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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 Jeonggeul Sep 12. 2022

명절. 그 두근거림에 대하여..

이젠 편안해지소서..

어릴 적 명절은 내겐 축제와도 같았다.


엄마는 명절을 앞두고 늘 내 손을 잡고 백화점을 데리고 가셔서 새 옷을 사 입혔다.


학교는 놀고,

사촌언니, 오빠, 동생들 열댓 정도가 넓은 마당이 있는 할머니 집에 모였다. 할머니 집은 ㄱ자 구조의 주택이었다.

벨을 누르면 개 두 마리가 짖어댔다.

문이 열리면 목줄은 묶인 채 꼬리를 흔들며 문 바로 곁에서 네 다리를 꼿꼿이 펼쳐 장엄하게 서서 월월 짖어댔고 , 한 마리는 삐뚤빼뚤 타일같이 박힌 까칠한 표면의 돌 길을 밟으며  내 팔 언저리를 닿을랑 말랑하게 핀 푸릇한 정원의 식물들 6-7그루를 지나면 보이는 곳에서 얌전하게 꼬리만 흔들며 서 있었다.


그 맞은편 아랫방 광에는 연탄불이 있었는지 첫째 큰엄마가 다시마와 간장을 달여 닭을 한 마리 통째 찌시며 달큼한 닭 냄새로 우릴 맞이하셨고, 둘째 큰엄마와 울 엄마 그리고 넷째 작은엄마와 막내 숙모는 모두 동그랑땡과 니리미전(꼬치전), 명태전, 미나리전, 부추전을 구우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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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마루에 놓여있던 털이 만져지는 소파에 앉아 우리를 맞이하셨다. 크림색 털이 바탕이었고 호랑이 무늬처럼 검은색 털이 얼룩처럼 박힌 소파였다. 손을 올리는 곳엔 누런색 나무가 둥근 표면 세 가닥으로 나뉘어 소파 가장 아래까지 떨어져 있었다.


 제일 큰 아버지는 차례 준비를 하시느라 우리가 온지도 모르셨고, 둘째 큰아버지는 인사하는 척 다가오셔서는 내 콧구멍에 혀를 집어넣어서 나는 새 옷의 소매로 있는 힘껏 코를 문지르며 싫은 표시를 냈다. 사촌들은 방 두 곳과 마루, 총 세 군데에 나뉘어 비집고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언니, 오빠, 동생들은 그 사이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배시시 웃었다. 나는 어린 축에 속했다. 언니, 오빠들은 무럭무럭 크는 나를 보고 웃었다. 키도 쑥쑥 자랐지만, 살도 퉁퉁하게 쪄서 전체적으로 커지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반가워서 웃고, 부끄러워서 웃었다. 언니, 오빠들은 점점 세련되어 갔다. 그런 언니, 오빠들을 보며 이다음에 자라면 나도...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 정원이 있던 집에서 모인 그땐 명절 차례를 조금 늦게 시작한 것 같다. 아마, 다 같이 모여 준비하느라 그랬던 때문일 것이다.  다 모인 명절 당일날 아침, 준비가 되지 못해 허둥지둥 뛰어다니던 큰엄마들과 작은엄마들 생각이 난다.





결혼을 하고 나니, 우리 시댁은 일이 분업화되어있었다.

맏며느리 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전이랑 나물 준비를 하시느라, 나는 명절 전날 어머니와 함께 전을 부쳤다.

그럼에도 작은어머님들께서도 전을 준비해오셨다.


 3년 시집살이를 하며 나는 명절 차례와 기제사 준비하는 일을 많이 해보지 못해 봤다. 그럼에도 전을 부치는 일은 힘들었다. 어머니는 나와 전을 함께 구우시고도, 또 혼자 나물을 마련하시고 닭도 구우셨다. 어찌 됐든 명절 차례와 기제사 지내는 시간을 엄수하시며 음식 준비로 늦은 적은 없으셨던 것 같다.


 재작년 어머님께서 아버님께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요즘은 명절날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제사도 지낸다 카든데..."


어머님이 평생 명절 음식 준비를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런 얘기를 꺼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해외에서 지내면 조상님들도 음식 드시러 해외여행 오실까 하는 생각도..








내 나이 열여섯. 중3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혼자 살아계신 할머니는 큰 마당이 있던 그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사촌언니, 오빠들은 모두 시집, 장가를 갔고 제사는 할아버지 댁에서 제일 큰아버지댁으로 옮겨 지내게 되면서  명절 차례와 기제사를 지낼 때마다 우리 집은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  전쟁과 같은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집안의 분위기가 그토록 살벌히 바뀐것일까...





인터넷 뉴스에 나오는 명절 이후 이혼상담이 급증되는 기사를 볼 때마다 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결혼하고서도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느라 명절과 제사 준비에 빠지기 일쑤였고, 아이를 낳고서도 휴일에 쉬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명절과 제사 준비에 많이 빠졌었다.

혼자 준비하시며 속 끓으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나는 명절이 싫었다.



음식준비를 하러 큰집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갔어도, 엄한 화풀이대상이 되어 갖은 수모를 당한 친정엄마를 생각하니, 나 또한 내가 겪지 않아도 명절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내 딸 오니까 너희 친정은 내일 가라."


그것만큼 듣기 싫은 말도 없었다.


포항이 시댁이었고, 친정이 있던 대구에 우리 집도 있었기에, 그저 내가 친정과 가까이 붙어 사니까 '친정과 친하게 지내는 만큼 우리 집에도 좀 있어다오.'라고 생각하셔서 그랬겠지 라며 속으로 삭였다. 그래야 내가 덜 분하고 덜 서러우니까...





유교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 명절의 의미란, 돌아가신 조상님들 모시느라 살아있는 사람끼리 모여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먹으며 그 결속을 다지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는 게 힘들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타국살이를 하며 우리 식구끼리 조촐히 보내는 명절을 지내고 나니 분하고 서러웠지만 명절이라 북적대며 지내던 예전이 그립긴 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이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리는 것일까.

호치민에서 추석을 보낸 세식구 상차림


 그럼에도 아직 명절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정엄마를 보면 씁쓸하기만 하다. 평생 고생하고도 며느리까지 본 엄마가 아직 명절증후군을 겪는 것만 같다.






어릴 적 축제 같던 명절이 그립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누군 일찍 와서 일을 많이 하고. 누군 늦게 와서 일을 적게 하는 갈등을 줄여서 늦어도 모두가 협동하시며 일하셨던 그때가...


허둥지둥 대면 어떤가.

조금 늦으면 어떤가.

엉덩이 붙이고 하하호호 웃으시던 큰엄마들과 울엄마, 작은엄마들의 웃음소리가 ㄱ자 집의 방 저기 끝까지 퍼져오던 그때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명절도 격식보다는 마음이 앞섰으면 한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하는 것보다,

살아있는 사람보다 돌아가신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고 싶은 사람이,

돌아가신 분만큼 살아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지냈으면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

눈에 보이는 격식을 차리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 아닌가.


 존재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존재하는 사람 위주로 하기로 하고, 마음으로 위할 일이라면 굳이 명절이 아니어도 평상시 언제든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22.09.12

브런치 작가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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