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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파랑 Jul 27. 2023

《구의 증명》 최진영

야만적이고 잔혹한 세상에 대한 증명   은행나무

야만적이고 잔혹한 세상에 대한 증명     


출처 알라딘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이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부모의 빚을 떠안은 구. 할아버지가 죽은 후 존재조차 몰랐던 이모를 만나 단둘이 사는 담. 담과 죽은 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연이 많은 둘의 어린 시절 만남부터 구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독백과 회상을 통해 들려준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다 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쫓기다 죽는다.     

“내가 죽으면 꼭 아무도 모르게 묻거나 태워야 해.

안 그러면 놈들이 내 시체를 팔아먹을 테니까.” P.18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P.19     

살아생전 했던 구의 말을 기억하는 담이는 죽은 구를 먹기로 한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P.20 담의 독백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P.156     


구를 사람 취급하지 않던 괴물 같은 놈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구를 기억하겠다는 담. 구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담은 그렇게 구를 먹고 살아남기로 한다. 담은 사람들이 구의 죽음을 두고 “차라리 잘 되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냐고, 답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을 알기에 구를 땅에 묻을 수도 태울 수도 없다. 빚쟁이들은 구를 물건 취급하고 구의 시간과 목숨에 값을 매기고 없는 사람 취급했다. 담은 빚쟁이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받았던 구를 정말로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구를 먹을 수밖에 없다.     


사채업자들이 구를 대하는 방식은 야만적이다. 사채업자들은 구를 사람이 아닌 돈으로 환산하여 계산하고, 구의 생명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결국 돈 때문에 구를 죽게 만드는 사채업자들의 모습은 식인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작품에서 구를 옥죄어오는 사채업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동족까지 먹어 치우는 식인종보다 더 잔인하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살인을 멈추지 않기에 더욱 무자비하다.     


“근데 소니 빈 얘기가 지어낸 거라고 해도,

아무 죄의식 없이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는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렇겠지.

……지금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있지.

죄책감 없이. 당연하게. 쭉 그래왔으니까.

약한 놈만 골라잡으면서. 잡힌 놈이 등신이지, 생각하면서.

애들도 그렇게 키우고.

응. 잘 잡아먹는 게 능력이라고 가르치고.

후회한다면, 힘이 세지 않은 걸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고.” P.161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중략)

아주 오래전 인간은 동족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프면, 배만 부르면. 허기 때문이 아니라도 먹었을 것이다.

그의 손이 탐나서. 그이 발이 탐나서.

그의 머리, 그의 얼굴, 그의 성기가 탐나서.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불과 도구 없이도, 다리와 턱뼈와 이빨만으로.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p.163 )   


《구의 증명》은 현대 사회가 죄책감도 없이, 당연하게, 약한 타인을 잘 잡아먹는 능력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인의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모습을 지적하며, 사람보다 돈이 우위에 있는 “돈이 존재를 결정”하는 세상의 잔인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난이 약점이 되는 세상,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불합리한 계산으로 타인을 갈취하는 세상, 자기 욕심을 채우려 타인의 신체까지 돈으로 환산하여 취하는 행위가 만연한 세상에서 구는 서서히 죽어간다. 인간의 탐욕과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구. 구의 죽음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야만적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나에게 화가 났어.

내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널 괴롭게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내 마음이 널 괴롭게 했다.

처음뿐 아니라 우리 함께한 지난날 모두,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이 널 괴롭혔고, 괴롭히고 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다른 이들도 그러할까.

죽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담아. 이 멍청아.

이젠 됐어. 넌 다 했어. 이 장례를 끝내야지.

끝내고 살아야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나도 여기 있어.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P.170 구의 독백     


9살부터 담이를 좋아했던 구. 담이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이 그동안 담이를 괴롭혔고 앞으로도 괴롭힐까 봐 걱정하는 구. 영혼이 된 구는 담이에게 이젠 장례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 살아가라고 말한다. 죽은 구의 말은 담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죽음의 세계에서의 독백이지만, 담이는 이제 밖에서 살아갈 것 같다. 구를 모두 뜯어먹었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 살아남아 나쁜 놈들이 모두 죽어가는 것을 확인할 것 같다. 자신의 이름처럼 구를 제 몸에 담은 담이가 그랬으면 좋겠다. 죄책감도 없이 비인간적인 일을 일삼는 자들이 무너지는 세상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구의 증명》은 두 남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 속에 탐욕스럽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일삼는 인간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문체가 간결하고 쉽게 읽힌다. 비유적인 표현이 많고 자꾸 곱씹고 싶어 시집처럼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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