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훈의 앞날

재성은 소연이 서울에 올라온다는 소식이 뜸해지자 불안함을 느낀다.
그리곤 월요일 아침부터 선미네 집에 전화를 건다.
“예 여보쎄용.”
“여보..세요?”
“누구십니꺼?”
“아,안녕하십니까 장모님. 저 노서방입니다. ”
“아이고~ 노서방. 우앤일이고? 그래 잘 살아 있나?”
“네. 전화가 많이 늦었습니다.”
그래도 사위로 지낸 세월이 있어서인지 기미는 재성의 힘없는 목소리에 마음이 애처롭다.
훌쩍이며 말을 잇는 기미.
“아이다. 내사 선미한테 자네 이야기 마이 듣고 있다. ”
“네..장모님..”
...
“저, 장모님. 요즘 소연이랑 승훈이는 잘 지내고 있죠?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요...”
“어, 어어 그래그래. 잘 있지 고마. 건강하이 잘 ~ 있다. 너무 걱정말고, 선미 오마 자네힌테서 전화왔다고 전해줄게. 노서방.”
“아,,아닙니다. 그냥 안부 전화드렸습니다. 괜찮습니다. 또 전화드리겠습니다.”
“그,그래 노서방. 아무걱정말고...”
말을 잇는데 뚝,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긴다.
기미는 재성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아파왔다. 한 때 사위였던 사람. 그래도 미워한 적 없었는데, 소연과 승훈의 애비로서 떨어져 살게 하는 것이 내내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재성은 선미네 약국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재성은 이상한 예감이 자꾸 엄습해왔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 병주를 찾아 상경을 하는 소연은 병주에게 이끌려 다닌다.
이제는 방송국에 소문이 다 날 지경이 됐다.
정pd는 방송가에서 권위있는 제작자로서 소문이 나 있었다.
그가 맡은 작품들은 전부 시청률이 높았고, 방송국에서는 꽤 명성이 자자 했다.
그랬기에 그의 사생활에 대해 그의 앞에서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기 작품에 출연시키는 여주인공을 모두 스타로 만들어내지만
그 전에 그의 손을 타지 않은 여배우는 없었다는 이야기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나돌았고,
그의 앞에서는 일언반구도 못하는 작가며 pd들은 삼삼오오 모여 뒤에서 그의 사생활을 껌 씹듯 씹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까마득한 선배이자 능력자였던 그는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자기네들의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의 주변에 붙어살며 얻어먹을 거리가 떨어질때까지 기다리며 그
어떤 미움도 받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관만하고서 쉬쉬거리고 있었다 ,
뚜쟁이들처럼 박혀 있던 그들은 아무도 소연에게 그 남자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상황을 즐겼다.
조용히 눈감아주고 기다리면 소연은 병주의 꼭두각시가 되어 방송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고, 그들은 소연이 스타덤에 오르면 그녀와 함께 오를 수 있기에 부엉이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소연이 열심히 병주의 곁을 지켜주도록 사탕발린말로 소연이 부지런히 상경을 하길 바랬다.
소연이 움직이면 자기네들은 알아서 돈을 벌 수 있으므로 격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연만을 기다렸다.
기특하고 기특한 소연은 매주 상경을 해서 부지런히 병주의 수발을 들었고, 주말마다 상경해서 방송국으로 출근하는 어린 소연이 그들 눈에도 굉장히 빛이 나 보였다.
처음 면접볼 때 만났던 폭탄머리 여자는 작가였다.
그 여자는 극단적이게 머리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새초롬한 매직스트레에트 펌을 하여 칼처럼 떨어지는 긴 쌩머리가 매우 냉정해보였다.
아무것도 모를 때 마주했던 그녀의 까칠함은 가라앉은 그녀의 머리칼처럼 얌전함으로 변했다.
