 차마 보이지 못하고 우리끼리였기에 이해받을 수 있다고 여겨 간신히 꺼낸 그런 울음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화하지 못했던 환자들의 죽음….』(중략) P 245
『나는 그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는 어라 님이 고마웠다. 이 얘기를 가족들에게 전해야 할 때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주어서, 나 혼자 이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을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그제야 나는 항상 사망선고를 할 때마다 사실은 외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와 가족들의 불안, 좌절, 놀람, 분노, 고통 앞에 홀로 마주해야 할 때, 미친 듯이 외로웠던 거다.』 P 247
가벼운 마음으로 왕진을 갔다가 보호자에게 환자의 사망진단을 내리던 작가는 ‘사망선고를 할 때마다 사실은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비전문가인 왕진 동행 자원활동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얻었다고 말한다.
의사는 전문가라서 외롭다. 일반인들은 죽음 앞에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의사는 그렇게 할 수 없다.의사는 죽음을 진단하고 사망선언을 한다. 전문가라서 환자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 본인이 마음을 담아 진료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환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의사에게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들일 것이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나 동네에서 가끔 보던 고양이가 죽어도 슬퍼지고 허무한데 하물며 눈을 맞추고 공감하던 환자는 말해 무엇할까. 의사는 의사라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감추고 보호자를 대해야 한다. 경황이 없는 보호자들의 마음까지 살펴야 한다. 의사는 그래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죽음이 갖는 고유한 무게감이 있다. 죽음을 마주하면 우리는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황망함을 공감하기에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다. 죽음 앞에서 격한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누구도 질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런데 같은 인간으로 느끼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의사들은 표현하기 어렵다. 죽음 앞에서 극도로 이성적이어야만하는 의사들. 죽음 앞에서조차 이성을 놓으면 안 된다는 책임감. 이 책임감으로 외로웠을 의사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위로하고 싶다.
『주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한 지 한 달쯤, 할머니는 점점 살이 붙었고 피부색도 발그레해지기 시작했다. 마른 손가락에 분홍색 장난감 꽃반지를 끼고 계셨다. 웃는 모습과 반지가 너무 잘 어울려서 “어디서 난 반지예요?” 물으니, 유치원생 증손주가 끼워드렸다 한다. 왕할머니 좋다고 침대 옆에 와서 종알종알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아끼던 장난감 반지도 드렸단다. 왕진 나올 때마다 마주쳤던, 학습지 풀기 싫어 몸을 배배 꼬던 꼬마가 이런 기특한 면이 있었네.』 P 79
『방광암 복막 전이. 그러니까 이 뱃가죽 안에 암세포가 가득 들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 이 순간 그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증손자가 와서 놀고 싶게 볕이 잘 드는 침대. 소변줄과 기저귀, 엉덩이의 욕창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게서는 기분 좋은 바디로션 냄새가 났다. TV에서 트로트가 나오면 몸을 들썩이시는 것 같기도 했다.』 P 80
왕진을 다니는 작가는 다양한 환자와 가정을 마주하게 되는데 죽음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을 돌보면서도 따듯한 경험을 하는 듯하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왕진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자기와 익숙한 공간인 가정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왕진. 작가가 왕진 가서 돌봐드린 어느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따뜻한 죽음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죽어가는 할머니의 손가락에 있는 연분홍색 꽃반지를 보며 ‘햇살이 잘 드는 방 금침 위에서 죽음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증손주의 병원 놀이에 기꺼이 한몫 참여하셨’다던 증조할머니를 떠올린 작가는 따뜻한 죽음을 더 많이 만들어낼 것 같다. 온기로 가득한 죽음. 외롭지 않은 죽음. 두렵더라도 씩씩하게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이 점점 더 많아지면 좋겠다.
왕진은 익숙한 공간에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 일상생활을 즐기며 조금씩 죽음으로 다가가는 삶을 가능하게 해 준다. 왕진은 온기가 가득한 행위이다. 온통 하얗고 청결하고 싸늘한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의술(醫術)이라면 왕진은 죽음을 마주하며 자칫 힘들어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인술(仁術)이다.
『여성주의 의료기관은 여성들만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성별, 성별 정체성, 직업, 계급, 인종, 나이, 학력 등에 관계없이 차별 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곳이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지식 차이로 인한 권력 차이가 생기지 않게,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한 충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의사가 적절한 조언자이자 동료로 관계를 맺는 곳이다. 여성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 무시당하지 않는 곳이다. 직원들도 누구나 존중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다.』 P 289
작가는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 모두에게 관심이 많다. 작가의 시선은 항상 소외되거나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문다. 따뜻한 안목을 가진 작가는 본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놓치기 쉬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본다. 이런 작가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글이라서 책에는 모두를 위한 의료와 돌봄에 대한 메시지가 곳곳에 담겨 있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담겨 있는 책이지만 페미니즘보다는 휴머니즘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는 환자들에게 맞춤형으로 최대한 공명하려 노력하는 의사. 가장 낮은 곳에서 외롭게 버티고 있는 이들 곁을 지키는 의사는 휴머니스트가 분명하다.
작가는 여성이라는 성별에서 오는 차별을 뺀다면 자기가 가진 의사면허증으로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다니며 돈과 명예보다는 인간을 쫓고 따뜻한 인술을 펼치고 있다.
책을 읽고 나니 페미니즘이라는 말보다 왕진 가방이란 단어가 더 오래 기억된다. 여성운동가라기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마음 따뜻한 의사의 이야기를 읽은 것 같다. 은평구에 있다는 그녀의 병원이 내가 사는 마을에 분점을 낸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의료복지사회적 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그 병원만 다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