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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 Jeonggeul Jul 15. 2022

영원한 나의 편. 소꿉친구

5살부터 36년째 이어져온 우정의 시크릿.

어제 아침 일어나자 마자 소꿉친구한테서 보이스톡이 왔다.


 책을 잘 받았다는 내용으로 안부전화를 걸었단다. 올해 36년째 친구. 엄마보다는 더 만만하고 편한 구석이 있는 친구다.

친구와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는데도 할 말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끊자~ 라는 말을 한지 한 시간이 지나도 못 끊고, 두 시간이 지나도 끊어야 되는데~ 라면서 못끊고, 결국 세시간이 지나자, 헉! 시간이 이마이 흘렀다. 라면서 결국 마지못해 끊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대화는 점점 더 솔직담백해지는 것 같다.

어릴적 부터 함께한 우리는 어린 나이에 자존심이라는 걸 내세우느라 서로 기 싸움도 수시로 하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서로를 이기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다.


친구는 나보다 눈치도 빠르고, 속에 있는 할 말도 잘하고 똑소리가 나는 친구였다. 그러나 체격이 쪼끄만해서 나는 그런 점을 항상 얕봤다. 매번 ‘쬐끄만게.’ 이러면서 어떻게든 깔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늘 친구를 이길 수 없었다. 매번 졌고, 속으로 엄청 분했다.


친구 어머니는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 순둥이라서 그랬다. 통통하고, 순하고, 어른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는 착한 아이라서 나를 좋아하신 것 같다. 친구는 까칠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세고, 밥도 잘 안 먹고, 잘 안 크니 아줌마는 그런 친구를 나랑 비교하며 많이 야단을 치셨다.




우리는 아랫집 윗집을 살았다. 아랫집에 살았던 나를 매일 저녁 윗집으로 초대하셨다. 아주머니의 음식솜씨는 기가 막혔다. 갓 담근 김치, 밑반찬, 된장찌개... 반찬이 맛이 있어서 나는 늘 친구 집에만 가면 집에선 한 그릇만 먹던 밥을 세 그릇씩이나 먹었다. 아주머니는 밥을 잘 안 먹는 친구한테 본보기가 되라고 나를 초대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내가 잘 먹으니 먹이는 보람이 있으셨던 아줌마는 내가 먹는 모습에 복이 들었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엄마와 아줌마도 친하게 지내셨다.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 모아서 계모임 까지 했는데, 엄마는 중도에 그 모임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어울릴 돈이 없어서 엄마는 계모임엘 나가지 못했다. 대신 아줌마 와는 따로 친하게 지내셨다.

 아줌마는 식당을 차리셨다. 집안에서 음식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솜씨였다. 아줌마는 한정식 식당을 차리셔서 대구에서 유명한 찜 집으로 소문도 나도 돈도 많이 버셨다. 연예인들도 대구만 오면 찾는 명소가 되기 까지 했다. 아줌마는 식당사장님으로 성공하셨고, 엄마는 가정주부로 조용히 지내시며 서로 생활에 바빠 두 분은 사이가 소원해지셨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렇건 말건, 나와 친구는 끝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게 되었다.





몇 년을 연락하지 않아도 하루아침에 전화 한통으로 다시 친해질 수 있었다. 어릴 때 징하게도 친하게 지냈기에 추억도 많거니와 미운정 ,고운정, 오만정이 다 들어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 들어도 친구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던 교무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세상의 한 편이 기울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내 마음에 하나의 기둥이 되어주셨던 교무님. 살아 계실적엔 너무 극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를 챙기셔서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그분 기도 덕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 죄를 사해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나 대신 하시다가 내 죄가 너무 무거워서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닐까 하는 자책도 했었다.

그 무렵, 내 친구가 3년 만에 연락이 왔다.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일이었다. 내가 힘들 걸 알고 하늘에서 우리를 이어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신 교무님 생각에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을 적확하게 맞춘 듯 그 친구는 오랜 세월동안 지키던 침묵을 깨고 연락을 해 왔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꼭 짜여진 시나리오 같아 소름도 돋았다. 이 친구 덕분에 큰 힘이 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해온 친구에게 나는 다짜고짜 교무님 이야기를 하며 서럽게 울었다. 친구는 위로해주었다. 그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거두절미 하고 무조건적으로 내 이야기를 했는데도 묵묵히 들어주며 달래주던 친구.

그렇게 우리는 세월을 켜켜이 쌓아가며 우정을 지속하고 있다.

 




요즘도 전화를 하면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한 때 어렸고, 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어린 우리가 서로를 감추며 숨겨왔던 이야기를 이제는 헐벗고 말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지난 바람에 묻어버리면 그만 멈춰있을수도 있었던 이야기.