아치형으로 눈썹을 가느다랗게 그리고 입술라인을 오버해서 색칠한 그녀의 화장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왼쪽 눈을 치켜떠서 활처럼 크게 휜 왼쪽눈썹은 이제 오른쪽눈썹과 균형이 맞추어져 있었고,
오른쪽 입꼬리를 씰룩씰룩 대며 헛웃음을 치던 입술은 어느새 오목한 접시모양으로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단정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소연은 그녀의 친절함이 나쁘지 않았다.
드문드문 소연은 미니시리즈의 엑스트라나, 잡지의 모델로 활약을 했고,
당시 학생들의 데뷔장이었던 교복 광고 모델 선발대회에도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다.
병주를 따라다니며 소연은 차근히 발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병주는 소연에게 철저히 교육을 시켰다.
방송국에서는 선생님. 방송국 밖에서는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
병주는 소연이를 늘 끌어안았다.
“내새끼. 너무 예쁜 내새끼”
라고 하면서...
병주도 소연은 필요한 신인이었다.
승훈은 매주 주말마다 까만색 고급 승용차를 타고 사라지는 자기 누나 소연이 낯설어졌다.
그리고 누나가 타려는 차를 함께 타려다 제지를 당했다.
누나는 늘 건장한 남자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다.
건달같기도 조폭같기도 한 무서운 아저씨들은 주말마다 누나를 데리고 갔다가 이제는 아예 평일에도 가끔씩 데리러 오기도 했다.
승훈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제지나 만류를 하지 않는 엄마가 이상해 보였다.
외할머니도 마찬가지 였다.
왜 엄마와 외할머니는 누나가 이상해지는데 말리지 않는지..
단지 소연에게 표시만 내지 않을 뿐 엄마는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승훈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불안을 늘 외할머니가 잠재워주고 있었다.
“소연이는 아가 당차고 야무지니까 니는 걱정말고 아가 벌어오는 돈만 따박따박 잘 모아놓그래이.”
‘돈만 벌어오면 다 괜찮은 걸까..’
승훈은 의구심이 생겼다.
어릴적부터 똑똑하고 예뻤던 누나 덕분에 서울에 살 때부터 인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학생의 본분을 잊고 저렇게 지내는 누나는 과연 행복할까. 누나는 항상 표정이 없었다.
집에 오면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기운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내다가 까만차만 오면 바쁘게 뛰어나가는 누나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승훈은 아침에 함께 등교하는 누나가 없는 날이 많아지고,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통 보지 못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꼭 잡고 있던 풍선의 끈을 놓친 것처럼
하늘위로 날아가버리는 풍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나는 점점 더 멀어졌다.
누나는 점점 더 높이 날아갔다.
누나는 나와 함께 공부하면서 클 수 없는 내가 우러러 봐야 하는 우리 집 가장이였다.
전학 온 학교에서도 , 아빠없는 집에서도, 승훈은 의지할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누나가 옆에 없으니 학교도, 엄마도, 지혜도 모두 포기하고 싶었다.
학교에 가면 쉬는 시간마다 엎드려 생각을 했다.
무기력해서 아무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도, 반장도 모두 시들시들해지고,
틈만 나면 누나 생각에 눈물이 나 쉬는시간 마다 엎드려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눈물을 훔치고 앉아있었는데, 옆 반에서 지혜가 찾아와 승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편지 한 장을 쪽지처럼 접어서 던지고 갔다.
승훈은 그 쪽지를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것 같은 지혜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 쪽지는 가방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곧 그 쪽지에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았다.
‘요즘 좀 이상하다. 니랑 이야기 좀 하고 싶다.
오늘 학교 마치면 내랑 이야기 좀 하자.‘
승훈은 그 쪽지를 보고도 정신이 멍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오셨는데도 승훈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우리 반 반장이 오늘 정신이 나갔네~”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아이들은
“푸하하하, 노승훈 정신차리라~”
“야, 저 고자새끼. 아직 병 못고쳤나?”
“내 저칼줄 알았다. 저거 맨날 무슨 생각에 잠긴 척 멋진 척 지 혼자 다 할라카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혜가 쪽지를 던지고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아이들, 꾸중하시는 선생님까지.