그렇게 서로의 진심을 모르고 지나왔더라면 지금처럼 허심탄회하게 계속 연락을 할 수 있었을까. 허물에 허물을 입고 서로의 진심을 모른 채 가식만 떨면 그 허물들 때문에 가려져 서로의 진가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내려놓고, 100이면 100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보고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친구에게 '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충고를 듣고 살았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나’ 라는 자아는 이 친구를 만나 세상에 내 허물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거짓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늘 맞을 까봐, 사랑받지 못할까봐, 버림받을 까봐 어떤 척이라도 했던 나는 이 친구를 만나 처음엔 많이 힘이 들었다. 솔직하라는 친구의 말이 그리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촉이 빠른 친구는 내가 조금이라도 거짓을 말하면 금방 알아차렸다. 어렸을 땐 시비를 따졌지만, 커서는 그러려니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그냥 나니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 허나 이제는 그런 허물이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생경험을 통해 깨달았으므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게 용감하게 허물을 벗고, 너 자신에게 솔직해져라! 라고 감히 말해준 친구가 참 고맙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까지 30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이 친구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이끌어주고 있다.

친구가 내게 가장 큰 스승이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내 인생을 잘 알던 친구는 내게 이제부터는 어떤 애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냥 본래 잘 하니 힘을 빼고 살아라 라고 이야기 해준다.

더 잘 보이려 억지로 고개 숙이지도 말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도 말라고 말이다.

통화하는 내내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부럽다고도 , 내가 기특하다고도 이야기 해주었다. 내가 있어서 자기가 힘들었던 시절에 참 잘 견뎌냈다고도 이야기해주었다.

누군가에게 나도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 듣고 싶었나보다.

친구에게서 그 말을 듣고 또 눈물을 쏟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기에 힘들었다.

각자 힘들었던 시절을 맞물리지 않게 보냈다.

내가 힘들 때 친구는 힘들지 않았고, 친구가 힘들 때 나는 힘들지 않았다.

힘들었어도 더 힘든 친구를 위해 내가 덜 힘든 척 했을 수도 있고, 친구가 기댈 어깨를 내어줬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손닿는 대로 , 마음 닿는대로 연락하라고 말한다.

수줍어 하지도 말고, 이것저것 따지거나 재지도 말고 내려놓고 무조건 연락을 좀 하라고 말이다.

친구는 자기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봐 걱정일랑 하덜 말고, 외롭거나 힘들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말해줬다.

소심하고 걱정 많은 내 성격을 아는 친구는 내가 늘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외로워도, 힘들어도 혼자 참으니까.

그래서 병이 생긴거라고 말이다. 다 내가 참아서 생긴 이라고 말이다. 너무도 공감했다.


몰랐지만 그랬다. 친구말이 맞았다.

나는 외로울 때 외롭다고 이야기하는 게 창피했고,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게 창피했다. 참지도 못하고 뽀로록 이야기 해버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울면 맞았고, 아파도 힘들어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그들 모두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보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통화하는 내내 틈이 날 때 마다 괜찮다 라고 이야기 해줬다.

‘이정아 니 괜찮다.’

‘이정아 니 예쁘다.’

‘착하다 이쁘다.’

‘아무하고도 비교하지마라.’

‘니가 최고다.’


먼 타국에서 홀로 잡생각이나 많이 하는 건 아닌지,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격한 감정이 생겨서 그것을 아들에게 화풀이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다.

나를 바닥 끝까지 잘 알았다.

임신도 했는데 약 먹는게 안쓰럽다고 걱정도 했다. 언젠가는 그 약을 끊어야 하지 않겠냐고도 격려해주었다.

속이 문드러지도록 늘 참고 사는 내가 괜찮지 않을까봐 친구는 계속 “괜찮다.”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내 책을 읽고, 익히 알고 있던 내용들이었지만 친구는 그래도 다시 한번 나를 더 생각했다고 한다. 생각이 깊은 친구. 늘 나보다 한발 먼저 나아가 알아주던 친구. 그렇게 알아주는 것을 아는 채 한다고 시샘만 했던 나는 이제야 친구에게 진정으로 미안해지고, 또 고마워진다.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나는 이제 앞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기로 했다.

늘 겉으로만 표현하던 나는 내 내면에게 칭찬 해줄 줄을 몰랐다.



오랜 친구에게서 ‘괜찮다.’라는 말을 듣고 나니 새롭게 나를 다독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

나는 괜찮다.

괜찮다.

된다.

늦어도 된다.

하면 된다.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된다.

다 된다.

그래도 괜찮다.


라고 말이다...


당연한 듯 내 곁에 오래도록 존재해왔던 친구.

없었다면 40평생의 인생 중 무엇을 추억할 수 있고,

삭막한 인생을 어찌 버틸 수 있었을까...


친구가 서있는 모습을 보고 따라 서 있을 수 있었고,

친구가 말해주는 내 모습을 듣고서야 나를 알았다.

서로가 주고받은 웃겼던, 슬펐던 숱한 대화들 덕분에

기나긴 세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즐겁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친구가 내게 손 내밀어 주고.

말을 걸어주고,

쳐다봐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토록 예쁠 수 있는게 아닐까..




2022.07.15

브런치작가 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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