승훈은 그 모든 상황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울고 싶었다.
남자니까.
이제는 참아야 한다.
학교수업이 마치고 1층 복도에 내려오자 마자 지혜가 보인다.
신발도 갈아신지 않고 실내화를 신은 채 지혜를 마주보는 승훈.
“무슨 얘기?”
“야, 니 신발부터 갈아 신어라.”
“아, 깜빡했네. 알았어. 잠깐만.”
신발을 갈아 신은 승훈, 지혜와 나란히 집 방향으로 걸어간다.
“내 내년에 전학가지 싶다.”
“뭐? 왜?”
“원래 작년에 갈라 캤는데 엄마가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되겠단다.”
“뭐가?”
“울엄마도 작년에 딴 학교 전근가셨잖아.”
“아...”
“그캐가 울엄마 있는 학교로 갈라고.”
“그래? 그래 잘됐네.”
“잘되긴 뭐가 잘되? 니 요새 근심있나. 와 그라노? 아가 맨날 울상이고?”
“무슨 ? 울상?.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짓말 하지마라. 니 이상한거 온 학교가 다 안다.”
“온학교가 다 안다고? 온학교가 뭔데?”
“전국에 있는 모든 학교가 다 안다꼬!!”
“그게 대체 무슨말이야~”
“농담이고, 좀 웃고 살아라. 인자 내 없으마 니 우얄래? 내 가뿌고 나면 아무도 니 안챙겨주는 거 아이가?”
“걱정마. 너 없이도 이제 잘 지내.”
“진짜가? 서운하네 이거.”
“그렇다고 내가 무슨말을 하겠냐? 간다는 애한테.”
“그래, 하기사 글체. 승훈아.”
“왜?”
“나는 니가 미래에 니 자신한테 안미안했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말이야?”
“니는 이 세상에서 누굴 가장 사랑하노?”
“나? ”
순간 울컥하는 승훈.
“나는 울엄마. 울엄마를 제일 사랑한다.”
“맞나?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우리누나..”
그 말을 하자 마자 입을 주먹으로 막고 눈물을 흘린다.
“승훈아. 소연언니 잘 지내제?”
“모른다. 잘 지내는지.”
“우리오빠가 카든데 소연언니는 똑똑해서 지는 장사는 안하는 사람이란다.”
“지형이 형이? ”
“응. 그니까 승훈아. 난 소연언니보다 니가 더 걱정이다. 니는 왜 세상에서 니를 제일 사랑해야지 엄마를 제일 사랑하노? 나는 니가 좀 더 강하고 현명했으면 좋겠다. 잘 울지도 않고, 다른 사람보다 니 자신을 걱정 많이 했으면 좋겠다,”
승훈은 지혜의 그 말을 듣고 지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승훈 자신보다 자신을 더 걱정해주는 지혜가 한없이..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지혜라서 승훈은 역시 지혜를 좋아하는 마음을 포기 못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곧 전학을 간다는 지혜. 승훈은 그 사실에 또 슬퍼진다.
“승훈아. 절대로 나약해지지마라. 난 니가 괜찮아졌을 때 다시 올거다.”
“그게 무슨말인데?”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고 미래의 언젠가 오늘을 기억할 때, 니가 니 자신에게 미안할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후회할 일 만들지 말란 말이다. 우리아빠가 맨날 내한테 해주는 말이다.”
승훈은 그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
자신의 인생을 몽땅 엄마와 누나와 지혜에게 맡기고 산 승훈.
지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한 편으론 피가 되고 살이 될 덕담을 마지막으로 떠날 지혜였다.
소연은 선미를 닮아 독했지만 승훈은 재성을 닮아 주위환경에 잘 휘둘리는 편이었다.
승훈은 이제 지혜가 가고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자기를 지켜봐 주는 사람 한명이 또 떠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승훈은 이제 앞으로의 삶들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